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양근애

기억의 미뢰味蕾

– <가지>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줄리아 조

드라마투르기 : 손원정

연출 : 정승현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7/06/22~07/02

공연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 2017/07/01 pm. 3:00

 

 

 

상대방을 위해서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 있다. 요리가 그런 일에 속한다.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시작했지만 재료를 다듬고 양념을 만들고 적당히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맛있다는 반응을 보일 때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뜻밖의 뿌듯함이 밀려오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평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호스피스도 그러하다. 호스피스는 환자뿐만 아니라 남겨질 가족에게도, 죽음이 삶 속에 깃든 일이며 육체의 정지가 생애와의 이별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그 과정은 죽음을 생사의 경계 바깥에서 안으로 끌어와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일방적인 도움이 아닌 ‘돌봄’이란 이처럼 교감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드나듦임을, 그와 같은 일들이 보여준다.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의 세 번째 공연으로 올라간 <가지>는 타인을 위한 일이 결국 나와 상대를 함께 보듬는 일이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이 연극에는 자신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여럿 등장한다. 남편과 함께 최고의 맛을 찾아 미식 여행을 다녔지만 암에 걸린 아버지가 만든 파스트라미 샌드위치가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고백하는 다이앤, 고향에서 나는 가지(aubergine)로 만든 스프를 그리워하는 루시앙, 냉장고가 네 대나 있는 집에서 음식의 과잉에 시달렸던 유년 시절에 아빠와 함께 마당에서 따먹었던 오디-그 오디를 기억하게 해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코넬리어, 형이 이민을 떠나기 전날 기어이 형의 눈에서 눈물을 후두둑 떨구게 했던 어머니의 소고기뭇국. 미각은 음식을 먹는 개별적인 경험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내가 느낀 그 맛을 타인과 나누고 싶을 때, 함께 먹는 일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밖에 없다. 유일한 각자의 입으로 먹고, 다시 그 입을 통해 말을 함으로써 맛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그래서 어쩌면 불완전하지만 갸륵한 소통의 과정인 것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연극의 프롤로그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연극 무대에서 맛을 재현하는 일은 어렵지만 상상을 통해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쪽보다 더 자극적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감으로 받아들인 지각에 상상력이 작용하는 과정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기억과 상상력은 영혼 속의 같은 부분에 속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이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관객들은 아직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그 맛에 대해 상상하며 한편으로는 저마다 지니고 있는 추억의 음식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고(思考)는 그 다음, 그러니까 상상력의 작용 혹은 상상력에 동화된 감각 위에 작용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상상과 기억의 교호작용은 작가 줄리아 조가 영어로 쓴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되는 상황, 즉 번역된 언어의 작동에도 관여한다. 박춘근은 이 대본을 번역하면서 원작에서 영어 사용자들이 유창한 영어를 유창한 한국어로 발화하는 것과 어눌한 한국어로 한국어를 발화하는 대사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 그래서 인물들이 사용하는 무대 언어는 한국어이되, 영어에서 한국어로의 이동 혹은 반대 경우의 첫 머리에만 해당 언어를 쓰도록 하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되고 있다. 문자로 쓰인 대본에서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이중 언어 사용의 묘미가 배우들의 발화를 통해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가령,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와서 미국에 정착했지만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레이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옛 애인 코넬리어에게 한국에 사는 삼촌과의 통화를 부탁한다. 이때 레이와 코넬리어의 대화는 영어라고 상상/설정된 한국어이지만, 코넬리어가 레이의 삼촌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 때에는 어눌한 한국어의 흉내 내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미국까지 달려온 삼촌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자라탕을 요리하라고 할 때, 한국어를 모르는 레이와 영어를 모르는 삼촌 사이를 통역하는 코넬리어의 연기 역시 이러한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이때 관객들은 그들의 언어 사용을 이해하면서 또한 그 어긋남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일종의 사고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가지를 뜻하는 두 낱말, ‘eggplant’와 ‘aubergine’의 차이와도 같이,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이면서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리를 승인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연극은 다이앤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이야기를 프롤로그-에필로그의 ‘프레임’(작가가 다이앤의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으로 두고 간경화로 죽어가는 레이의 아버지와 그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레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 살 무렵 한국에 방문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숨겨온 아버지, 아들의 요리에 대해 감탄하기는커녕 요리사라는 직업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 이민자로서 힘들게 살아온 내력을 한 번도 솔직하게 보여주지 못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레이의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지만 이 연극은 그 소통의 빈자리를 훌쩍 뛰어넘는 삶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죽음, 그 죽음을 본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함께 먹는 불가능한 식사, 이미 세상에 없는 나의 아버지가 내 속에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일의 연쇄이다. 작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쓴다.

 

죽음은, 한 끼 식사

죽음은, 거울

죽음은, 제 자신입니다.

두 남자는 서로 바라봐요.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습니다.

 

<가지>는 삶과 죽음 사이에 길고 오래된 한 끼의 식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보여주는 연극이다. 입에서 죽고 다시 입을 통해 살아나는 음식, 여러 번 다시 살기 위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을 수밖에 없는 기억에 대한 연극이다. 늦어버렸지만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는, 단 한 번의 맛, 유일한 경험에 관한 연극이다.

 

레이는 이 연극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영혼을 채운 음식에 대해 고백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요리가 직업이 된 그에게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맛이 있는 것일까. 장례식 후,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살펴 준 루시앙에게 가지 스프를 내미는 장면에서 레이는 거의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 요리사에서 요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훌륭한 요리를 펼쳐놓지 않아도 자기 존재가 증명되는, 단 한명을 위한 음식을 만들면서 그의 마음에 물결이 일기를 기대하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유일한 음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 루시앙의 가지 스프와 코넬리어의 오디와 다이앤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는 레이에 의해 두 번째로 다시 탄생한다. 그는 그것을 가능케 한 사람이자 유일함이 재생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때 그 음식을 먹고 그 시간으로 돌아가 아이처럼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는 기분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라는 미뢰가 자극될 때 삶의 풍미가 더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며 먼 그들과도 여전히 여기서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날들이 우리에겐 많이 남아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