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순수하고 가장 본원적인 예술에 대한 갈망,
뮤지컬 <팬레터>
작: 한재은
작곡: 박현숙
연출: 김태형
제작: 라이브(주)
공연일시: 2017/11/10-2018/02/24
공연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관극일시: 2017/11/18 7pm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뮤지컬스쿨 조교수, 뮤지컬평론가)
뮤지컬 <팬레터>가 흥행 중이다. 먼저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팬레터>는 창작뮤지컬 공모 프로그램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의 최종 선정작으로 2016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90%를 달성했고 관객들이 뽑은 2016년 올해의 뮤지컬 1위(스테이지톡), 2017년 창작 뮤지컬 최고의 재연 기대작 1위(더뮤지컬)에 선정되었으며 2017년 초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올해의 레퍼토리’에 선정되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 왕가위 감독 소유의 프로덕션인 젯톤필름의 자회사 블락투뮤직(Block 2 Music)이 작품의 재공연에 투자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동시에 중국과 일본을 주요 타겟으로 한 해외 수출 역시 모색 중이라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정리해 보자. <팬레터>는 뮤지컬 지원시스템을 통과하여 초연 흥행에 성공, 대학로 뮤지컬 레퍼토리로 발전하고 있는 중소형 규모의 창작물이다. 이는 2017년 하반기, 지금/여기의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공격적인 초연보다 안정적인 기존 레퍼토리의 재공연을 선호하는 둔화된 시장의 움직임이 만든 풍경이다.
<팬레터>의 성공은 텍스트 자체의 힘에 기인한 바가 크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공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재은 작가의 필력이었다. ‘한국뮤지컬작가워크숍’에 소속되어 있었던 한재은 작가의 이력을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작품 전반에서 감지되는 밀도 높은 문학적 감수성은 분명 ‘작가의 것’이었으며, 이는 반복되던 검증 과정에 의해 단단해진 것 같았다.
뮤지컬에 담긴 문학과 예술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작품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작품은 경성을 배경으로 근대의 도시적 풍경을 담아낸 수많은 대중예술들과 국내 뮤지컬 시장에 여전히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는 브로맨스류의 자장 안에 있으니 말이다. 특히 주인공 세훈이 김해진과 연관되는 방식은 인물의 어떤 결핍이 내밀한 ‘남-남’ 관계를 형성하게 만들고 동시에 강렬한 자기고백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뮤지컬들의 서사와 궤를 같이 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베어>까지 국내 흥행 뮤지컬 서사의 공식이라고 할 만한 패턴이다.
그런데 이 남-남 관계 사이에 ‘히카루’라는 여성이 공존하면서 작품은 차이를 만든다. 게다가 이 캐릭터가 다양한 매체의 대중서사에서 익숙한 삼각관계로 포지셔닝되어 있지 않다는 점, 다시 말해 세훈의 얼터 에고(alter ego)라는 점에서 <팬레터>의 특징이 만들어진다. 기실 얼터 에고를 캐릭터로 만들어 자아와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하는 방식은 국내 시장에서 특히 흥행에 성공한 <지킬 앤 하이드>에서 이미 원형적 패턴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팬레터>는 그 이중적 자아 사이의 갈등, 즉 세훈/히카루에서 세훈-히카루로 그리고 세훈vs히카루로 발전되는 서사의 흐름 속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배치해 놓아 주목된다. ‘문학/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작가/예술가는 어떠한 사람인가?’ ‘작가/예술가는 무엇 때문에 창작을 이어가고, 이어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까지, <팬레터>에는 문학/예술이 솟아나는 지점에 대한 작가의 자기반영적 질문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구인회’라는 식민지 시대 모더니스트 문학 그룹이 작품의 시대적, 공간적 조건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위의 질문들은 더욱 극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팬레터>는 뮤지컬로 문학과 예술의 본질을 이야기하려 하는 흥미로운 시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그렇다면 <팬레터>가 이야기하는 문학과 예술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세훈의 문학적 감수성과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논리와의 충돌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학에 대한 갈망을 아버지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세훈은 ‘내지’ 유학을 중단하고, 자신을 알아줄 것 같은 존재를 향해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는 바로 소설가 김해진이다(구인회 소속이었던 김유정을 모델로 한 인물). 세훈은 이미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내 욕구의 결핍에 따른 생의 슬픔을 논한 바 있었다. 문제는 해진 역시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히카루를 ‘문학적 인간’으로 번역해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 결핵 말기인데다 늑막염까지 걸려 꺼져 가던 생의 마지막에 히카루는 해진에게도 같은 종류의 ‘슬픔’을 가진, 예술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문학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알아 본’ 그들은 오로지 편지를 교환하며 걷잡을 수 없는 파괴적 사랑에 빠진다. 세훈은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히카루로 살기로 결심하고 해진의 창작욕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해진이 칠인회 멤버들에게 히카루의 작품과 편지를 보여줌으로써, 칠인회 급사로 일하던 세훈의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히카루는 해진을 일상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홀로 소설쓰기에만 몰두하도록 그를 더욱 자극한다. 해진은 자신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칠인회에서 나오라는 히카루의 ‘명령’에 따르고 세훈의 간호를 받으며 외딴 곳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해진과 히카루의 공동작 <생의 반려>라는 최후의 소설을 남긴 채.
이상 정리된 작품의 서사에서 알 수 있듯 <팬레터>는 히카루 캐릭터의 밀도와 표현방식에 따라 공연의 밀도 역시 조절되는 작품이다. 남장을 한 채 세훈과 밀착되어 있던 초반부의 모습에서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발전하며 세훈과 분리되는 중반 이후부터 작품은 인물의 감정과 관계의 밀도를 높이며 휘몰아쳐 가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극단에는 히카루를 끝내 조절할 수 없어 글을 쓰는 자신의 오른 손을 자해한 세훈과 결국 <생의 반려>를 남기고 죽는 해진의 파국이 있다. 마치 예술지상주의를 외치는 듯, 걸작의 탄생은 파괴적인 예술혼에 근거한다는 관념이 작품의 밀도를 조절한다. 히카루는 그 관념을 응축해 놓은 존재, 예술의 뮤즈이자 파괴의 신인 것이다. 자신 안의 히카루를 어쩌지 못해 고민하는 세훈과 파국을 알면서도 걸작을 향해 불꽃같은 생의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는 해진의 모습은, <팬레터>가 재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치명적 본질을 드러낸다. 따라서 작품에는 예술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본원적인 차원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것이 존재한다. 임신과 거세로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연모하는 편지로 걸작을 남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중세 실화가 해진과 세훈/히카루의 핵심 모티프인 점은 <팬레터>가 말하는 문학열과 예술혼의 정체를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
밀도의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팬레터>는 관극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인물과 서사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물들이 내뿜는 감정의 밀도가 높고 파국으로 흘러가는 서사의 농도가 짙어서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단조의 톤으로 작곡된 뮤지컬 넘버들이 그 강도를 높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작품에 밀도를 조절하는 완충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 이상을 모델로 한 ‘이윤’이라는 캐릭터는 작품의 밀도와 리듬에 완충 작용을 하도록 설정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김해진과 함께 칠인회 멤버에 속해 있으면서 해진, 세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줄곧 의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이윤의 존재는 이 작품이 부분적으로 미스터리 플롯의 외관을 취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장치다. 미스터리 플롯이란 핵심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던져주면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결말에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방식이다. 따라서 관객은 인물들의 사연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원인이 밝혀지는 방식과 그 과정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팬레터>는 애초부터 히카루가 세훈의 얼터 에고라는 정보를 흘러 보냄으로써 관객은 세훈/히카루가 어떻게 해진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그를 파멸시키는지를 고스란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실성을 강화한 재연 무대에서는 세훈, 히카루가 그들만의 작업실에서 해진을 둘러싸고 있는 미장센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둘/셋의 관계를 더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관객이 인물의 사연에 깊이 접근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결과다. 따라서 이윤이 아무리 추리의 강도를 높여 세훈의 정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그 행위 전체는 작품의 톤을 근본적으로 조절하기에 역부족으로 느껴졌다. 때로는 서사의 초점을 옮겨놓기 위한 사족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서사의 밀도를 플롯으로 덜어내지 않고 이윤을 연기하는 배우의 희극적 연기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따라서 <팬레터>는 서사의 농밀함을 국내 뮤지컬관객 특유의 관극 패턴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활용, 이를 지렛대로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펼쳐놓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결국 우리들은 사랑의 모든 것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라고 고백하는 <팬레터>의 인물들과 함께, 작품이 말해주지 않는 사건의 현장을 찾아 자신만의 서브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관객이 양산될 수 있는 작품으로 발전하고 있다. 즉, ‘이미 이야기된 것’의 구술성을 회복하여 자신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소비하는 뮤지컬 관객이 늘어날수록 <팬레터>는 레퍼토리로서 지위를 굳힐 것이며 성공적인 창작뮤지컬 모델로 인지될 것이다. 다만, 작품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세훈의 ‘현재’가 열병을 앓고 난 인물의 후일담을 조금 더 리드미컬하게 담아내기를, 그래서 조금 더 폭넓은 관객들의 지지 역시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더욱 발전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