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실주의의 담론적 연출
<청춘·간다>
하 형주
예술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지만, 예술이 ‘아무것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포스트모던 예술에 대한 반성과 함께 부상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이 혹은 연극이나 문학작품이 방향성을 상실한 채 단순히 ‘전시(l’exhibition)’에 머무르는 예술적 경향에 대해서 반성을 가져온다. 필자는 포스트모던 연극의 이러한 경향을 ‘전시된 연극’으로 명명한 적이 있다. 이러한 경향의 포스트모던 연극에 대한 반성은 유럽에서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으며 그 대안적 예술론이 정립된 반면, 한국연극의 경우 여전히 전통적 재현극과 퍼포먼스 그리고 포스트모던 경향의 연극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올 페스티벌 봄의 초청공연들의 많은 부분이 포스트모던 예술의 초기의 실험적 작업들, 전통적 예술형식을 거부하며 전시적 경향의 작품들을 초청하면서 우리의 연극적 현실을 80년대 유럽이 행해던 작업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특히, 작금의 한국적 상황, 경제논리 하에서 당근과 채찍으로 유지되는 사회체제는 모든 윤리적 가치가 폐지되는 상황에 이르면서 현실에 대한 예술적 역할에 대한 반성이 부상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몇몇의 예술가들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서 유물론적 리얼리즘 형식을 가지고 그들의 연극을 연출한다. 그 단적인 예로 삼성전자 백혈병 사망자를 다룬 <반도체소녀>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연극적 상황은 오히려 21세기 예술적 논의를 거슬러가기도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몇 예술가들의 감각적 직관은, 스스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주는 재현적 형식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단순히 ‘전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담론적 연출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연극적 형식을 추구하는 연출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의 미덕은 이미 ‘정해둔’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위반하며 익숙해져버린 논리들의 ‘틈’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최원종 작·연출의 <청춘·간다>는 바로 이 새로운 ‘담론적’ 연출의 맹아(萌芽)를 보여주고 있다.
<담론적 연출의 새로운 사실주의>
극은 유명인과 연예인에 이어 일반인 릴레이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청소년 작가 인영과 소설가이자 교수인 민규의 즐거운 모습이 영상으로 보이며 시작된다. 극의 줄거리는 간결하다. 큰 경제적 어려움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대환과 수아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온다. 하지만, 그들이 동거하며 살고있는 집의 전세값을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에 부모님의 도움없이 이를 해결하는 것이 녹록치 않음을 알게된다. 사실, 수아도 대환도 부모로부터 완전히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꿈을 지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다고 느끼며, 스스로의 삶의 태도에 좌절하거나 혹은 이 현실에 타협하는 모습으로서의 성장통을 겪는다. 최원종 작·연출의 <청춘·간다>는 어리지도 기성세대도 아닌 중간세대에 속해있는 30대 남녀 소시민의 일상의 단편들을 나열한다. 하지만, 일상의 단편적 모습들을 병렬적으로 그려내면서 연출은 단순히 30대의 초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출은 이 일상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처해있는 사회구조,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우리 사회의 ‘틈’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이 ‘틈’을 통해 거시적 세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개인적 삶의 모습을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이들의 태도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극에서 최원종 연출은 각 장면을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형식으로 구현해내지만, 사실, 이 형식은 기존의 전통적, 재현적 사실주의 형식, 즉 극적 연속선 상에서의 갈등이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로 드러나는 ‘직시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 직시적 이미지들은 그 자체의 물성을 드러내는데, 단적인 일례는 민규의 오피스텔에서 그의 나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탐욕이다. 이 이미지들은, 뿐만 아니라, 겹쳐지면서 교차된 이미지들 사이의 ‘틈’을 열어놓는다.
<겹쳐진 이미지의 ‘틈’>
극의 초반, 대환이 텔레비전을 틀면 들리는 뉴스보도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 두 이미지를 교차시킨다. 한편에선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미사를 진행하는 정부의 모습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세월호 가족들의 사건진상규명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전경들을 배치하는 정부의 모습과 전경의 호루라기 소리들이 동일 공간에서 교차된다. 이 겹쳐짐을 통해 드러나는 ‘틈새’는 현 정부의 이중적 얼굴을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드러내면서 새로운 사유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교수 생일에 회비를 30만원 내야한다는 문자를 받은 수아는 돈 대신 선물이라도 하지 않으면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삭제할 것이라며, 30만원 대신 와인 선물이라도 하기위해 와인가게에서 와인을 구매한다. 와인 구매 후 대환과 수아가 자신들의 점심을 위해 들어간 편의점, ‘세븐 일레븐’의 마크가 뒷배경막에 투영되고 그 곳에서 이 둘은 잘 포장된 와인을 사이에 두고 삼각 김밥으로 그들의 식사를 대신한다. 거대자본인 세븐일레븐이 골목상권을 침투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잘 포장된 와인과 삼각김밥을 먹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이질적 공간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폭력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수아의 계속되는 변비를 통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해결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최원종 연출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이들 현실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들을 재구축해 교차시키며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이 사회 체계의 모순과 갈등의 그 ‘틈새’를 무언적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부조리한 구조적 문제,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체제하에 이루어진 경제중심논리 그리고 기득권의 횡포 등, 이 사회의 갈등의 틈을 드러낸다.
<패러디된 현실>
자칭,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었다는 소설가이자 교수인, 민규는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수상소감을 배따라기의 “은지” 노래가사를 차용해 적는 행태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아에게 강의자리 주겠다면서 그녀를 성추행하고자 한다. 이 위선적 교수의 모습을, 연출가 최원종은, 교수가 “은지”노래를 기타를 치고 부르는 낭만적 감성을 드러내게하면서 패러디해낸다. 그리고, 연출은 와인가게 주인의 와인설명에서 나온 강용팔이라는 가상의 인물, 즉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정치자금의 핵심인물인 그에 대한 설명을 자랑처럼 하면서, “얼마 전에 강용팔씨가 국무총리로 지명 됐을 때도 이 와인 땄었어요. 비록 일주일만에 내려오긴 했지만 ” 드러나는 와인가게 주인의 무감각한 의식을, 그리고 그럼 이 와인을 교수도 알것이라며 구입하겠다는 수아의 말, “그럼 교수님도 이 와인 이름 알겠네?” 을 통해 이들의 무감각한 의식을 패러디해낸다.
그리고, 이 사회체제의 흐름에 안주하기위해 교수와 타협하고자 하는 수아는 자신이 소개시켜준 대환의 친구가 게임프로그래머를 하는데,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돈을 번다는 사실을 강조해 대환을 다그친다. 그리고 그녀는 대환에게 20대도 넘은 지금 무엇인가를 더 배우겠다고 한다며 대환을 비난하면서 그녀 스스로 이 사회체제의 흐름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극에서 교수 민규의 오피스텔에서 민규의 벗은 몸과 함께 겹쳐진다.
하지만 대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인영과의 불장난에 몰입하는 대환의 모습 역시 수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대환의 모습은 이 둘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환: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까 […]
수아: 넌 왜 그런 거에 관심이 많은거야?
대환: 어?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하니까.
수아: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
극 전체를 통해, 대환과 수아의 모습이 담아내는 이미지들은 이미 습관화되어버린, 그래서 그 속에서 배제되어버릴까 두려워하는 혹은 그래서 도피해버리기도 하는 이들의 모습을 팝아트적 이미지로 변성시키면서 ‘낯설음’의 순간을 제공한다. 이 순간은 이질적인 감각적 경험이 관객들에게 제공되는 순간이다.
결국, 최원종 연출의 새로운 사실주의는 부유하는 기표처럼 이미지 그 자체로 드러나면서, 그리고 이 이미지들을 교차 직조시키면서 기존의 합의된 감각세계를 재편성해내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그는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권리에 대한 무수한 증명들”을 직조해내며, “장소없음(le non-leu)에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연출은 이미 정해둔 말과 행위하는 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틈새’를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담론을 창출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