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엘리트주의>에 목을 매는가?
우 상전(연극배우)
솔직히 연극판에서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나 혼자서 지껄이고 다니는 주장(용어)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조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따라서 내가 말하는 ‘엘리트주의’의 정체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부분 오해가 생길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 많은 연극인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연극협회 신임 박명성회장이 전임 때 임명한 서울연극제의 집행위원들을 사전 통보도 없이 해임시켜 한국연극지에 사과 성명을 낸 적이 있는 그 해의 일이다. 나도 그 해에 서울연극제의 집행위원이었다.
그 첫 모임에서 나는 이런 주장을 했었다. “미술전에도 초대작가가 있다. 우리도 요즘 관심을 끄는 젊은 연극인들을 초대해 ‘초대 4인 전’을 열어 연극제에 참가시키면 좋겠다. 그리고 ‘짬뽕,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김한길’의 공연 등 비교적 흥행이 잘되고 있는 젊은 신인 급의 네 명을 거명했었다. 그런데 묵살당하고 결국 원로 평론가이신 ‘여석기의 특별전’으로 낙착되었다가 결국 모든 게 무산되어 버렸다.
이때 나는 우리의 ‘엘리트주의’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심사와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를 통해 연극이 관객과 호흡을 함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말하는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5무시, 3중시라고 할 수 있다.
5무시란?
- 관객과의 소통무시
- 주제(메시지)무시
- 재미(감동)무시
- 개성무시
- 흥행무시
3중시란?
- 난해성중시
- 학력(가방끈)중시
- 심사와 평가중시
아들과의 대화
두 달 전쯤이다. 우연히 불문학을 전공하고 조그마한 프랑스주방기구회사에 다니는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빠, 난 학교 다니면서 ‘부조리극’ 강의가 제일 재미있었어.”
“그래?” 순간 많이 놀랐다.
“교수님이 ‘베케트 강독’을 하시면 전율이 일어. 너무 재미있었어.”
“그럼 넌 부조리극 희곡도 많이 읽어봤겠구나!”
“아니, 혼자서는 못 읽겠더라구,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강의시간에 교수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읽으면 재미있는데 나 혼자서는 벅차더라구”
나야말로 아들의 이 말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불문학을 전공하고 내리 장학금을 받으면서 나름 수석으로 졸업한 아들이 ‘난해해서’ 읽기 힘들다는 ‘부조리극’을 나는 평생 동안 하고 있었다니, 내가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렀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프랑스에서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을 다룬 논문만 해도 무려 150여 편에 이른다고 하더라구”
아! 알았다. 우리의 연극 엘리트(특히 평론가)들이 얼마나 이런 ‘시늉(?)’을 하고 싶었을까? 이제야 많은 연극 이론가들이 특정 극작가 연구에 그토록 몰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랑스 애들도 하는데 우리도 해보자!” 한국의 연극 엘리트들이 이토록 ‘부조리성’ 희곡에 매달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임영웅선생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40여 년 동안 지속해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불문학교수이신 사모님 덕 이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전공자도 아니고 교수의 해설도 없이 객석에서 그런 작품들을 구경한 수많은 관객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관객들이 이런 작품들을 이해하고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엘리트주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우리 연극인들은) 한국 관객들이 ‘부조리극’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기대(?)를 갖고 끊임없이 이런 종류의 현대적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우리 연극인들의 무모함의 배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과의 또 다른 대화
내가 국립극장의 단원으로 있으면서 가장 많이 공연한 작품이 오태석의 ‘태’다. 공연 때마다 극단 기획팀이 ‘한국 최고의 명작’, 또는 ‘국립극장 50년 역사의 기념비적 공연’이라고 홍보를 하니 내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호기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대학에 갓 입학한 내 아들도 ‘태’를 보고 싶다고 해서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아들과 장충동으로 내려와 ‘족발’로 한잔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들이 먼저 입을 떼었다.
“아빠, 난 전혀 이해를 못하겠더라구”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서 그냥 “그랬어!”하고 답하면 될 일을 그래도 내가 하고 있는 공연인데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럼, 아직 니 수준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 이렇게 대꾸를 해버렸다.
그랬더니 이놈이 불경하게도 “아빠는 무대에서 객석이 보이지도 않아! 거의 대부분이 다 졸던데” 하면서 대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놈의 속셈은 ‘왜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공연을 국립극단이 하느냐’ 또 이런 공연을 대표작이라고 떠드는 국립극단이 한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도 평론가 김미도가 쓴 <한국연극>에 실린 ‘연극평 해설(?)’을 읽고 ‘태’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처지였다. – 이런 걸 흔히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말한다. – 이런 글을 읽으면 “차라리 공연을 하기 전에 써주면 내용이나 알고 무대에 나서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 자신도 내용을 모르고 무대에 서는데, 그럼 누가 알겠는가! 아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낮 공연을 마치고 극장의 등나무 밑에서 담소를 즐기는 관객들을 관찰해보면 공연 내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출연자 수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너, 커튼콜 때 출연자가 총 몇 명인지 세 봤어?” “그래 56명” “아니야 48명이야” 그 얘기를 듣고 다음날 나도 한번 세 보았다. 크지 않은 중극장에 자그마치 출연자만 52명이 나와 인사를 하니 객석에서 외마디 소리를 낼 수밖에… 관객들이 거기에 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의 공연을 보고 쓴 글을 ‘공연평’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오태석연극은 첫날과 끝 날이 다르다. 초연과 재공연도 다르다. 하루도 내용이 일치하는 공연을 하지 않는다. 수시로 바꾼다. 그래서 바꾼 장면은 연습이 안 돼 엉성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평론가들은 ‘공연평’을 쓸 수 없다. 써 봤자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중에 대본을 보고 ‘연극평’을 쓸 뿐이다. 그의 연극은 항상 공연의 원칙을 초월한다. 왜? 그럴까. 이게 ‘부조리극의 정수’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천년의 수인(囚人)>의 체험
오태석의 <천년의 수인>은 원래 국립극단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작, 연출인 오태석선생과 2주쯤 연습을 하다가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의 스토리를 공연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경직된 문광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공연이 취소되어, 그 후 동숭아트센터 제작으로 그곳에서 막을 올리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많은 질문을 작가이자 연출자에게 던졌다. 그러면서 오태석 작가의 ‘생략과 압축’, ‘이미지’의 극작법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작가 오태석은 상대방의 의견이나 이의를 묵살하지 않고 경청하시는 여유로운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할 때는 나에게 완성 대본을 주면서 의견을 달라는 분부를 하기도 했었다.
지나친 생략과 압축된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너무 전달되지 않는 점을 들어 이런 것들은 이렇게 수정을 했으면 좋겠다는 등의 관객과의 소통에 많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흔쾌히 내 의견에 공감을 표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작가 오태석의 열림과 너그러움에 감격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연 다음에 발생했다. <천년의 수인>을 본 많은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작품이 너무 쉬워져 ‘오태석다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태석 특유의 ‘맛과 멋’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접근이 쉬워져 연극을 보는 재미가 없어졌다고 되레 불평을 해대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오태석을 난해한 작가로, 관객과 소통을 가로막는 압축과 생략,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이미지를 그리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엄청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일로 주변의 ‘엘리트주의자’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 의해서 작가 오태석은 소통을 하지 못하는 연극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말했던 유럽인들의 흉내를 내고자 하는 많은 이론가나 학자풍의 평론가들이 그에게 소통을 막는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분이 일본의 전위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난해한 작가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부추김이 더 크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부조리극’이나 일본의 전위극은 이미 오래 전에 생명을 다 했는데도 – 교포작가 정의신도 이미 오래전에 전향(?)을 했는데- 오태석은 여전히 난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평론가와 일부 이론가들의 ‘자기만족’이 만들어놓은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그들이 다른 요구를 했거나 불통을 반대했었더라면 작가 오태석이 이런 난해성과 소통불능으로 작품을 쓰고 공연활동을 지속하지는 안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물론 오태석의 난해한 작품들이 미래에 나의 우려와 달리 셰익스피어를 능가하는 작가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조리극’처럼 난해한 작품들이 한번 지나치는 광풍처럼 지나가 버린 이 시점에서, 여전히 셰익스피어가 세계 연극계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과연 관객과의 소통을 뒤로 하는 작품이 역사적으로 살아남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학자들을 즐겁게 할지는 몰라도…
영문학자들은 셰익스피어연극들이 긴 세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줄기차게 당대의 관객들과 소통을 위해 노력한 결과임을 언급하고 있다. 관객과의 소통은 시대를 초월하여, 비록 아방가르드운동에 잠시 밀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게 해주는 중요한 동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의 또 다른 체험담
내가 ‘부조리극’과의 첫 만남은 대학 2학년 때(1970년) 극단 가교의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였다. 그때 나는 조연출로 ‘부조리극’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와 ‘부조리극’의 인연은 자그마치 40여년이 넘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부조리극’이 한국연극에 미친 영향을 누구보다도 깊숙이 실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조리극’이 한국연극을 장악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여러 특징들도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연습장에서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이 ‘부조리극’ 이후에 생략되어 버린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작품분석에서 인물분석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토론하고 분석을 했었다. 그런데 ‘부조리극’이 한국연극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이런 풍토가 연습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게 사실이다.
또 하나는 연기술의 발전을 현저하게 저해시킨 것이다. 세계의 연기교육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여전히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기에서 리얼리티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초보단계에서는 리얼한 연기를 통해 훈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워크숍 공연을 통해서 저학년에서도 서슴없이 ‘부조리극’ 공연으로 연극을 시작하니 연기교육과 훈련도 이를 따르게 되어 많은 우리 배우들의 연기에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출연배우들마저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지껄여도 그만이라는 풍토가 조성되어버렸다. 어차피 토론과 분석도 불가능하고 또 해봤자 소득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히 ‘부조리’한 연습과 교육과정이 정착된 셈이다. 고작 하는 거라곤 그저 외국의 해설서를 연출자가 읽어주는 정도다.
따라서 배우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무대에 나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게 부조리극이다. 연기에서도 이미 ‘리얼리티’를 상실해 버렸다. 관객들도 어차피 모를 건데 하는 배짱(?)이 배우들에게 생긴 것이다.
그보다 더 커다란 문제는 관객들이 작품의 내용을 알면 ‘부조리’하게 여기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난해할수록 좋은 희곡이요, 공연이라고 여기는 풍토가 이 땅에 조성되어버린 것이다.
8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당시 전위를 표방하던 모 연극인이 차린 조그마한 을지로에 있던 소극장 공연에서의 일이다. 모든 출연자가 하얀 붕대로 전신을 다 감은 채 눈만 살짝 내놓고 연기를 했는데, 붕대로 입을 가려서 전혀 말소리(대사)가 들리지 않았다. 배우들이 웅얼거리게 되니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혀 극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허규 당시 국립극장장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칭찬을 하시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입을 가리면 대사를 하지 않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하더라도 말이 아닌 ‘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들리지도 않는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황당하다”
그리고 나는 금방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관객들이 나에게 새로운 장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이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립극장장인 허규선생도 좋다는데 감히 ‘쪼무래기’ 정도가 하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새로운 창극을 개척하신 분으로 알려진 허규선생도 그 시절에는 ‘부조리극’의 왕팬(?)이셨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연극은 ‘부조리극’이 아니면 행세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발언을 하면 무식한 연극인으로 매도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극의 내용을 몰라도 절대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던 시절이었다. 이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왕따’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해랑선생처럼 유치진의 ‘식민지 시대의 사실주의’를 계승하신 분들이 “오태석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태석은 물론이고 이강백, 윤대성, 윤조병에 이르기까지 ‘부조리극’을 쓰지 않은 작가가 없을 정도로 내용이 불명확한 ‘부조리극’은 한때 한국연극의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런 후유증은 결국 뮤지컬이 성황을 이루어 숨마저 죽여야 하는 오늘의 연극 현실을 만들어낸 게 사실이다.
평양에서 만난 여배우 ‘문예봉’
남북교류가 왕성하던 시절 평양을 방문한 우리 연극인들이 만찬 테이블에서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스타였던 월북한 여배우 문예봉을 만났다고 한다. 그가 이해랑선생의 안부를 묻더란다. 그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일본 유학 좀 갔다 왔다고 우리를 그토록 무시하시더니 돌아 가셨군요.”하더란다. 왕년에 장안 최고의 인기여배우도 명문가의 일본 유학생출신에게는 맥을 못 추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의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어째서 한국연극인들이 ‘부조리극’에 그토록 광분했는가도 알 수 있다. 그토록 오랜 동안 ‘부조리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한국연극에 ‘5무시’가 생겨날 수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연극이 ‘부조리극’에 그토록 열광했던 배경에는 일본유학파들에 의해 조성된 신극사가 존재한다.
한마디로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 이끌려 왔던 한국연극이 세대교체에 의해 영어와 불어 독어권의 서양 엘리트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식민지문화에 대한 신세대의 서양문화권의 도전이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적 리얼리즘’에 대한 반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부조리극’에 한국연극이 이토록 광분을 했던 것은 바로 ‘식민지 리얼리즘’에 대한 신세대 유학생들에 의한 ‘엘리트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단순한 구성과 기승전결에 의한 멜로드라마성 드라마전개, 권선징악의 결말, TV드라마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비 엘리트적 오락성 드라마에 대항해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 시절에는 새롭게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를 한 유학파들이 일본에서 공부한 ‘식민지 리얼리즘’의 후예들의 연극에 답답함과 실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새로운 역할을 찾은 것이며, 자신들이 주도권을 내세우고 싶은 욕망이 강하던 차에 여기에 안성맞춤인 ‘부조리극’을 선택한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에 피크를 이룬 게 바로 유치진선생의 자제분인 현 서울예술대학 이사장인 연출가 유덕형이었다. 그가 연출한 오태석 작 <초분>공연은 당시 모든 연극인들의 ‘혼을 빼앗는’ 최대의 이벤트였다.
그가 헤럴드 핀터의 ‘생일파티’을 선보이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고 결과적으로 학교운영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을 현명하게 판단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새로운 미학의 ‘엘리트주의’가 근본적으로 한국에서는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직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바람’을 일으키고 신속하게 은퇴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실천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질질 끌다 한국연극을 망쳐놓은 꼴이 되고 만 격이고…
유덕형은 한국여권으로 적성국인 소비에트공화국에 입국해서 조선일보의 1면을 장식한 분이기도 했다. 대중음악을 바꾼 게 ‘서태지’라면 한국연극의 흐름을 바꾼 게 유덕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센세이션널의 대명사였다.
그 당시에 등장한 오태석을 필두로 이강백과 같은 작가들은 일단 영화나 TV드라마로 각색도 할 수 없는 작품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그리고 명확한 스토리도 주제도 제시하지 않으며 압축과 생략, 은유, 우화를 도입해 난해하고 해석이 불가능한 그러면서도 상당히 아방가르드하고 지적이며 평론가나 이론가들의 해석과 주석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한 실험적 작품이 한국연극의 대세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런 작품들의 특징은
일단 공연을 본 관객들이 한국영화나 TV드라마를 보고 아는 척하듯 공연을 보고 떠벌리게 해서는 안 되게 해야 한다. 즉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게 아리송하게 쓸수록 좋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관객이 입 밖으로 낼 수 없게 ‘격조’(?)를 갖추어야 한다. 한마디로 작품이 지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어 감히 어떤 평가도 입에 올릴 수 없게 해야 한다.
마치 ‘이상’의 괴이한 시(詩)를 대하듯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덕에 수많은 관객들이 저절로 극장에서 멀어지게 된 것도 공로라면 공로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 연구를 업으로 하는 많이 이론가들이 꽤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다.
난해성이 우리의 전통?
전공 대학생도 읽기 힘든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을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는 관객들에게 보이겠다는 태도를 지금까지 고수해온 우리 연극인들의 내심(?)을 내 체험을 통해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극단 실험극장을 한국 최고의 극단으로 만든 <에쿠스>나 윤석화를 스타로 만든 <신의 아그네스>를 해설서를 보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 관객이 있다면 그는 하늘이 낸 천재일거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이려는 욕심과 과시가 반세기를 거쳐 이어오게 한 힘은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결국 관객들을 극장에서 몰아내고 연극인들끼리의 ‘잘난 척’을 위한 ‘자기도취’로 공연을 전락시킨 근본 원인일 것이다.
물론 이런 반론도 성립한다. 그렇다면 꼭 관객들의 구미에 맞는 공연만을 해야 하는가? 꼭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만 공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안방에서 TV드라마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이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이런 난해한 작품을 읽고 진정한 창조욕구가 샘솟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당신의 창작이 이런 난해성의 전통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가? 세계적으로 ‘부조리극’이 더 이상 대세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이런 연극이 오늘날 한국연극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이런 현학적인 작품의 공연을 통해서 한국에 지성적인 연극인이 배출되고 있는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40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연한 극단 ‘산울림’이 이런 작품으로 극단의 풍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가? 오히려 차범석의 ‘산불’을 공연할 때마다 리얼리즘의 대가로 연출자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저 문화 후진국(문화 식민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연극은 이 후유증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조리극’이 한때 세계적 연극 사조였고 이제는 지나간 유행이었을 뿐이라고 인정하면 빨리 잊어야 한다. 쉽게 털어내야 한다. 유행이었다고 인정하고 새로운 장르에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문화적 전통도 아닌 것에 얽매여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뮤지컬이라는 ‘상업주의’가 대세인 이 시대에 아직도 유럽을 정신적으로 드나들면서 ‘엘리트주의’를 고수하고 신봉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연극이 왜 난해한가?
자기가 하는 말에도 조리가 있어야 하고 논리가 서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논리에 승복하고 공감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관람료를 받는 연극공연이 논리가 없고 난해하며 관객들의 입에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이는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사실 한국연극을 보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최치언의 ‘미친극’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겠더라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또 고선웅의 경기도립극장 공연을 보고 “내용이 없어!” 말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그 공연을 보고 ‘무용과 연극의 차이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움직임 이외에 아무런 내용도 메시지도 없는 연극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 연극담당기자는 흡족한 미소를 띠면서 “좋은 데요!”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출연자 모두가 다 만족해한단다.
그럼 연극이 왜 난해해지는 것일까?
1.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이즘’을 표방하는 경우
시인 ‘이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주의나 모더니즘 등의 예술사조에 의해서 난해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가 존재할 수 있다. 이를 예술성으로 내세울 경우, 또는 ‘떼도적들’의 실러처럼 24세의 젊은 작가가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고자 많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차용할 경우에 이런 상식에 어두운 우리 관객들에게는 당연히 공연이 난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작품의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해서 난해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한국 극작가의 <노무현의 죽음>을 유럽에서 공연한다고 치자. 당연히 유럽인들은 한국의 정치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좌우측의 대립을 인지하지 못하므로 해서 이 희곡(공연)은 그들에게 난해성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에쿠스>나 <신의 아그네스>와 같은 번역극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유럽적이거나 미국적인 소재를 다루는 희곡일 경우에는 타국인은 당연히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마약’이나 ‘동성애’를 다루어도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유럽의 현대연극이 한국에 정착하기 힘든 것도 여기에 있다.
설령 공연 참가자들이 이를 이해를 하고 공연을 한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에쿠스>의 경우도 출연배우의 ‘벗은 몸’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실제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당시에 이게 더 화제 거리가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매스컴이 화제작으로 만들어 흥행에 도움을 준 것이다.
3. 작품의 수준이 떨어져 관객들이 이해를 못하는 경우
작가의 미숙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우리 창작극의 태반이 여기에 해당한다논리의 부족이나 스토리의 애매성 등으로 인해 난해한 공연이 된 경우다. 특히 작가 스스로가 나름 ‘격’을 높인다고 ‘재주’를 부리다가 오히려 난해한 작품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니면 연출자의 이해부족에서 연유할 수도 있다.
이건 비단 희곡뿐이 아니다. 한국의 이론가들이 번역서를 낼 때 정말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나’를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연기서적의 경우에 이해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페이지를 읽기도 벅차다. 또 해외에서 활동을 해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연극인의 공연을 구경하면 (내가 판단하기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이를 비판하지 않는다. 잘못하다간 새로운 풍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몰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또 어느 평론가는 꽤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하며 글을 쓴다. 그래서 굉장히 지적이고 현학적으로 여겨지나 다 읽고 나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평론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최소한 그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평자의 글을 읽으면 그가 왜 칭찬을 하고 비판을 하는지를 알 수 있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평론가들은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자기들의 글을 읽을 수 없도록 쓰고 있다. 사람들이 모든 공연을 다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개된 곳에 글을 쓰려면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게는 써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의 연극’처럼 매수에 제한을 받지 않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하면 탈(脫)엘리트주의가 가능할까?
교육의 중요성
한때 나는 젊은 후배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한국연극의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염증을 내고 있던 차에 한예종을 졸업한 젊은 친구들의 공연은 신선함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펼치는 ‘사랑과 섹스’는 유머도 있고 재치도 번뜩인다. 만화나 게임, 애니메이션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생활해서 인지 그렇지 못한 우리 같은 세대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기발했다. 그래서 그들의 공연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보고 그들과 즐겨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저희들은 학교에서 비주류였어요. 교수님들이 저희들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죠.”
“왜?”
“가볍다고요.”
“그래?”
“그런데 그때 무거워서 칭찬받던 친구들은 나와서 전혀 힘을 쓰지도 못하고 있어요.”
“너희 학교에 서울대출신 교수들이 많아서 그래”
무겁고 가벼운 것은 창작자의 머리와 가슴에 달려 있다. 머리가 무거운 사람은 무겁게, 가벼운 사람은 가볍게 연극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가벼운 사람에게 무겁게 하도록 강요하는 게 바로 우리의 ‘엘리트주의’다. 가볍게 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면 자연히 무겁게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연극은 모두가 무겁게 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무겁게 하는 시늉만 내다가 ‘죽도 밥도’ 아닌 게 되어버린 것이 우리의 연극판이다.
사실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의 본산은 ‘대학교육’에 있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어떤 고정된 인식을 갖게 되는 게 현실이다. 교수들을 통해서 관객과의 소통보다는 먼저 엘리트의식부터 배우게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교수들은 당연히 직업상 권위적인 아카데미즘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이게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서드버리 밸리 스쿨이 있다고 한다. 그곳은 4세부터 19세까지 다니지만 학년도, 커리큘럼도 없단다. 운동을 하든지, 들에서 뛰어놀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학생이 먼저 묻기 전에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린단다. 졸업생 만족도가 높고 유수한 대학 합격률도 높단다. 이런 학교 학생들은 자기가 뭘 할지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열정이 강하고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있으면 헤쳐 갈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예술가가 학교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이런 교육환경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들 해본다.
모든 영역에 걸쳐 심사와 평가를 없애라!
심사와 평가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제발 평론가나 이론가들은 학교에서 좋은 직장인으로 남는 게 연극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 일일 것이다. 정말로 연극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동이 없는 말(짓)은 하지 말라!
나도 글을 쓰고 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면 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 경험을 내세우게 되어 자연히 내 글이 이런 ‘잡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말을 하고자 하는 요점은 잃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사실 작품을 연출하거나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공연에서 자신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고 행동을 하면(또는 하게 되면) 관객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공감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감동을 받을 수 없다.
현장인들은 자신의 수준과 상관없이 자기의 강렬한 욕구가 있을 때(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할 때)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걸 습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보면 이게 진실처럼 자신에게 다가 오듯이,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습관화하면 이게 자기도 모를게 익숙해져 몰라도 아는 것처럼 인식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연극은 거짓말(?)이 넘쳐난다.
국립극단에서 <우루왕>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축제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무대미술 팀장이 분장실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식들이(이스라엘 보조스텝) 물건 하나만 옮기라고 해도 꼭 이유를 물어요. 왜 이걸 옮겨야 하느냐고요”
“대충 이유를 설명을 해줘!”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더욱 걸작이다.
“그렇게 일을 해보지 않아서 말문이 꽉 막힌다니까요. 순간 생각이 멎어요.”
왜 유태인이 세계의 모든 인문학자와 과학자를 배출하다시피하고 전 예술 장르를 석권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 평소에 ‘왜 해야 하는가를 알고’ 이걸 습관화해 두어야 한다. 지금 우리 연극인들은 나 역시도 대충 해치워버린다. ‘그럴 거야’ 하면서 대충 나름대로 추측하고 말아버린다. 무대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껄이고 움직이는 게 습관화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조리극’이 아니라도 난해성이 아주 심해진 게 우리 연극이다.
한국의 모 연출가가 자신의 모노드라마를 일본 여배우와 연습하다가 그녀가 ‘하도 이유를 따져서’ 아무 것도 못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우리 공연의 난해성이 여기에 연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뮤지컬이야 대충 불분명한 노래가사로 얼버무리거나 추상적인 춤으로 때우면 되지만 언어는 구체성을 가진 표현이어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공연을 보다가 왜 무용은 애매해도 답답하지 않는데, 연극은 전달이 안 되면 이렇게 ‘머리에 쥐가 날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아예 몸짓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답답해서 안달이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연극은 무용 이상의 애매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제는 우리도 여기서 탈피할 때가 되었다.
누구를 위하여 ‘징’을 울리나?
‘태’의 삼척공연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자신이 연주한 나라들의 관객들의 반응, 특히 커튼콜에서의 각국의 관객들의 특징을 열거해 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클래식의 경우이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각 나라마다 관객들의 개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는 먼저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접근한다고 한다. 좌우간 분명한 것은 나라마다 예술을 접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연극 관객들의 특성은 무엇일까?
전에 ‘태’를 가지고 삼척에 공연을 간 적이 있다. 모텔에서 자고 다음날 국립극장 버스로 삼척문예회관에 도착을 하자 펼쳐진 광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마당에 300여명 가량의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득 있는 게 아닌가! 놀라서 물었더니 시에서 베푸는 경로잔치를 마치고 ‘태’를 구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니 서울사람들도 졸기만하는 연극을 관극 체험이 없는 촌로들에게 보여야 하다니!” 걱정을 하면서 그 분들 앞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그런데 웬걸 너무 재미있게 보는 것이다.
그것도 TV를 보듯이 모두가 자유롭게 ‘추임새’를 하면서 말이다. “자식을 바꾸는구먼!” “아이구! 에미가 불쌍해” 이런 식으로 해설을 곁들여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대화를 나누면서 너무나 재미있게 구경을 하는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의 ‘엘리트 의식’이 우리 연극의 ‘최대의 적’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게 한국인의 관극태도의 원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관극 접근이 절대로 이성적이거나 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들이나 지성보다는 감성이 강한 게 현실일 것이다. 그래서 감동을 좋아하고 어쩌면 멜로성이 강한 면을 보이는 게 확실할거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돌아다보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나는 한국연극인들의 지성(知性)에 회의를 갖고 있다. 그들이 쓴 글이나 말에서 또는 공연을 통해서 유럽처럼 지성적이거나 현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김기덕 영화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영화가 그토록 유럽인들을 감동시키고 있지만 여전히, 아니 영원히 우리나라에서는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우리 국민들이 지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특성이 강한 나라에서 ‘부조리극’이나 실험성이 강한 지성적인 연극으로 업을 삼고 있으니 어쩌면 연극이 뮤지컬에 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지 모른다. 이제는 우리도 관객들의 취향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자꾸 유럽이나 드나들면서 그들만 연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태’의 삼척공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가 확실하고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 일본인들은 절대로 공연 중에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 반응에 예민한 우리 관객들에게 딱딱하고 애매한 ‘지성적’ 공연은 맞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 관객들을 향한 접근법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엘리트의식이 전통적으로 예인을 무시해 ‘광대’니 ‘딴따라’ 취급을 일삼던 잘못된 사회적 관행을 뜯어고쳐 예술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해준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순수예술을 한다는 미명하에 자만심에만 빠져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순수예술에 종사한다고 해서 ‘엘리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엘리트’로 자부심을 가지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우리들이 엘리트임을 자부하려면
지금 한국연극계의 정신적인 고질병이 있다면 일종의 과대망상증, 자기도취에 빠진 자아상실, 그리고 천재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질환 같은 게 아닐까? 가령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하면 자신이 셰익스피어와 동급의 예술가라고 여기는 환상이 존재하고, 국제연극축제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초청을 받아 참가하게 되면 자신이 국제적인 예술가로 명망이 있어 그에 상응하는 대접받는 줄 아는 착각을 하는가하면, 세계의 유수한 연극 저서를 번역하면 그들과 동급의 학자나 명망을 가진 연극이론가인줄 착각하는 과대망상과 자기도취에 빠지는 질환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과 착각이 한국연극을 ‘엘리트주의’로 이끄는 원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현상은 매스컴이 홍보차원에서 과장광고(?)를 하는데서 연유하는듯하다. 가난 속에서 힘들게 작업하는 연극인들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과장된 홍보로 기사화가 되면 연극인들은 이런 기사에 혹해 스스로 자신을 착각하는 자기도취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착각에 빠져 자신을 세계적 천재들과 동일시하는 환상을 갖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고 한다.
따라서 이런 자부심을 가지려면,
1. 세계 연극학회에서 인정받는 논문이나 저서를 집필할 것
지금 한국은 ‘논문표절’ 사건으로 온 나라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과연 우리 연극계는 안전할까? ‘학력위조’사건이 소용돌이칠 때 가장 중심에 있던 게 바로 연극계 아니었던가? 그래서 불안해지는 게 사실이다. 신뢰할 수도 없는 논문을 갖고 혹시 엘리트 의식을 뽐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더욱 엘리트 의식을 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연극에 관한 세계적 논문이나 저서가 우리에게도 있으면 ‘오늘의 연극’에 직접 공개하라!
2. 한국의 극작가의 작품을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인정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소개할 것. 연출자들도 자신의 연출작품이 최소한 김기덕 영화감독처럼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곳에서 수상을 한 실적을 보일 것
3. 자신의 제자들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로 배출할 것
중국의 북경중앙희극원은 공리, 장쯔이, 탕웨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배우를 자기들이 배출했다고 자랑을 한다. 우리 대학들도 이런 자부심을 표출할 수 있을 만큼 성과를 내고 있는가?
그렇지도 못l하면서 괜히 유럽인들의 흉내나 내려고 한다든가, 공연히 일반 관객들에게 내용도 알 수 없는 연극을 권장해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해랑선생이 살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유학생이라고 하면 전 국민의 0.0001%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일본유학생은 충분히 엘리트의식을 가질 만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유학생만 해도 현재 15만 명 정도가 가있다고 한다. 이런 시대에 국제적인 성과도 없이 일제강점기에 고착된 엘리트의식을 지금까지도 연극인들이 계승하고 있다면 이거야말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정치를 보자. 아무리 진보좌파라고 우쭐대다가도 선거에 지면 최소한 겸손해지는 미덕이라도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도 연극은 아무리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해도 끄떡없다.
이건 ‘선거’와 같은 대중의 선택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관객을 통한 심판조차도 무시하는 ‘엘리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아무리 심판을 받아도 자기들의 ‘엘리트주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게 연극판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연극판인가?
아비뇽에서 프랑스 연극관객들은 공연이 마음에 들면 발을 구르며 환호를 보내지만 공연이 그렇지 못하면 성당에서의 메인공연이라도 공연 중에도 발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거리낌 없이 나가 버린다. 유럽은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있던 좌석을 튕겨 큰 소리를 내고 퇴장해 버린단다.
이제는 우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객들이 시위를 해서라도 자기들의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뒤에서 툴툴거려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게 미덕이 아니다. 그래서 연극판이 점점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항상 무료관객인 일부 연극인이나 매스컴 종사자만 소리를 낼 게 아니라 입장료를 내는 관객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시대가 되어야 연극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