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던 순간, 로망과 망설임 사이
– 뮤지컬 <명동로망스>
정명문(뮤지컬평론가)
작/작사 : 조민형
연출 : 김민정
작곡 : 최슬기
음악감독 : 구소영
제작 : 장인엔터테인먼트
출연 : 배두훈, 고상호, 김준원, 지현준, 박호산, 안유진, 조윤영, 원종환, 홍륜희, 박범정, 정민, 김호섭
일시 : 2016.3.20~2016.4.24
장소 : 동숭아트홀
안녕하지 않은 때, 시간여행 꿈꾸기
과거 혹은 미래와 같은 다른 시간대로 움직인다면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누구나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타임 슬립을 다룬 판타지 물은 우연히 다른 시간대를 가게 된 주인공이 삶에 대한 사소한 진리를 깨닫는 결과를 보여주곤 했다. 최근 시간여행자들이 나오는 작품에는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재생산 되는 것은 2014년, 인간의 도리가 무너진 경험의 영향일 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예술이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리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뮤지컬 <명동로망스>는 현재를 살고 있는 선호가 50년 전인 1956년으로 시간 이동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뮤지컬은 2013년 ‘블랙 앤 블루’와 ‘예그린 앙코르’를 거쳐 차근히 개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10월부터 4개월간 정식 공연되었고, 2016년 서울, 고양, 목포, 영주 등에서 작품 인지도를 높였다. 이 작품은 1950년대와 2010년대의 청춘을 마주보게 한 다음 과거의 따스함과 열정을 보여준다. 세대 간에 불통이 화두인 지금, 시간 여행을 다루는 이 작품이 어필했던 매력과 주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꿈꿀 수 있던 세상
모든 일을 다음으로 미루며 무기력하게 살던 9급 공무원 선호는 공무집행을 위해 명동의 오래된 다방 ‘명동로망스’를 찾아가게 된다. 얼결에 벽장을 통해 1956년으로 이동한 선호는 신분 증빙을 할 수 없어 난처해진다. 그런 선호를 경찰서에서 빼준 이들은 박인환과 전혜린이다. 이들로 인해 선호는 미래에서 온 커피예술가로 불리며, 명동로망스 다방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그곳은 시인, 화가, 작가 지망생, 기자, 디자이너 등이 교류하는 공간이었다. 선호는 공화당이 원하는 연설을 해주고 신분 증빙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실제 연단에서 예술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기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결과 다방에 출입하던 예술인들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박인환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선호는 혜린, 중섭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미래를 알리지만 예술가들은 지금의 상황을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선호는 그들을 보며 삶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게 되고, 그 순간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늙어버린 명동로망스 마담이 선호에게 전혜린의 책을 건네준다.
<명동로망스>은 선호의 타임슬립을 통해 관객 스스로를 점검하게 만든다. 주인공 선호는 N포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2000년대의 청년들은 10대에는 입시, 20대에는 취업을 위해 참고 산다. 고정된 틀에 맞추는 삶이 만족스런 결과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에겐 특별한 대안도 없다. 1950년대도 개인의 삶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통금, 문화인 등록제 등 통제와 검열이 노골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달랐다. 이중섭은 예술가의 두 자아 -하고 싶은 일과 책임(가족의 부양)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그림을 포기하지 않는다. 박인환은 금지와 검열이 진실을 막지 못한다고 부르짖는다. 전혜린은 다음이 있기나 하냐며 지금을 맹렬히 살아낸다. 예술가들은 검은 물(커피)이나 생명수(술)를 마시며 시간을 소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림, 시, 에세이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출하였다. 비록 그 작업들이 폄하되고 돈이 안 되더라도 그들은 일단 버텼다. 이 작품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에 몰입되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결국 사회나 제도의 개선이 아닌, 개인의 변화만 요구된다. 그래서 각자 도생으로 희망을 찾아야 하는 지금의 상황들은 서글프기만 하다.
이 작품은 통제와 검열 이면에 열정과 낭만도 공존했던 1950년대를 보여주기 위해 가상의 인물들을 활용한다. 명동의 예술가를 압박하는 경찰 홍익은 제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그는 갈등을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심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통제와 검열에 대해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진 못한 그 역시 사회의 한 부품과 같은 일원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악은 아닌 셈이다. 그런 경찰을 통해 이 작품은 우리가 처한 문제들이 각자의 영역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일 수 있다고 슬며시 눙친다. 마담의 경우 예술가들의 아지트를 제공해준다. 자질을 알아보고 외상쯤은 견딜 수 있는 후원자 같은 인물이 있어야 예술가들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실존 인물과 가상인물의 활용을 통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들을 조절하고 있다. 관객들을 이중섭, 박인환, 전혜린을 보며 본인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과거가 쌓여 만들어진 현재, 그 현재들의 집합이 미래라는 평범한 진리를 이 작품은 되새기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주제의식으로 삼으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진다. 그래도 이 작품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이 자기만의 세상을 가져야 한다는 소박한 진실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한다.
감성을 건드리는 가사와 노래들
<명동로망스>에 수록된 노래는 총 18곡이다. 이 노래들은 가요를 기반으로 하되 편곡과 발성으로 따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첫 부분은 악기 하나만으로 주 멜로디를 각인시키고 후렴부는 첼로, 베이스, 기타를 추가하여 풍성한 분위기와 화음을 느끼게 한다. 노래는 독창으로 시작하지만 후렴을 합창으로 진행하여 함께 한다는 느낌도 확실하게 보여준다. 독창곡들도 9곡이나 되지만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을 적재적소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단순한 박자감이 매순간을 기다리는 가사와 잘 연결되며, ‘새로 피어나다’는 마담의 벨칸토 창법과 최초의 국산 자동차의 이름이기도 한 시발(始發)이란 동음이의어가 활용되기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과 가사로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한다. ‘우리는 어디에’의 경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진지한 가사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마이크가 머리 위에서 쓱 튀어나오는 깜짝쇼와 함께 113번째 같은 질문과 대답이란 상황을 연출하여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예술가라면’은 경찰이 신분을 의심하는 상황이지만 발랄한 리듬과 다양한 타악기로 처리된다. 심지어 축제처럼 다함께 춤을 춘다. 결국 예술가의 지위가 허용되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는 곡이다. 혜린은 ‘그렇게’나 ‘집시처럼’을 통해 미래를 안다 해도 현재를 바꿀 수 없으니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는데 볼레로, 보사노바, 탱고 등의 리듬으로 가사의 정열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런 세상’의 경우 중섭, 혜린, 인환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멀리 있지 않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끝에 선호도 그런 세상을 그려본다는 대답으로 마무된다. 예술가와 교류로 그가 성장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킬링 넘버는 ‘생명수’다. 예술가들은 경찰 취조를 당한 뒤 술 예찬론을 펼친다. 소주, 먹걸리, 동동주, 위스키 등 어떤 종류든 한잔 마시면 갈증도 외로움도 가난함도 잊을 수 있게 된단다. 암울한 시대에 생명수로 잠깐 마취를 한다는 정서는 여러 세대들에게 호응을 받을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명동로망스>의 노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진지한 듯 유쾌하게 풀어낸다. 게다가 각각의 가사들은 곱씹을수록 매력적이다. 뮤지컬은 노래로 주제와 분위기를 동시에 전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곡이 많다보면 기억이 희미해지는 곡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커튼콜 때 관객들이 ‘생명수’를 함께 부를 정도로 가사와 멜로디가 어렵지 않다. 멜로디, 리듬, 박자들이 가사와 잘 어울렸고, 반복구조를 활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토리가 노래와 잘 결합되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좋은 성취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세상, 소통의 무대
<명동로망스>는 현재와 과거를 은근슬쩍 전환시키는데 붙박이 가구 스타일의 탁자와 의자, 조명을 활용한다. 그리고 사선의 틀과 기울어진 바닥, 길이가 제각각인 의자, 수많은 쪽지들로 뒤덮인 한쪽 벽면 등으로 혼란한 시대를 구현했다. 타임슬립은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액자 속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게 한다든지,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전차, 간판, 이중섭의 그림들로 시대상을 드러내는 등 간단하지만 한눈에 파악될 수 있도록 짜여 있었다. 의상도 캐릭터의 성격을 잘 반영하였다. 마담은 벨벳 소재의 빨간 투피스로 매력을 강조하였고, 혜린은 옷과 화장까지 검은 색으로 통일하여 외골수적인 모습을 표현하였다. 박인환은 코트와 중절모로 멋을 냈으며 이중섭은 늘어진 티셔츠로 자유분방함을 경찰은 제복을 입어 규제의 면모를 나름 드러낸다.
일화를 통해 과거와 지금의 간극을 풀어내는 것도 센스가 있다. 선호의 구김 없는 셔츠에 깜짝 놀란 디자이너, 커피콩을 그대로 팔팔 끓여내던 방식, 라떼 아트, 애니팡, 통금과 신분증의 일화들로 문화적 충격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에 관객들도 마치 시간 여행에 참여하는 듯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무대, 의상, 조명, 에피소드는 결국 과거가 따스한 곳으로 기억될 수 있게 기여한다.
이중섭은 선호가 자기 세상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 세상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보여주는 삶이 아닌 본인에게 의미 있는 삶이면 된다. 다른 이들의 세상을 조각조각 이어가지면 화려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자신의 것이 없기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선호가 꿈꾸는 세상은 그런 소박한 세상이었고,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자 현재로 돌아오게 된다. 전혜린은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축복한다’ 라는 서문으로 미래의 선호를 격려해준다. 선호는 매번 다음을 외쳤지만 지금을 바라보는 변화를 겪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도 매 순간을 붙잡아야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과거 예술가의 삶을 통해 순간을 살아내는 것부터 시작하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보내는 그 메시지가 꼰대들의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타인을 경계해야하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는 게 오지랖처럼 여겨지는 지금에 비해 이 작품이 그리는 과거는 그래서 상당히 낭만적이다. 그들의 조언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건 과거의 인물들이 과하게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사소한 진리부터 출발하니, 그것을 전달하는 것도 화려할 필요가 없을 런지도 모르겠다. 듣기를 멈추고 주장만 하는 지금, 공감할 수 있는 자리나 격려하는 따스함이 좀 더 늘어난다면 불통을 조금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명동로망스>가 꿈꾸는 세상을 그래서 응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