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협회 박장렬회장이 보낸 ‘서울연극제 2015 무산 가능성과 연극인들의 입장’이란 서신에 대한 심의위원 3인의 입장
먼저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으로 인해 연극계에 갈등이 벌어진 것에 대해 심의위원 김미혜, 김성희, 이은경 3인 모두 깊은 유감을 표명합니다. 그동안 의견 표명의 적절한 기회를 모색해 오던 중, 1월 17일 서울연극협회 박장렬 회장이 심의위원 3인의 이름을 명시하며 답변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왔기에 이에 대한 답장으로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대관 심의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고자 합니다.
입장발표 지연의 이유
우리가 심의에 대한 의견을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심의위원들이 당당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수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이란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연극제 운영방식이나 문제점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정치적인 탄압이란 쪽으로만 몰아가며 매도하는 바람에 의견을 밝힐 시점을 놓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연극협회는 대관 결과가 공개되자 심의위원들에게 심의과정을 밝히라는 공식적인 요구를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연극탄압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궐기대회를 개최하면서 심의위원들 전원을 ‘한국연극을 사망케 한 오적’으로 규정하여 우리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밝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서울연극협회가 대관 탈락을 ‘연극제 폐지’ 결정으로 확대해석하며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제대로 소통될 수 없고, 오히려 소모적인 논쟁의 빌미를 또 한 번 제공할 수도 있으리라 우려했습니다. 서울연극제의 대관을 당연한 권리로 설정하고, 탈락의 경우엔 무조건 ‘연극계 탄압’이란 흑백논리를 적용하며 투쟁하는 협회 측의 대응 행동을 보니, 그 당시 입장을 표명한다고 해도 합리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울연극제를 둘러싼 담론이 보다 객관화되고,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대관탈락 사태가 봉합의 국면에 들어가고, 대학로X포럼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이제 심의과정과 심의 의견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자 합니다.
심의위원의 구성
심의위원들은 다원과 뮤지컬 분야까지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습니다. 심의과정에서 다른 두 분야의 심의위원들도 똑같은 비중으로 심의에 참여했습니다. 심사위원 구성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심의의 전문성이나 형평성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다수의 평론가들은 1년에 100편 이상의 공연을 관극하고 있습니다. 우리 심의위원 3인도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많은 공연을 관극해왔으므로 우리 3인의 관극체험을 모두 합친다면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전반과 흐름에 대해 포괄적인 전망과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팩에서는 연례적으로 심의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해왔는데, 이번에는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서 이 점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명단 비공개를 요청한 바도 없고,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 3인은 이름이 당연히 공개되는 것으로 알고 심의에 임했음을 밝힙니다.
심의 과정의 공정성
서울연극협회 측에서는 ‘외압’이나 ‘표적심의’를 통한 연극탄압의 의혹을 제기하였고, 더 나아가 정확한 사실규명 없이 이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연극계의 여론을 일방적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관심의에 참여하면서 어떤 단체나 개인에 대해 편파적인 견해를 갖지 않고, 공정하게 심의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번 대관 심의는 예년과 다른 기준에 의거해서 진행되었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에 편입되면서 개편된 한팩은 전과는 다른 새로운 극장 운영의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대관 심의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심의위원들에게 제시한 심의기준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심의위원들은 대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추천하는 제한적 역할만 수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정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심의위원들이 심의하여 추천한 단체들을 한팩이 문화예술위원회에 보고하고 추인을 받는 추가 심의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째, 한팩이 새롭게 정립한 극장 운영의 비전은 ‘명품극장’이기 때문에 예술적 수월성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여 선정해 줄 것을 제시했습니다. 예년 심의의 경우 연례적인 행사의 대관일정을 미리 배치한 후 나머지 일정을 중심으로 대관단체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번 심의는 연례행사에 대한 고려 없이 백지 상태에서 심의를 진행했습니다.
셋째, 우수한 작품의 장기 대관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선정단체의 숫자를 줄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심의에서는 예년에 비해 30% 이상 대관단체의 숫자가 줄었습니다. 탈락률이 높아지면서 예년에 대관되었던 수준의 여러 단체들이 부득이하게 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한팩이 제시한 대관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공정하게 심의하였기에 서울연극협회에서 심의위원들을 “거수기”로 폄하한 것에 대해 인격적 모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팩이 서울연극협회와 타결하는 과정에서, 서울연극협회의 강경한 집단행동에 밀려 서울연극협회의 요구조건을 상당 부분 수용함으로써 심의의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깊은 유감을 갖고 있습니다.
대관 탈락이 서울연극제 폐지를 의미하는가?
서울연극협회에서 폄하하는 ‘일개’ 대관심의위원 3인은 35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서울연극제를 ‘없애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서울연극제의 현황과 발전적 방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면서 심의를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서울연극제가 명실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연극제가 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희곡작품과 공연 공간 간의 미학적 고려 없이 타성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서울연극제의 예술적 혁신과 최고의 공연 품질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제도적, 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단순히 서울연극제의 연륜을 내세워 절대 성역처럼 관습적 대관이 이루어지는 관행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과연 서울연극제와 한국연극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대관 탈락이 일어났을 때, 우리 심의위원에게 쏟아질 비난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연극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그런 비난 보다는 서울연극제의 대관 탈락이라는 초유의 강공수를 둠으로써 서울연극제의 운영방식과 미학적 측면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이끌어내고 앞으로 최고의 연극제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심의위원 3인은 오랜 동안 서울연극제를 지켜보면서 창작 초연 위주의 초청작들이 규모나 미학적 측면에서 한팩이 운영하는 극장들과 맞지 않는 경우들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팩이 심의과정에서 앞으로 더 많은 극장을 임대운영하여 공연공간의 다양성을 모색할 예정이고, 이는 이번 서울연극제에도 해당될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에, 서울연극제가 새로운 극장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바람직한 변화나 대안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연극제가 그동안 한팩 극장들에만 제한되었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공간과 연극개념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울연극협회가 주장한 것처럼 한팩 대관심의에서의 탈락이 서울연극제의 무산이나 폐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최 측의 연극제 운영능력과 비전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습니다.
지난 1월 6일 열린 대학로X포럼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는데, 김재엽 연출가의 발제문 중 심의위원들의 생각과 동일한 내용이 있어서 길지만 인용하고자 합니다.
“창작초연의 공간으로 아르코예술극장이나 대학로예술극장이 무조건 타당한가? 꼭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특히, 제작규모와 공연공간이 일치된다고 보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은 기존 서울연극제의 창작초연작품들이 아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연극제에서 주목받지 못한 작품들은 오히려 덜 성숙된 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급하게 빌려 입었다가 영영 사라지는 소모품이 되기도 한다.
특히, 희곡중심의 드라마를 앞세우고, 무대와 객석의 구별이 뚜렷한 재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 아닌 경우엔 서울연극제에서 제대로 평가받긴 어려워 보인다. 우리의 서울연극제는 어쩌면 쉬운(?) 드라마를 양산하게 만드는 촌스런(?) 축제로 자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시대의 외양은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시대의 연극이 무엇인지는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는 낡은 연극이라는 개념 안에서 새로운 연극언어를 찾아보려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서울의 연극인들은 서울연극제가 관습적인 박물관처럼 보존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서울연극제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질문」 중에서)
우리들은 우상전 선생님이 『오늘의 서울연극』 51호에 게재한 글 「KAL의 ‘땅콩회항’과 ‘대관탈락 사태’」에서 지적한 것처럼 연극계의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 과감하게 ‘NO’라고 밝혔기에 구각을 깨트리는 진통의 중심에 섰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로X포럼과 같은 자발적인 소통의 장이 열리고, 생산적인 논의의 물꼬가 트였다는 것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연극계의 “공공의 적”인가?
서울연극협회가 공식적으로 심의위원들을 “한국연극을 사망케 한 오적”으로 매도하고, 다양한 방식과 경로로 공격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합니다. 심의위원들의 공적·학술적인 활동을 방해하고, 개인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피켓시위를 하며, 단체 문자를 보내는 등 명예를 훼손하는 집단행동, 비민주적인 행위를 지속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3인은 누구보다 한국연극을 사랑하고 있으며, 서울연극제 공연들 역시 오랜 동안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관극해왔습니다. 심의위원 선정의 공정성과 형평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수많은 공연들을 꾸준히, 열심히 관극해온 심의위원들의 전문성을 무시하는 공정하지 못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연극인’이라고 전제하는 서울연극협회가 과연 평론가이자 한국 연극계의 일원인 심의위원들의 인격에 대해서는 배려가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35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연극제의 운영방식, 작품선정, 공연미학 등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논의가 대두된 점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은 종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연극제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급변하는 연극환경 속에서 서울연극제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론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한국(서울)연극을 사랑해 온 우리들은 연극계와 연극인들이 힘을 모아 서울연극제의 발전적인 미래를 일구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5.01.20.
김미혜, 김성희, 이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