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신화의 초석
<그녀들의 집>을 보고나서
장윤정
작: 김수미
각색: 오유경
연출: 오유경
극단: 그룹 動·시대
공연일시: 2015/05/01-06/14
공연장소: 씨어터 송
관극일시: 2015/05/17
지금까지 한국연극계에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여성작가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개중에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몇몇 작가들이 있었으나 여성의 세밀한 심리까지 완전하게 밀착한 경우는 드물었다. 여성작가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게 되면 자칫 ‘작가’의 범주에서 밀려나 ‘여성’작가라는 하위범주로 정의될 위험이 생긴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을 한계 지어버리고 위협하는 행위다. 때문에 많은 여성작가들이 어쩌면 그것을 경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여성을 주제로 혹은 소재로 삼고서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가 있다. 작가 김수미다. 그녀의 남다른 점은 발칙함, 다른 말로 솔직함이다. 그녀의 작품은 낯 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다. 그 말은 곧 아주 치밀하게 인간을 밀착해낸다는 의미로 치환된다. 그 속에 터부란 없다. 온통 쥬이상스들이 넘쳐난다. 그러한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본인 내부에 숨겨진 것들을 기꺼이 스스로 드러내는 진실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아주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심리가 나타난다. 김수미 작가의 작품이 공연으로 거듭날 때에는 이 섬세한 심리를 어떻게 제대로 표현하느냐가 가장 핵심이 될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그녀들의 집>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었다.
작품은 체홉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어느 한적한 도시 외곽의 집. 그리고 그 집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호수.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서 그 곳에 이미 오래 머물던 사람들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 그 속에서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들과 심리적인 갈등. 마치 체홉의 <세 자매>를 연상시킨다. 두 작품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며 다른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홉의 <세 자매>가 떠오른 것은 과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세 자매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집>에서 세 자매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그녀들이 집에 다시 돌아온 것은 아버지를 임종시켜버리거나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딸로서 여성으로서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면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의 내밀한 심리는 체홉을 연상시켰으나 그 해결방식에서는 체홉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서사의 줄기와 표현기법 때문이다.
극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조명과 무대에 의해서였다. 이 공연의 특색은 무대 활용이었는데 객석 뒤편 혹은 옆면까지도 무대가 되었다. 배우들은 객석 뒤쪽을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등장하고 움직였다. 이 지점이 특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객석의 형태가 일관적으로 무대만 향하고 있는 일자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객석을 누비는 것은 이미 익숙한 표현법이다. 이제는 새로울 것이 없는 형태다. 기껏해야 관객의 옆면으로 배우가 이동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일자형 객석이기에 아무리 그 속에서 배우가 움직여도 관객은 여전히 무대와 객석을 분리시켜 감각한다. 그런데 <그녀들의 집>에선 달랐다. 객석의 위치가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었기에 동일한 배우의 움직임도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더불어 객석의 자유로운 배치는 작품의 세계와도 어울렸다. 무대는 ‘집’이라고 정의되는 공간을 충분히 표현주의의 형태로 구성하고 있었다. 개방형으로 구성된 무대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전반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활용하고 있었다. 어둠은 상상력을 증대시킨다. 그렇기에 이 ‘집’의 중심이자 그녀들의 중심인 아버지는 완전한 어둠 속의 자리에서 존재한다. 객석을 비롯하여 무대까지 전반적으로 영리한 연출력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그녀들의 집>에 등장하는 세 자매는 모두가 복잡한 심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 그녀들의 심리가 무대와 객석의 형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표현주의적 기법은 물리적인 형태를 넘어 작품의 서사 속에서도 등장한다.
작품에서는 체홉의 감성이 배어있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지점이 있다. 부조리한 서사가 진행되는 지점이다. 작품에서 세 자매는 각자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뜻대로 그 기대에 부응하여 살았으나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던 인물이다. 둘째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서 진심어린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셋째는 자신을 딸이 아닌 여자로서 보았던 아버지에게 환멸과 애증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아버지를 거부하고 증오한다. 어리고 약하기에 당해야했던 힘의 논리를 이제는 약해져버린 아버지에게 되갚는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힘의 위치가 전복된 것이다. 세 자매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고 결국 죽이기까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와 닮은 남자를 모두 사랑하고 만다. 첫째와 둘째는 이 아버지와 닮은 남자에게 애정을 요구하고 갈망한다. 셋째는 놀이처럼 남자를 유혹하지만 숨겼던 내면들을 무장 해제된 듯 남자에게 보이고 만다. 결국 이들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진정한 애정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집’은 곧 ‘아버지’였다. 첫째 딸은 아버지와 같은 병을 앓는다. 어쩌면 세 딸 중에 가장 아버지와 닮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모든 기대에 부응하며 아버지의 병까지 똑같이 닮아버린 인물. 그렇기에 어쩌면 가장 아버지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매들을 죽이고 남자까지 죽여 버리고 마는데 이 세 죽음은 다른 의미를 띤다. 아버지의 죽음은 과거에 대한 응징이자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집안의 새로운 위치를 점유하는 행위가 된다. 아버지가 없는 집은 첫째 딸이 곧 가장의 위치가 되기 때문이다. 첫째 딸은 새로운 가장이 되어 집안을 구성한다. 자신의 뜻에 의해 혹은 예상하지 못하게 자매들을 죽이고 남자를 얻는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남자를 죽여 마치 박제해 놓듯이 남자의 시체를 자신의 옆에 둔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집을 짓기로 하는데 이 ‘집’이 곧 이들의 혹은 첫째 딸의 세계가 된다.
‘그녀들의 집’은 재개발 공사가 한 창인 동네에 존재하고 있다. 그곳에서 이 집은 마치 동떨어진 세계처럼 어둡고 갇힌 공간을 구성한다. 간간히 창문을 열고 닫음으로 하여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데 대부분 창문을 닫은 채로 존재한다. 세계와 단철한 채 완전히 아버지의 세계만으로 가득한 공간이 된다. 이후 이 집은 ‘낡은 집’으로 표현되는데 큰 딸은 마지막에 창문을 열며 이 ‘낡은 집’을 부수고 새로 집을 지을 것을 언급한다. 아버지의 세계로 가득했던,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기억으로 가득했던 집은 ‘낡은 집’이 되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기대에 찬 것이다. 아버지와 닮은 남자의 시체와 함께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자신이 마치 아버지가 된 듯하다. 이제 아버지의 신화로 가득했던 낡은 집은 부서지고 자신의 신화를 세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아버지와 같아버린 그녀가 얼마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낼지는 모르겠다. 그 지점은 창문을 닫고 자신이 20살에 연주했던 음악을 틀며 남자의 시체를 휠체어에 담아 옮겨가는 뒷모습에서 암시된다. 점점 몸이 굳어 비틀거리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 여전히 닫혀 버린 창문, 그 속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은 마치 닫힌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는 상황에서 점점 다가오는 공사현장의 커다란 소음은 마치 이 새로이 안정된 세계를 부숴버릴 듯이 느껴진다. 그녀의 새로운 신화가 얼마나 유지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연은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사도 분병하고 표현기법도 상징적으로 처리하여 지루하지 않았으며 각 배우들의 열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은 각자의 캐릭터의 특색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느껴졌다. 세 자매는 의상을 비롯하여 각 인물들의 서로 다른 캐릭터를 분명히 완성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지점은 존재한다. 먼저 갑작스러운 인물들의 죽음은 작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고 말았다. 작품의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극 중에서 첫째 딸에 의하여 많은 인물들이 죽음에 처하고 첫째 딸의 캐릭터 또한 갑작스럽게 변화되는 지점이 보인다. 이 지점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인물의 내밀한 심리가 어떻게 더 정밀하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따라 달라진다. 인물의 행동에만 집중해버리면 관객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인물이 그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의 내밀한 심리가 세밀하게 표현된다면 아마 관객들 또한 그 인물에 대하여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써는 그 지점에 있어서 약간 아쉬운 형태다. 첫째 딸의 갑작스러운 성격 변화는 전체적으로 극의 분위기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한다. 문제는 거기서 설득력을 잃어버리면 그 전까지 쌓아놓은 작품 전체의 설득력까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있어서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김수미 작가 작품의 미덕은 종잇장에 베이는 아픔과 같은 것이다. 예리한 칼끝에 베이는 것이 아닌 ‘벼리는’ 것과 같은 지점이 있다. 아주 예리하게 살점을 스쳐지나가면서 간지럽고도 차갑고 따끔한 그런 아픔이 존재한다. 오유경 연출은 그런 점에 있어서 영리하게 작품을 표현한 것 같다. 만일 이 작품을 대학로 여느 극장에서와 같이 프로시니엄 무대로 구성했더라면 아마 그 미덕이 덜 나타났을 것이다. 극장의 내부 구조에는 기둥들이 존재하여 무대를 가릴 수도 있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출은 이를 역으로 적절히 활용하여 작품을 잘 완성시켰던 것 같다. 다만 각 인물들의 숨겨진 심리가 발현되고 성격이 변화되어 가는 지점을 조금만 더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한층 더 밀도 있게 작품이 완성되리라 믿는다.
<그녀들의 집>은 2015 서울연극제 자유참가작으로 공연되어 작품상과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결코 그녀들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세밀하고 밀도 있게 심리를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지 않은 한국연극계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참으로 반갑다. 굵직한 서사가 매력적인 작품이 있는 반면 세밀한 심리가 표현되는 작품도 분명 연극계에서는 필요하다. 앞으로 더 많은 작가들이 여성으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면 한다. 비록 그 서사가 작가의 역량을 한계 지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과감히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앞서 <그녀들의 집>의 경우처럼 그것이 결코 작가의 세계관을 위협하기만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덕분에 이러한 변화들로 다양한 공연들이 생성될 것이며 더불어 우리 연극계까지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