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세월호 2017/ 김향

*** 이 글은『한국연극』2017년 9월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기억의 시간을 통한 회복

– 혜화동1번지 6기 동인 초청공연 ‘세월호 2017’

 

 

작: 류성, 한현주, 가와무라 다케시, 고연옥, 윤미현, 구자혜, 이양구

연출: 김태현, 이연주, 마두영, 부새롬, 백석현, 윤한솔, 구자혜, 신재훈

단체: 혜화동1번지 6기 동인

공연장소: 혜화동1번지

 

김향 (연극평론가)

 

 

1. ‘세월호 2017’을 통한 그날에 대한 기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6기동인이 올해에도 기획초청공연으로 ‘세월호 2017’ 주제 하에 8개 작품을 공연했다. 첫 번째 작품인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류성 원작, 김태현 각색·연출, 2017.7.6.~7.9.)는 유가족으로 구성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 참여하는 것이어서 의의가 있었다면 나머지 작품들은 각기 다른 작가와 연출가들이 세월호에 대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2014년 4월 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침몰은 승객 476명 가운데 295명이 사망하는 크나큰 비극이었고 사망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승객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유해를 찾기 위해 애썼던 조력자들까지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참사였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왜 배가 침몰했으며 침몰하는 동안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승객들이 구조 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년 전의 그 의문이 지금도 공식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의 증거 조작과 왜곡 그리고 은폐가 지속되었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타자화 되고 주변화 되었으며 철저하게 정부로부터 외면당해야 했다. 2017년 5월 제19대 대통령 당선 이후 곧바로 바닷속 세월호가 인양되고 유가족들이 청와대에 초청되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의 길은 명확하지 않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뭘 기억해야 할지 되돌아보게 된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 이외에 공식적으로 해명된 진실이 없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세월호를 기억하기’는 이제 애도를 넘어서 ‘진실을 감추는 것에 대한 분노’이자 ‘세월호를 둘러싼 조작되고 왜곡된 인식에 대한 저항’이 되는 듯하다. ‘세월호 침몰을 단순한 사고로 여기려 하는 인식’ 속에서 ‘세월호를 기억할 만한 것이 없는 사건’으로 전락시키려 했던, 그리고 한동안은 그렇게 주변화되었던 의식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익히 지적되어 왔듯이, ‘세월호를 연극화하는 방식은 감정 과잉의 단순한 애도를 넘어 애도하는 자들이 주체가 되어 애도 자체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세월호 2017’ 참여작들은 연극을 통해 직접적인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너무 많은 것들, 소중한 것들 그리고 개인의 진실’에 다가서는 듯하다. 이 작품들에서는 ‘녹슬어 다 쓰러져가는 진흙더미의 세월호’가 품고 있는 진실이 제도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것과 더불어 아주 사소한 일상, 행복할 권리가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파괴된 것에 대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공연들이 ‘정치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월호 2017’에서는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유산균과 일진(日辰)>(한현주 작, 이연주 연출), <4Four>(가와무라 다케시 작, 마두영 연출), <검은 입김의 신>(고연옥 작, 부새롬 연출),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에 관하여>(공동창작, 백석현 구성·연출), <할미꽃단란주점 할머니가 멜론씨를 준다고 했어요>(윤미현 작, 윤한솔 연출), <윤리의 감각>(구자혜 작·연출)> 그리고 <비온새 라이브>(이양구 작, 신재훈 연출)가 공연되었는데, 지면 관계상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에 관하여>와 <윤리의 감각> 그리고 <비온새 라이브>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에 관하여>에서의 ‘빈 시간’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공동창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배우들의 개인적인 기억을 활용하여 세월호 희생자들이 가졌을법한 기억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는 관객들의 기억까지 동원하려는 듯 무대와 객석의 거리감을 없애고 관객들이 공연 공간 안에 자유롭게 앉도록 하여 강원모, 김범석, 김윤하, 김주영, 김지숙, 김지은, 조윤정 그리고 최승은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를 오가며 연기를 하는 방식을 보였다. 때때로 관객들을 끌어내 함께 춤추고 놀았으며 자신들의 놀이에 관객들을 참여시키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듯 개별 장면을 파편화시켰고 각 상황에서의 배우들의 움직임만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놀이-휴식-노동-식사-토론-간호-여행-축제-침묵(바라보기)’라는 일상의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지만 각각의 장면들은 서로 연관성 없이 나열되는 에피소드적인 구성을 지녔다. 젊은 배우들 개인의 일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이었지만 공감할 만한 것이었고 개인의 사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과거의 아름답고 의미 있던 일들을 추억하는 것이기에 유쾌하고 발랄한 리듬으로 전개되지만, 패트병을 오브제로 ‘자신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벽 쌓기’를 간헐적으로 반복하여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이들의 ‘일상’이 ‘죽음’과 함께 하고 있음을 유추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즐거움이 전부가 아니며 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함께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마지막 30분 정도의 ‘빈 시간’에 있다. 배우들은 열심히 놀고 먹고 친구를 간호하고 또 각자의 다채로운 여행담을 나누고 난 뒤 무대를 색색깔의 플라스틱 공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한동안 관객과 어우러지는 공놀이를 한 뒤 순식간에 무대를 빠져나가고 관객들만이 무대에 남겨진다. 그러나 이때 무대 전면 상부에 영상으로 투사되고 있던 디지털시계는 앞으로도 공연이 끝나려면 30분이 더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관객들은 이 30분이 ‘비어 있는 시간’임을 알아차린 듯 각자의 판단에 따라 극장을 나서기도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기도 한다. 배우가 없는 무대에서 관객들이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시작된다. 10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배우들 역시 관객처럼 무대에 자리잡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의 시간을 나누기 시작한다.

 

무대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이 ‘빈 시간’은 그 침묵으로 인해 배우와 관객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고요함 속에서 관객들은 집중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의 마음과 다른 이들의 마음이 ‘애도하는 맘으로’ 소통되는 것을 경험한다. 관객과 배우들은 타의가 아닌 자의적으로 어둡고 조용한 극장 안에 남아 있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희생자들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제지당했던 유가족들의 마음’을 미약하게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관객들과 배우들은 슬픈 가운데 그 ‘빈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위로 받고 서로를 다독이고자 한다. 서로를 바라보고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감사하다’는 말을 속삭이며 그 ‘빈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런 극적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듯한 ‘빈 시간’ 속에서 실은 관객과 배우 간의 구분이 해체되고 고여 있던 슬픔을 나누고 함께 이겨내자는 연대의식이 구현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빈 시간의 침묵’은 개개인의 사소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의 중요성과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위로와 힘’을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3. <윤리의 감각>에서의 ‘말하기’와 <비온새 라이브>의 ‘노래하기’

구자혜 연출이 쓰고 연출한 <윤리의 감각>은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가해자의 언어’가 또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대량학살의 죄를 짓고 피신해 있는 가해자를 찾아내 그를 국내로 송환하여 심판받게 하는 일을 하는 ‘헌터’는 ‘가해자’를 데리고 국내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둘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헌터’는 자신이 가해자인 것을 잊은 ‘가해자’에게 그의 죄를 기억나게 하고 ‘왜’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가해자’의 뻔뻔함에 황망해하기도 한다. 비행기 안에서 난기류로 인해 공포심을 느끼는 ‘헌터’를 보면서 ‘가해자’는 또 다시 ‘왜 공포스러운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왜’라는 질문 속에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합리화하던 ‘가해자’는 어느덧 ‘생각’을 멈추고 ‘죽음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희생자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구자혜 연출이 추구하는 것이 선명히 드러난다.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감각의 중요성을. 이러한 ‘감각 없음’이 ‘세월호’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의 원인이라고 여기서 더 나아가 국민을 죽이는 국가의 만행이 지속되고 있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가해자를 무대에 올리는 구자혜 연출작에서 경험되는 것은 지루한 듯하면서도 집요하게 ‘가해자를 똑바로 바라보라는 요구’이다. 절망, 분노, 증오 또는 연민의 감정으로 ‘가해자’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범죄를 진술하고 사과하고 고통과 가책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 누가 아니라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이 ‘가해자가 윤리적 감각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구자혜 연출은 ‘가해자에게는 고통의 공감’을, ‘방관자들에게는 이성적 사유’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슬픔 또는 자기 연민에 젖어 나약하게 가해자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감상에 젖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고 관객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건조한 극작술과 되도록 관객과 마주보고 말하는 배우들(권정훈, 이리, 조경란, 최순진)의 연기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진정성이 넘친다.

 

이에 비해 <비온새 라이브>는 이양구의 이야기꾼적 면모와 신재훈 연출의 다정한 감성 그리고 문가에, 박옥출, 양택호, 윤일식 그리고 윤진성 배우의 편안한 연기가 진정성을 발휘하는 공연이었다. 제목 속의 ‘온새’라는 인물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으며 그녀의 딸 ‘지나’를 온새의 친구인 ‘경애’와 이장인 ‘영랑’이 돌보고 있다. ‘온새’는 수해 피해로 자신의 집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돌아온 후로는 수해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느라 늘 무대 밖에 있다. 대신 ‘지나’와 ‘경애’가 모녀지간 같이 지낸다. ‘경애’에게 ‘지나’는 친구 딸이 아닌 자신의 딸인 듯하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거리감이 없으며 투닥거리며 싸우는 것이 ‘지나’에게는 여러 명의 엄마가 있는 듯하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수해가 반복되고 있고 정치인들이 헛공약으로 표만 얻어가고 해결책을 마련해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나지만 결코 과잉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의 묘가 쓸려나가 “내장이 전부 쓸려나간 것 같아요”라는,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하는 영랑은 과잉된 슬픔도 슬픔을 감추기 위한 억지 웃음도 짓지 않는다. 수해를 돕는 공무원 승환도 도와주는 이로서 생색을 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는 듯하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순식간에 생활의 터전이 사라지고 겨우 목숨만 건지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는 극한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탄식하고 절망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겪을 때 자신들을 치유해 주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아카펠라를 통해 한마음으로 노래하며 절망을 넘어 희망을 경험했던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다시 노래하고자’ 한다.

 

작품을 보는 내내 세련된 재담이 지속되는 이양구 작가의 글쓰기에 감탄하게 되었다. 허구적인 시공간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 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은 ‘세월호’와 올 여름 수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그리고 아카펠라를 부른다는 설정 이외에는 두드러진 연극적 설정이 없으며 극적인 사건 전개도 뚜렷한 절정과 결말이 없는 구성이지만 그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깊은 아픔이 있고 또 희망이 있다는 사실적인 연출을 보여준 신재훈 연출가에게서는 다정한 감성이 경험된다. 배우들의 연기를 볼 때는 고통을 어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표현하는지 의아했다. 희곡 속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 자신이 ‘고통 속에 희망’을 안고 연기하는 듯했다.

 

<비온새 라이브>의 마지막 장면은 어둠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1969, Paul Simon 작사·작곡)를 아카펠라로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 장면 역시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현재 ‘세월호’에 관한 진실은 암흑 속에 가려져 있고 피해자 및 다수의 조력자들이 ‘진실을 밝히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4. 공감과 화합이 부를 회복

 

연극계에서도 또는 연극적 표현이 가진 매력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의 움직임은 정치적인 것이다. 각기 다른 표현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및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조언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공감과 화합’에 대해 사유하게 했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아름다웠던 날들에 관하여>는 배우들 개인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보여주고 관객과 ‘빈 시간’을 채우며 ‘위로’라는 행위를, <윤리의 감각>과 <비온새 라이브>는 ‘말하기’와 ‘노래부르기’를 통해 감각의 중요성과 화합의 힘을 형상화했다고 여겨진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힘/능력의 곁에는 무력/무능력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의 ‘무’는 박탈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국가가 그 힘을 스스로 박탈했을 때 국가의 ‘잠재적 힘’이 현실적으로 이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성을 지닌 순수한 국민들’의 ‘매개적 역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세월호 2017’의 공연들은 모두 다 함께 ‘매개자’가 되어 국가의 능력을 회복하자고 노래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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