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최승연

동정이 아닌 공감이 필요하다

– 뮤지컬 <시라노> –

 

최승연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조교수, 뮤지컬 평론가)

 

원작: 에드몽 로스탕

작·작사: 레슬리 브리커스

작곡: 프랭크 와일드혼

연출·안무: 구스타보 자작

음악감독: 변희석

제작: ㈜RG, CJ E&M

공연일시: 2017/07/07-2017/10/08

공연장소: LG아트센터

관극일시: 2017/07/18 8pm

 

 

현재 뮤지컬 시장에서 <시라노>는 화제성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다. 류정한의 프로듀서 데뷔작, 프랭크 와일드혼과 레슬리 브리커스의 작품, 홍광호(그리고 류정한, 김동완)의 출연이라는 세팅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위의 세팅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뮤지컬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도 전인 1997년에 데뷔하여 대표적인 한국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은 류정한의 ‘프로듀서’로의 변신은(류정한은 이번 공연을 위해 ㈜RG라는 제작사를 설립했다) 일회성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프로듀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게 될 것인가? 프랭크 와일드혼과 레슬리 브리커스는 국내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전작 <지킬 앤 하이드>처럼, <시라노> 역시 성공시킬 것인가? 홍광호는 웨스트 앤드에서 돌아온 이후 <시라노>에서 드디어 몸에 맞는 옷을 입게 될 것인가? 홍광호에게 <시라노>는 배우가 살리는 작품이 아니라 배우와 작품이 서로 상생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 마지막 질문은 트리플로 캐스팅된 류정한과 김동완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화제성과 공연의 성과는 얼마나 상호 조응하고 있는가?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

뮤지컬 <시라노>의 원작은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탕이 쓴 동명의 희곡이다. 1897년 초연된 이후 작품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며 고전으로 존재하고 있다. 군인이자 문인, 자유사상가였던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619~1655)를 재발견하여 그를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의 전형’으로 만든 것이 이러한 생명력의 원천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원작을 ‘중세적 로망스’ 양식으로 이해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죽음 앞에 선 시라노가 오로지 ‘기사의 기개’만 갖고 갈 것(죽을 것)이라 선언하는 마지막 장면은 시라노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였음을, 기사로서의 정체성이 그의 모든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추한 외모 때문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록산을 애태우며 연모하고, 심지어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크리스티앙의 그림자가 되어 완성시키려는 시라노의 극단적인 낭만성은 로망스라는 기사문학적 전통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만 작품의 논리적 균열들, 가령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만 보이는 록산이 왜 지고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칭송받는지, 크리스티앙과 시라노의 허술한 역할극이 왜 극적으로 허용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원작의 이러한 특성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잘 들어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단적으로 말해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통할 법한 뮤지컬 양식에 특히 잘 어울린다. 기사의 무용담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맨 오브 라만차>에서, 자기희생을 통해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는 낭만적 연애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이미 뮤지컬화 되었고 국내에서의 높은 흥행력 역시 증명된 바 있다. <시라노>는 이 둘을 겹쳐놓은 듯 익숙하고 낯익다. 게다가 고전의 각색, 자기희생의 연애라는 코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드라마틱한 선율로 풀어 놓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뮤지컬 마니아를 움직일 수 있는 조건마저 형성한다. 한국 뮤지컬 시장의 취향을 저격하여 흥행에 대한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인위의 겹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뮤지컬 <시라노>는 작품의 로망스적 전통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론을 내지 못한 듯하다. 원작의 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이 패착이랄까. 작품의 핵심 드라마는 시라노-록산-크리스티앙 사이의 기묘한 삼각관계인데, 만약 이들의 관계가 시작되고 발전되는 모든 과정을 ‘논리적 개연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들여다본다면 작품은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록산은 왜 크리스티앙의 안위를 시라노에게 끝없이 부탁할까? 이들의 관계가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내밀했던 걸까 아니면 록산은 그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시라노에게 의존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록산은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인가. 크리스티앙은 왜 이토록 그저 바보 같기만 할까(크리스티앙의 1막 솔로 넘버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식한 입술’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크리스티앙의 이렇다 할 솔로 넘버는 이 외에 없다).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시라노의 ‘말’이라는 사실을 결국 깨달았을 때 크리스티앙은 왜 바로 허무하게 죽어야 했던 것인가. 드디어 록산이 자신의 사랑이 누구인지,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사랑해왔는지 인식하게 되었을 때 시라노는 왜 기사의 기개를 외치며 죽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공연이 해결해 놓은 범위 내에서 답을 찾는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록산에게 시라노는 필요할 때마다 호출되는 그녀의 ‘멋진 기사’였기 때문에 애초에 그 둘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을 것이다. 1막과 2막 초반부까지의 록산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기 원하는 철부지로 과장되어야 했다. 2막 중반 이후부터의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려면. 크리스티앙은 록산과 시라노의 관계 심화에 극적인 모멘트를 제공하는 도구적 인물로 ‘기능’한다. 그는 기사 시라노의 완벽한 재능과 성정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크리스티앙의 솔로 넘버가 극히 적다는 점은 작품이 인물의 내면 묘사에 별로 관심이 없음을 반증한다.

다소 길게 <시라노>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이러한 분석은 불필요할 수 있다. 전술했듯 애초부터 <시라노>는 드라마의 논리적 개연성을 주요 포인트로 삼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이러한 프레임을 들이대는 이유는 공연이 드라마의 인위성을 ‘가장과 환상’(make-believe)의 힘으로 눈멀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시라노>에는 작품에 원천적으로 주어진 ‘시적 정취’를 최대한 발휘시켜 시라노라는 인물의 매력을 끌어올리고 문학적 상상력으로 드라마상의 균열을 돌파하는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현재의 공연에서 이러한 시도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라노에게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솔로 넘버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방대한 양의 원작 운문 대사들을 가사로 전환하여 드라마틱한 선율이 돋보이는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마이너 음계에 배치한 것은 분명 작품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그중 ‘Bring Me Giants’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작품을 기억하게 하는 대표 넘버로 손색이 없다.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서숙진의 속이 훤히 보이는 주요 공간의 철골 구조물 세트 역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를 제공한다. 그런데 어딘가 모자라다. 공연은 균열을 드러내고 사랑에 허우적대는 시라노만 남는다. 무엇 때문일까.

 

 

동정이 아닌 공감이 필요하다

문제는 시라노에게 공감의 포인트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 뮤지컬의 흑역사로 남은, 비슷한 드라마 구조를 갖고 있는 <두 도시 이야기>는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인생의 패배자로 살았던 시드니 칼튼이 루시 마네뜨의 행복을 위해 대신 희생하는 과정 전체는 시드니와 (친절한) 루시의 접속 당시 찰나적으로 튀어 오른 스파크의 힘으로 개연성을 얻는다. 시드니는 변호사답지 않았던 과거의 전력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기로 활용하는 한편 루시를 향한 순정을 키워나가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품의 끝에서 루시의 행복을 위해,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린 루시의 남편 찰스 다네이 대신 희생하는 순정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의 ‘거친 순정남’의 면모는 폭넓은 공감을 샀던 주된 원인이었다.

시라노는 어떨까? 처음부터 시라노는 록산을 그저 완벽한 숙녀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이상’에 정향되어 있다. 때문에 그의 사랑은 추상적이다. 자신의 코가 비정상적으로 큰 추남이라는 설정은 ‘결핍된 것을 향한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록산과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실제 무대에서 시라노는 인공적으로 코만 컸을 뿐 추남도 아니고 큰 코를 결정적인 콤플렉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그는 완벽한 영혼을 가진 기사이며 그러한 정체성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을 숭고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논리 위에 서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공허해 보이는 것은 뮤지컬에서 기사로서의 시라노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시라노를 “군인, 시인, 난폭한 천재, 용맹하고 비범한 전사, 신비한 멋진 능력자, 전설의 사나이”(작품의 첫 프로덕션 넘버 ‘Let the Play Begin’의 가사) 등의 과장된 수사로 소개했으나 이는 소개에 그친 감이 크다. 작품에 환상을 켜켜이 쌓아놓을 만큼 기사-시라노의 매력이 실제로 발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에 반하는 사람들을 쉽게 적으로 돌려버린다든지, 크리스티앙과 록산의 결혼식 도중 드 기슈를 따돌리기 위해 넘버 ‘I Fell From the Moon’이 활용되는 방식은 원작의 시적 무게감이 휘발되어 버린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특히 ‘I Fell From the Moon’이 시라노의 솔로에서 시라노를 포함한 가스콘 병사들의 몹신으로 바뀐 한국 버전은(이번 공연은 논 레플리카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넘버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익살스러움을 극대화하여 드 기슈의 ‘혼을 빼놓는다.’ 기사-시라노의 점층적인 운문 대사가 뜬금없는 상황을 나름의 논리로 정리하던 원작과는 매우 다른 질감이다.

그래서였을까? 사랑에 허우적대는 시라노에게 동정은 가능할지 모르나 공감은 어려워 보였다. 국내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객(특히 마니아)의 공감을 샀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공감이란 한 집단을 전제로 하는 어떤 공통된 정서를 가리킨다. 18세기 서구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했던 공감은 원래 신경을 흐르는 전기를 통해 전해지는 신체감각을 가리켰다. ‘집단의 구성원을 꿰뚫는 전기적인 힘’이 공감의 개념적 근간이었던 것이다. 한번 공감을 얻은 뮤지컬이 반복 공연을 통해 스테디셀러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극장의 객석을 흐르는 이 전기적인 힘의 파급력 때문이다. 동정이 냉정한 감정의 온도로도 유지될 수 있다면 공감은 따뜻하고 때로는 뜨겁게 발전될 수 있는 감정이다. 작품이 인물의 통해 관객의 내면과 만나게 되면 특히 국내 시장에서는 공감의 메커니즘이 뜨겁게 작동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라노>는 원전의 로망스적 요소와 뮤지컬로서 공감을 살 수 있는 요소들이 애매하게 섞여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라노의 수많은 넘버로 그의 내면이 직접 토로되는 방식은 기사문학의 인위적인 틀과 맞지 않으며, 작품의 시적인 정취가 작품 전체에서 양식적인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는 애매함이 안타깝다. 원작의 공식을 따르기보다 ‘욕망과 결핍’을 화두로 작품을 재해석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시라노>의 인물들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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