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The Move>> 2017년 7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경계선에 서 있는 연극 : “국부(國父)”
김창화 (상명대 공연영상문화예술학부 연극전공 교수)
대한민국에서 역사적 인물을 언급할 때, 언제나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에 태어나 1979년 총격으로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렇다. 극단적인 옹호를 받거나 증오스러운 과거의 인물로 기억하거나, 평가와 함께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가 지나온 한국의 근대가 그를 영웅으로, 독재자로, 친일파로 혹은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극단 ‘돌파구’가 전인철 구성, 연출로 지난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국부(國父)”는 박정희에 관한 연극이고, 그에 대한 평가가 ‘경계선’에 서 있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 일으켰던 공연이다. 박정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 편의 연극으로 그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박정희를 모르고 박정희가 지배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그에 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을 해결했고,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새마을 운동’의 주인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과거는 미스터리일 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불평등과 군국주의의 잔재를 문명과 함께 남겨 놓았고,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의 그늘에서 정신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풀려날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린 인물이며, 일본의 속박과 경제적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정치적 담합을 의도했던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과오가 그에게 남겨졌지만, 박정희를 ‘미화’하는 노력은 곳곳에서,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진행되었다. 지난 박근혜 정권에서, 박정희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날 것 같았고,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태극기 부대’는 박근혜를 보호하기 위해, 박정희의 정치적 업적을 소리 높여 ‘찬양’했다. 그래서 “국부”라는 연극을, 제목만으로 판단해서, 이제 연극인 들이 박정희 장군을 알아서 ‘국부’로 모시려는 운동을 하고 있구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리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추측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공연을 보고 난 박정희 찬양론자 가운데 한 사람의 관객은 연출자에게 좀 더 강력하게 장군님을 표현하지 못했다고 비난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 연극은 구성작가이자 연출자인 전인철의 의도와는 달리, 박정희에 관한 새로운 담론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에 관한 찬, 반 양론의 경계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 연극이 되고 말았다.
실제 공연에서 박정희에 관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그의 과거와 궁정동에서의 살해 장면이다. 심수봉과 한양대 연극영화과 여학생, 차지철, 김재규, 김재원 등의 인물들이 자리한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박정희 살해 장면은 이 연극 “국부”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김재규는 총을 쏘고, 쏘고 또 쏘았다. 박정희 역시 여러 번 죽었다. 마치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공연을 준비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정희를 제대로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살해의 순간을 ‘미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절대로 ‘박정희를 우상화’하기 위한 연극은 아니다. 오히려 박정희에 관해 얘기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식적인 기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인의 시각과 관점이 빠져버린 이벤트에 불과한 공연일 뿐이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탈북 작가 선무의 ‘청소’라는 그림으로 포스터의 이미지를 사용한 이 연극 “국부”가 만일 정말 진지한 대한민국 근, 현대사를 다루었다면, 남과 북의 분단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지금처럼 이렇게 ‘경계’에 놓여 있진 않을 것이다. 박정희라는 인물을 ‘국부’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만일 ‘경계’가 존재한다면, 그 경계가 분명 문제가 됐을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 시대, 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경계는 바로 ‘생각의 차이’일 뿐이라는 판단과 함께, 누군가는 박정희에 대한 ‘찬가’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저주와 욕설을 퍼 부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이 연극은 정말 성공한 프로파간다용 이벤트가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