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키는 용기
소리가 어울리는 그리스비극
<트로이의 여인들>
윤진현
원작 : 에우리피데스
대본 : 배삼식
연출 : 옹켕센
작창 : 안숙선
작곡·음악감독 : 정재일
단체 : 국립창극단
공연일시 : 2017/11/22~2017/12/03 pm8:00
공연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극일시 2017/11/29 pm8:00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재공연되고 있다. 작년 초연되었을 때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고 어떤 극찬도 과하지 않았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대단하다. 그간 국립창극단에서 여러 창작 창극을 보여주었지만 우리 소리와 어울려 새로운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트로이의 여인들>을 첫손에 꼽는다고 해도 큰 이견을 없을 것 같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창극으로 창작한 것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판소리에 대한 이해, 국립창극단의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우수한 기획 사례라 하겠다.
그리스 비극, 특히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중에서도 <트로이의 여인들>은 비극적이지만 비극의 기본형식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적인 감수성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 최종적으로 트로이가 패배하고 허다한 트로이의 영웅은 모두 사망한 후, 그리스로 끌려가 여러 도시 국가의 노예가 될 운명을 앞둔 트로이 여인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요컨대 그녀들에게서는 사건적인 의미의 저항이나 리액션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보여주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섬세한 결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사회의 질곡에 처한 현대인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본래 1인창이었던 판소리 또한 그러하다. 판소리의 특장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관찰자가 보여주는 세부적이고 역동적인 묘사의 힘이며 다른 하나는 인물이 겪는 곡진한 심리변화의 깊이이다. 전자가 전통적이고 원형적인 극적인 에너지를 담보한다면 후자는 근대적 인간의 발견을 내포하고 있던 인간 내면의 성찰을 의미한다. 좋은 공연에서 두 가지를 경중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판소리가 창극으로 재편될 때 전자는 인물의 분화와 무대장치 등 극적 형식의 강화로 비교적 용이하게 표현해낼 수 있지만 후자는 오로지 배우의 기량으로 도달할 수 있으니 소리가 미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멋진 무대를 갖춘다한들 짚신에 정분 바르는 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원톱인 헤큐바 역의 김금미의 대단한 파워는 말할 것도 없고 고혼으로 등장한 유태평양과 헬레네 역의 김준수 외에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코러스까지 가창력에서는 원숙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여러 매체에서 이미 주목했지만 헬레네를 남자 소리꾼 김준수가 맡은 것도 득의의 해석이다. 연출의 의도대로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특정 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중성적인 지대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또한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메넬라오스를 설득하여 살아서 트로이를 떠나는 헬레네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극적이며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트로이의 여인들과 다르고 그런 점에서 차라리 남성적이기에 이에 근거해도 확실히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다. 한편으로는 그리스인들의 아름다움이란 균형잡힌 남성적 아름다움에 기초하고 있었으니 김준수를 통해서 문득 헬레네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지금 느끼는 미녀에 준하는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공감도 가능하였다. 젊은 소리꾼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깊이를 공인 받고 있으니 김준수의 역량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헬레네란 쉽지 않은 배역을 자연스럽고 극적인 방식으로 소화해낸 연기력은 특별히 칭찬받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간과하기 쉽지만 이 작품에서 특별히 좋았던 것은 코러스의 소리와 연기이다. 창극의 소리에서 언제나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 것은 코러스이다. 얼마간 다양한 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데다 우리 소리는 앞서 언급했듯 기본적으로 1인창으로 시작했기에 합창에는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적정한 숫자의 코러스가 역할을 나누고 소리 또한 분할과 결합을 아우르면서 그 분위기와 의미를 동시에 제대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니 작품 전체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생각해 보면 창극의 ‘작창’영역이란 판소리 다섯 마당을 구성하고 있는 소리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쪼개서 응용할 수 있는가이다. 춘향가의 어느 부분, 심청가의 어느 부분에서 따온 소리로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와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쉬운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다 뒤져도 ‘헤큐바’의 분노와 좌절을 보여주는 감정은 없다. 한 나라의 왕비였던 고귀한 헤큐바가 자식도 손자도 모두 잃고 노예로 떨어진다. 생각해보면 이런 정도의 신분과 사회를 반영하는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판소리의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제 우리 소리가 가야할 곳은 신분과 지위 고하를 가릴 필요도 없고 가려서도 안 되는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의 음악은 이 전형적인 음악을 어떻게 다른 감정과 상황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것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음악은 전통적으로 소리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소극적 위치에서 머물지 않았다. 정재일의 음악은 소리와 대결하고 병진하고 보완하면서 자유자재로 종횡하였다. 나직하니 조심스럽게 다정했던 북소리와 가슴 미어지는 피리소리와 폭풍우처럼 몰아치며 헤큐바와 대결했던 격정적 울림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특별하고 이질적인 배역인 헬레네의 대사를 감싼 것은 섬세한 피아노였으니 피아노가 그토록 요염하고 청순할 줄이야.
요컨대 기획에서 공연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좋은 작품이다.
트로이를 기억하는 용기
에우리피데스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라고 알려져 있다. 트로이를 이긴 그리스함대에서 협력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적이 되어 싸웠고 최종적으로 스파르타가 승리함으로써 아테네뿐만 아니라 스파르타까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우리피데스가 그리스의 승리가 아니라 ‘트로이’의 기억을 소환한 이유는 분명했다.
창극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이 작품의 서사에는 포세이돈과 아테네가 등장하여 신전을 침범하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그리스 군사의 불경을 징계하기 위해 그리스군의 뱃길을 막고 이들의 귀향을 불허한다는 신들의 의지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쟁에 진정한 승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그리고 전쟁으로 가장 비참해지는 것은 여자와 아이들이다. 막이 오를 때, 왕비 헤큐바는 이미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나라가 멸망한 다음이었다. 이미 충분히 비참한 상태였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딸 하나는 제물로 잃고 또 다른 딸과 며느리는 적장의 노리개로 잃으며 젖먹이 손자마저 시체로 돌아오며 자신은 고귀한 왕비에서 천한 노예로 떨어진다. 그녀가 이국땅에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 세상은 매일매일 아주 낯설고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일 것이니 이는 매일매일 새로운 불행과 마주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쟁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바로 이점을 웅변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배삼식 대본으로 새로 태어난 <트로이의 여인들>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사변적이고 장황한 원작을 간결하게 축약하여 우리 소리에 최적화된 서정시적 함축미를 지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인의 시선이 아니라 한국인의 시선으로, 한국의 운명을 얹어 트로이를 바라본다. 원작에 없는 자책과 원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책과 원망은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심지어 얼마간 불편하기까지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헤큐바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전쟁이 난 것은 더욱이 헤큐바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황조차도 팔자에 비추어 자책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한국인이 주어진 숙명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는 방법이었다. 안드로마케는 ‘나라를 망칠 자’라는 신탁을 타고난 ‘파리스 왕자’를 어려서 죽이지 않고 키운 것이 트로이를 망친 이유이니 그 잘못은 ‘헤큐바’에게 있다고 비난한다.
또한 노예로 끌려갈 트로이의 여인들 중, 몇몇 여자노예들은 트로이에서도 노예였기에 아테네로 다시 노예로 끌려간다고 한들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조소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소위 ‘헬조선’으로 불리는 한국의 신카스트가 역연하지 않은가.
너는 자랄 일도 없겠고
사랑을 알 일도 없겠고
병들거나 늙을 일도 아주 없겠고
실패하여 쓰러질 일도 내겐 없으리
허나 가끔은 어쩌다 그러하듯이
너도 행복할 수 있었으련만
고사리 같은 이 작은 손으로
쥐었다 놓았을 수많은 길이
이제는 영영 닫히었구나
여기서 너는 멈추었구나
아스튀아낙스의 주검을 앞에 둔 헤큐바의 절규는 바로 지금, 우리 한국인의 상황이 아닌가. 여전히 어린아이와 젊은이를 사지를 내모는 전쟁 같은 우리의 일상의 재현이 아닌가. 아스튀아낙스의 죽음으로 일리온의 프리아모스 왕가는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종료되었다.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앞질러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던가. 그렇다면 헤큐바와 같은 절망을 공유하는 우리는 어떻게 이 완결된 절망, 극단의 비통함을 이겨낼 것인가. 원작의 엑소더스로는 답이 되지 못한다.
“버티어 서라!
저들이 우리를 질질 끌고 가도록!
우리는 누구도, 아무도, 제 발로 걸어
트로이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아, 헤큐바는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 만약 헤큐바가 짐짓 의연한 체 고상히 아카이아의 함대로 걸어갔다면 오로지 절망만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운명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까지 굴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지이고 인간의 삶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우리를 마음대로 굴려간다고 해도 우리는 그 크고 높은 것의 뜻대로 쉬 데굴데굴 구르지는 않을 것이다.
혼신을 불태우는 헤큐바의 열창에 삶을 지키는 용기란 싫은 것을 싫다, 아닌 것을 아니다 외치는 힘임을,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뜻을 소리쳐 온누리에 새기는 것임을, 그리하여 끝내 기억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한다.
사진제공: 국립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