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술 지원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하며 / 오세곤

(제65호 편집인의 글)

 

진정한 예술 지원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하며

 

문화예술위원회가 예술 지원 기조의 대폭 전환을 예고했다. 연합통신은 이와 관련한 기사에 <문화예술위 “올해 예술계 지원 패러다임 대폭 전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지원사업의 패러다임을 예술계의 자생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대폭 전환”하여 “국민과 사회의 수요와 괴리된 ‘지원을 위한 지원’에서 벗어나 예술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인데, 이를 위해 “공연예술분야의 대표적 사업인 창작산실사업을 통해 성과가 입증되고 있는 창작에서 확산까지의 단계별 지원방식을 시각예술 분야에까지 확대”하고, “한국 예술을 이끌어 갈 차세대 예술가들이 장르 간 교류와 협업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아르코창작아카데미’를 새로 추진해 예술인력 양성사업을 강화할 방침”이며, “중진 이상의 예술가들이 창작을 매개로 한 국제협업을 통해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교류 프로젝트도 추진”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의 예술 후원을 확대하고자 시작된 기업 연계 사업 역시 단순 후원을 넘어 예술계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며, “아울러 정기공모가 폐지되고, 사업의 기획방향과 특성에 맞춰 공모 시기도 조정”되고, “소수에 권한이 집중된다는 비판이 제기된 책임심의위원제, 단심제도 다원화한 예술환경의 변화에 맞춰 다단계 심의방식 체계로 개선”된다는 것이다.

문예위는 작년 예술 검열로 인해 연극계를 비롯한 예술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충분히 예술계와 소통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즉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예술 지원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옳고 그르고를 가리기는 어렵다. 자생력, 선순환 구조, 꽉 짜인 틀을 벗어난 유연한 지원, 다단계 심의 등 모두 오래 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주문했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말들이 실제 처해 있는 환경과, 또한 그 말들이 실제 현실과 만나는 디테일에 있다. 이에 있어 누군가 했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정기공모 폐지가 진정한 유연성 확립의 출발이 될 수도 있지만 독선과 무원칙을 포장하는 기만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작년 검열 사태 이후 현재까지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불행하게도 후자 쪽을 의심하게 만든다.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왜 못 믿고 의심부터 하느냐고 억울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부와 예술위가 자초한 것이다. 그것도 실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당당하게 범한 잘못이다. 아마 하루 이틀 새 통과될 소위 “테러방지법”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이나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패러다임이란 원래 선택 가능한 계열 구조를 말한다. 선택된 여러 개별 단위들 사이에 잘 맞는 통사구조가 형성될 때 그것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통상 큰 틀을 바꾼다는 말로 이해되지만 좀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새로운 단어들을 선택하여 의미 생산이 가능하도록 문법에 맞게 연결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단어건 문장이건 의미 생산이 가능하려면 그것이 현실에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 앞서 이번 발표에 대해 옳고 그르고를 따질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현실적 근거가 분명한지 살피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기공모를 폐지하고 수시로 접수를 받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선진적이다. 오래 전부터 본 편집인이 주장해 온 “찾아서 지원”, “맞춰서 지원”이라는 정책 기조와도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지원의 편파성 문제가 계속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그것을 불식하는 방법은 선정 과정의 투명한 공개일 텐데 그것은 점점 더 안개처럼 불투명해지기만 한다. 한 마디로 지원기관에 대한 믿음 없이는 유연한 지원이라는 정책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창작산실을 예로 든 다단계 지원에 대해서도 하필이면 작년에 그렇게 시끄러웠던 창작산실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저의를 의심받을 수 있다. 혹시라도 은연중 예술계 불만에 대한 반발 심리가 담겨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아울러 다단계 심의방식 또한 투명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소용이 없다. 즉 현재의 심의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단심제나 책임심의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딘가 존재하는 거대한 힘에 억눌려 나타나는 편파성과 종속성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투명성 제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현재 제도를 바꾼다고 무조건 비판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이 기회에 한층 더 자의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제도의 개악을 추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 것이다.

이제 예술지원에 대해 다시 한 번 요청한다. “찾아서 지원”, “맞춰서 지원”, 그리고 소액다건식 내지는 보편적 지원에 해당하는 “무조건 지원”을 기조로 하는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전환은 지금처럼 언제 누가 누구와 상의하며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급작스런 발표가 아니라 예술계와 대단히 길고 지루하고 복잡한 토론을 거치면서 도출되는 것이라야 한다.

부디 그럴 듯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현실적 근거를 갖는, 실질적인 내용 일치가 가능한 진정한 예술 지원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한다.

201632

오늘의 서울연극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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