장르를 오가는 정통 미스터리의 미덕
– <용의자 X의 헌신> 리뷰-
장윤정
작품명: <용의자 X의 헌신>
작: 히가시노 게이고
각색: 나루이 유타카
연출: 이기쁨
번역: 이홍이
단체: 바나나문 프로젝트
공연일시: 2014년 7월 11일(금)~8월 2일(토) 평일 8시/ 토요일 3시, 7시/ 일요일 3시/ 월 쉼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3관
관극일시: 2014년 7월 25일(금) pm8:00
추리물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종의 게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게임에는 철저한 이성과 논리력, 도전하는 행위와 승부의 세계가 존재한다. 추리물 또한 체험자의 도전의식이 요구되고 진실공방에 대한 승부가 펼쳐진다. 더불어 그 전제에는 언제나 적법한 합리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곧 추리물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 감정은 배제한 채 철저히 이성과 논리로 근거를 구축하며 수수께끼를 푸는 것의 즐거움. 실존하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이성적으로 가장 완벽한 추론을 해낼 때, 그리고 그것이 진실과 부합되거나 보다 더 뛰어난 사고(思考)를 확인하게 될 때 체험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추리물은 타 장르에 비하여 상당히 논리적이고 철저하게 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설득력도 뛰어나게 된다. 단, 체험자들의 기대가 클수록 더 뛰어난 사고력과 논리가 요구되는 부담이 있다. 이 모든 요소에서 한 발 물러나 관망하는 작가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그 중에서도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의 근본적인 전제부터 헤집어 놓는다.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던 기존의 추리법과 달리 단서 이전의 사건 전제부터 미스터리로 만들었다.
『용의자 X의 헌신』에는 3가지의 흥미로운 요소가 등장한다. 첫 번째, 범인과 범죄과정은 드러내놓고서 그것의 은폐과정을 유추해가는 점이다. 두 번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단연 으뜸인 천재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진실이 존재하는 부분이 이 작품의 묘미다. 이 과정에 하나로 관통되는 인물이 있다. 주인공 이시가미 테츠야다. 이시가미는 고등학교 수학선생으로서 수학적인 부분에 뛰어난 천재다. 수학에 필요한 상당한 논리력은 이시가미의 관찰능력과 유추능력을 뛰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범죄를 은폐했고 그것은 은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용의자 X의 헌신』이 남다른 추리소설이었던 것은 이 의미의 지점 때문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말 그대로 이시가미 테츠야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헌신’이었다. 무엇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러나 이시가미의 사랑은 범인(凡人)의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가 믿는 아름다움은 외형을 벗어나 존재한다. 수학의 난해한 공식을 풀이해갈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 구김 없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즐거움이 가득한 두 모녀의 삶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이시가미는 사랑했다. 즉, 그는 ‘삶의 아름다움’ 을 사랑한 것이다. 마침 자살을 시도하던 그때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두 모녀의 등장은 이시가미의 세계를 변화시켰다. 수학의 아름다움에서 삶의 아름다움으로. 즉, 이시가미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의미 있는 삶, 아름다운 삶을. 아마도 그 후 그는 늘 옆방에 사는 두 모녀에게 신경을 기울이며 살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닌 조금이나마 삶의 온기를 얻어 느끼고자 했던 노력이리라. 그런 그를 꿰뚫어 보는 인물이 물리 천재 유카와 마나부다. 유카와는 이시가미의 근본적인 성격부터 사고까지 예측해낸다. 그렇기에 역으로 이시가미를 진정으로 아낀다. 이 천재들의 대결은 치밀하고 첨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일직선 위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날선 칼을 서로에게 겨누는 듯하지만 서로가 아닌 진실과 거짓을 상대하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전혀 대립하지 않는 인물들인 것이다. 이 지점은 단순한 용의자 찾기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두뇌싸움인 것처럼 하면서 이시가미라는 인물의 숨겨진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다. 결국 이시가미는 실제 피의자인 하나오카 야스코의 자수로 무너지고 만다. 완벽한 계획의 무너짐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무너짐이 이시가미를 무너지게 만든 것이다. 야스코는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단란한 모녀의 가정을 꾸려갔다. 그것은 곧 이시가미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아름다운 삶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시가미가 무너진 것은 그녀가 무너져서라기보다 아름다운 삶이 무너져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살해를 인정하는 순간 야스코는 아름다울 수 없게 된다. 범죄자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이미 무너진 것을 애써 외면한 채 환상 그대로 간직하길 바랐던 것일지 모르겠다. 결국 처참한 현실은 드러나 그의 환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것은 이시가미가 이제껏 숨겨왔던 울분을 토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이 이시가미의 오열로 마무리 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적절했다. 여기까지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을 이야기하면서 왜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나 장황히 늘어놓았는가?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소설『용의자 X의 헌신』의 헌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일본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이 헌정에 가까우리라 짐작된다. 각본가 나루이 유타카는 스스로 원작 소설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것을 가능한 그대로 들여온 한국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작품소개에 가까웠다. 한국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이하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범죄의 과정, 대결의 구도, 밝혀진 진실 모두 같다. 즉, 소설을 연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에 맞게 옮겨놓은 것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이미 일본과 한국에서 영화화된 적이 있다. 게다가 소설은 그 자체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연극으로 변화시킬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 단연코 연극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극성이란 무엇인가? 현장감과 축약, 상상의 여지와 함께 삶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다면 더 할 나위 없는 연극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에 따라 본다면 <용의자 X의 헌신>은 적절했다. 소설이나 영화가 연극으로 변화될 때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 공간성에 대한 부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다양하고 압축적인 공간으로 표현할 것인가? <용의자 X의 헌신>은 전면에 반지하의 공간과 지상의 공간을 만들어 지하에는 노숙자의 거리, 지상에는 주요 인물들의 연립주택으로 표현했다. 무대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문 하나를 여 닫음으로써 도시락 가게가 되거나 쿠도의 집이 되었다. 그 반대편엔 물리학자의 연구실을 표현했다. 무대 구석에는 빠질 수 없는 공중전화 부스도 존재한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공간의 구분으로 작품의 모든 공간을 적절히 표현해냈다. 또, 배우들의 열연은 현장성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각 인물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각자의 개성으로 인물들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원작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다행인 것은 일본 캐릭터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정서에 거부감 없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물 보다는 사건이 중심인 추리의 장르적 특성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연출과 배우들의 고민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선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연극적으로 적절히 압축한 상태였다. 과도하게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원작 그대로였다. 이러한 점들을 비롯하여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소설 『용의자 X의 헌신』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다만 극 중에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여 원작 소설을 읽어주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인물의 생각과 심리묘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말이 별로 없는 이시가미의 경우 내면 묘사가 더욱 필요하다. 연극의 경우 아무런 행동이나 대사 없이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것을 극복하는 장치가 소설을 읊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긍정적 효과를 일으키는 데 첫 번째는 무엇보다 인물의 내면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덕분에 연극성이 생성되는 점이다. 한 인물이 단순히 걷기만 하더라도 다른 인물이 읊어주는 말로써 관객은 정확하게 내면을 파악하게 된다. 동시에 소설과 연극의 장르를 오가는 현상을 경험하며 마치 소설이 눈앞에서 시현되는 걸 느낀다.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경험하며 메타드라마로써 그 소설을 다시 연극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다차원적인 구조는 관객에게 새로운 형식을 경험하게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집중을 유도한다. 이렇게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소설을 연극으로서 적절히 표현하고 있었다.
원작을 그대로 표현한 점은 반가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을 동시에 가진다. 먼저, 원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져버리지 않았음에 대한 고마움과 반가움이 있을 것이다. 흔히 소설을 타 장르로 변환할 때 원작의 미덕을 놓치거나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정확하고 알맞게 원작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원작을 아끼는 관객들에겐 가볍고 즐거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또,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에겐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덕을 느낄 것이다. 정확한 원작의 전달은 마치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정보를 전달받은 관객들은 나름의 재미를 얻었을 것이다. 문제는 원작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연극으로서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기대한 관객들이다. 사실 <용의자 X의 헌신>은 내용은 모르더라도 그 이름자체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미 소설과 두 가지의 영화로 알려질 만큼 알려진 작품이기에 관객들은 어쩌면 또 다른 모습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연극의 장르로 등장하였다. 소설이나 영화가 어떻게 ‘연극으로서’ 표현되었을 지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공간의 활용과 현장성은 잘 나타났지만 원작 그대로를 나타낸 것이 역으로 아쉬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원작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에겐 모두 파악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비용을 들여 다시 볼 관객은 많지 않다. 내러티브를 바꾸지 않겠다면 형식적으로 좀 더 확실한 연극성이 드러나길 바란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더욱 연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일본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대극장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반면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소극장으로 표현되었다. 아마 물리적인 공간차이에서 연극적 효과를 축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물리적 현실을 고려한 또 다른 표현방법에 대하여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창작자들의 고민이 집요하고 끈질길수록 그에 부응하는 결과가 돌아오리라 믿는다. 만일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이 재공연까지 하게 된다면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이 한국에서 초연이라는 점이다. 초연은 언제나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현재 대학로에서 미스터리 연극을 표방하면서도 제대로 된 미스터리를 구축한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런 와중에 탄탄한 원작을 그대로 표현한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의 등장은 반갑다. 어쩌면 이후 한국 창작극에서 정통 미스터리 장르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이번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은 원작 그대로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원작의 미덕은 고스란히 연극 자체의 미덕으로 옮겨왔으며 관객들은 그만큼 흥미와 재미를 경험했다. 다만 다음번 공연에서는 연극으로서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기대한다. 만약 원작에서 벗어날 용의가 있다면 이시가미의 인물 구축에 좀 더 신경 쓰면 좋을 것이다. 지금은 극중 소설을 읊는 것으로 대신 표현되고 있지만 이후에는 소설에서 벗어나 연극의 캐릭터만으로 내면을 구축해보길 기대한다. 또, 원작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이기에 효과적인 마무리일 수 있으나 연극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좀 더 변화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연극은 사람과 삶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이시가미의 울부짖음으로 마무리하기엔 사건 묘사 외에 연극에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시가미가 아름다움을 보호하려는 것, 그 아름다움이 어떤 아름다움인지, 이시가미는 어떠한 인물인지 내면의 묘사가 더 세밀하게 표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의 울부짖음이 더욱 와 닿게 되며 그 후 짤막한 대사 한 마디만으로도 삶이 응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시가미라는 인물을 통하여 삶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사람과 삶에 대한 고찰이 더해진다면 아마 연극 <용의자 X의 헌신>의 무게는 더욱 달라지지 않을까 짐작된다. 이번 공연은 작품을 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충분히 의미 있었다. 덕분에 관객들은 미스터리 연극의 재미를 충분히 느꼈으며 그만큼 발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다음 공연을 볼 때엔 연극으로서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기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