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 편집인의 글)
예술의 역설
예술은 자주 역설적(逆說的)이다. 우선 일반 경제 원칙과 상반되는 “비효율의 효율”이 있다. 예를 들어 백 번을 시도해서 하나의 작품을 내놓는 작가와 천 번에 단 하나의 작품만을 탄생시키는 작가가 있다 할 때 후자의 작품이 전자의 작품에 비해 열 배가 아닌 수백, 수천 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 지원 정책에 있어서 섣부른 “선택과 집중”을 경계하고 “무조건 지원”을 병행하라 주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효율의 효율”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예술은 한계를 토대로 성립한다. 한계는 때로 불편하다. 회화는 캔버스 안에서 실현돼야 하고 연극은 무대라는 현장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살아 있는 예술은 그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고자 꾸준히 노력한다. 그래서 다양한 개념의 캔버스와 무대가 탄생하기도 하고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 현상도 나타난다. 이렇듯 새로운 시도는 늘 본연의 정체성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게 대립하며 발생하는 에너지야말로 변증법적 예술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예술의 비효율을 지키는 건 거의 제로의 확률에도 주저 없이 덤벼드는 예술가의 혼이다. 예술은 미친 짓이고, 예술가는 미친 사람이라는 남들의 지탄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만도 벅찬데 남의 이목에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에 더해 늘 한계와 맞서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예술 본연의 도전 정신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특별한 보상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결국 두 가지 역설적 성격은 모두 예술 또는 예술가 내부에 존재하는 에너지원이다.
그렇다. 예술가에게 가장 힘든 건 자신과의 싸움이다. 거기서 이기도록 도울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없다. 그저 충실히 싸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또는 싸움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변 정리를 해주는 정도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누구건 그 싸움에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섣불리 자연 환경에 개입함으로써 초래하고 마는 재앙과도 같다. 앞서 거론한 예술 지원 정책 역시 이렇게 높은 수준의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결코 세워져서도 안 되고 실행돼서도 안 된다.
예술은 인간과 사회를 얘기한다. 예술은 때로 적나라한 거울이 되기도 하고 때로 신랄한 독설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주 세상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에 대한 평가로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각도를 달리 해서 가리거나 볼륨을 꺼버린다고 있던 게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권력에게 예술에 대한 검열은 마약과도 같다. 예술 환경 파괴에 그치지 않고 종국에는 권력 스스로까지 망친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건만 그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무척 어렵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불거진 예술 검열 사태 역시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단언컨대 예술 검열과 관련해서는 결벽증이 필요하다. 검열의 효과로 연결될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피해야 한다. 예술 지원 정책 또한 은연 중 예술가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예술은 사회의 건강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이다. 그것은 1급수에만 사는 산천어와 같다. 그러나 예술은 산천어와 달리 수동적인 단순 지표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술은 사회를 1급수 상태로 유지하는 물 속 수초(水草)의 역할 또한 능히 해낸다. 1급수를 망치는 건 오로지 인간이다. 오염 물질을 마구 배출하고 또 그것을 깨끗이 한다고 인공의 약품들을 쏟아 붓는다. 그 약품은 예술을 죽이고 그래서 1급수는 영영 회생의 길을 잃는다. 권력이 예술 검열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하는 이유이다.
예술은 약하다. 그러나 예술은 강하다. 외부의 개입은 예술을 쉽사리 왜곡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예술이 무너지면 세상 또한 결코 안전하지 않다. 역시 예술의 역설적 힘이다. 현명한 권력은 예술에 손대지 않는다. 역사적 교훈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는 자신이어야 한다. 그 싸움이 격렬할수록 세상은 더욱 활력에 넘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이 다른 싸움에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번 예술 검열 사태를 하루 빨리 수습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된 꿈을 꾸지 않도록 영구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015년 10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