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카베/ 정윤희

법이 비껴간 것들에 대하여

 

정윤희

 

 

원작 : 에우리피데스
각색 : 이기쁨
연출 : 이기쁨
단체 : 창작집단 LAS
공연일시 : 2017.3.15. ~ 3.26
공연장소 : 소극장 산울림
관극일시 : 2017.3.19. (일)

 

hekabe

 

세월호 인양 소식을 다루었던 뉴스 프로그램에서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희생양극법, 철의 부식을 막기 위해 철보다 빨리 부식하는 성질을 지닌 아연을 철 위에 덧입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희생자 유가족들은 세월호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아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세월호’라는 아주 기이한 사건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은 우리 사회에서 수십 세기 전에 쓰인 그리스 희곡의 존재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 작품은 거센 파도와 같이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인간이 얼마나 하찮아 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법의 공백, 즉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온전하게 지켜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존재해 왔음을 증명한다.

 

헤카베는 그리스 연합군 대 트로이의 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여인이다. 트로이의 왕비였던 그녀는 나라와, 남편, 수십 명의 아이들을 모두 잃었다. 법정에서 그녀는 불길한 꿈 이야기와 그 꿈에 따라 딸과 아들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순간들을 증언하였고, 법정은 그녀에게 본 사건과 관계없는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경고한다. 법정은 모든 맥락을 잘라버리고 사실관계만을 따지려 들었으며, 범행의 동기가 어떠하든 폴뤼메스토르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그의 눈을 멀게 한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불평등이 법의 가면을 쓰고 행해졌다. 자식들을 모두 잃고 짐승같이 울부짖는 헤카베의 슬픔은 고려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지만, 헤카베의 딸 폴뤽세네를 연모하다 함정에 빠져 죽은 미케네의 장군 아킬레우스의 영혼의 원한은 기어이 희생제물(폴뤽세네)을 치르게 했다.

 

헤카베는 그야말로 짐승같이 울부짖었다. 그가 법정에서 보여주는 태도와 증언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법의 외면으로 인해 그녀는 자식을 잃은 어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취한다. 헤카베는 플뤼메스토르가 아들을 죽였다는 심증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황금으로 유인했으며, 심증이 사실로 증명되자 그와 아들들을 죽이기 위해 하녀들로 하여금 그들을 이성적으로 유혹하게 한다. 앞서, 적군 아킬레우스를 죽이기 위해 폴뤽세네를 빌미로 그를 함정에 빠뜨렸었다. 재판의 휴정 동안에는 자신의 딸 카산드라를 첩으로 둔 재판관 아가멤논에게 애걸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은 헤카베를 이성을 잃은 살인자이자 법정 모독자라는 오명을 씌울 뿐이었다.

 

재판관 아가멤논은 헤카베에게 일말의 동정을 보이며, 정의를 위해서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범자들을 밝혀서 목숨만은 연명하라고 회유한다. 그러자 헤카베는 그의 입에서 나온 정의라는 단어에 흠칫 놀라며 정의가 과연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그렇게 목숨을 연명해봐야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거라고,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과도 같다며 결국 법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리라는 희망을 버린다.

 

폴뤼메스토르의 연기는 이 극에서 일종의 모호함을 삭제시켜준다. 배우는 악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연기를, 헤카베의 대사에 따라 뱀 같은 입과 혀를 지닌 인물을 연기했다. 군중과 법이 자신의 편을 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플뤠메스토르는 자신이 헤카베의 아들 폴리도로스를 죽였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그것이 폴리도로스의 반영행위 때문이었다고 증언한다. 아가멤논은 폴뤼메스토르의 살해를 헤카베의 범행의 동기로서 참작하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중과 오디세우스 장군은 그의 살해가 본 사건의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아가멤논을 몰아세운다. 판결을 두고 보지 못한 헤카베의 하녀이자 공범인 에브로피는 자신이 증언해야할 내용이 있다고 법정으로 달려왔지만, 더 이상의 증인 채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헤카베는 플뤼메스토르에 대한 처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처벌도 자신의 단검으로 직접 행했다.

 

후미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플라멩고 춤사위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존엄이 짓밟혀온 오랜 역사를 증명했다. 그리스 희곡을 현대 작품으로 각색하면서 삽입된 이 장면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극은 헤카베의 입장을 섬세하고 고려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또박또박 담담하게 흘러갔다. 이로써 법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비켜서고 있는지를 상세히 밝힌다. 법이 외면한 가련한 이들의 회한과 슬픔은 춤과 문학이 감싸주어야 한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은 일상을 희생한 채 지난 3년의 세월을 견뎌왔고, 전 대통령은 법의 처벌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을 방관한 죄목은 탄핵 인용의 주요 고려사항에서 제외되었고, 재판의 판결문에서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많은 것들이 정의보다는 대세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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