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연과 이론> 2018 봄호에 게재된 글의 재수록입니다.
우리의 팻말은 어디 있는가?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 송경동,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중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을 것
블랙리스트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 주동자 김기춘과 조윤선은 대법원 선고만 남았다. 진상조사 현장에서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은 눈부시고 눈물겹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블랙리스트 이후 우리의 전선은 어디인가? 진상규명-책임자처벌도 끝나지 않았는데 왜 서두르냐고?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워밍업에 불과할 뿐, 본 게임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몸 푸느라 체력소진하면 경기 전에 다리 풀린다. 어서 일전을 준비해야 한다. 힘의 분산 아니냐고? 마당에 씻김굿이 벌어지고 상여가 대문을 나설 때라도 누군가는 뒷방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어야 한다. 블랙리스트의 손익분기점은 어디인가, 하고.
전리품인가, 신기루인가
근간에 연극계 살림은 바닥을 기었다. 그 와중에 블랙리스트는 구들 꺼지는 소리 같았다. 우는 아이 뺨 때리는 격이었다. 3-4년의 시간이 증발해버렸다. 그에 대한 보상은, 아니 배상은 무엇인가? 정부 당국이 연극계에 어느 때보다 유들유들해졌다. 이렇게 유순하게 우리의 요구를 경청해준 적이 없었다. 3.1운동 이래 최고의 기회였다. 그에 대해 연극계가 내놓은 요구사항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잇속에 뜻이 없는 수행승? 어느새 연극계는 비자발적 비자본주의자가 된 것일까? 연극계의 권익을 대표할 만한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직능과 분파를 뛰어넘을 단일한 대오가 없다. 공이모도 게으르고 평협도 무능하다. 블랙리스트처럼 ‘훅 들어오는’ 치명적인 사건에만 몰입하거나, ‘명백한 정의’에만 반응하거나. 역으로 연극계라는 전체 구조나 연극지원이라는 애매한 사안에선 젬병이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송경동 시인은 세월호 사건을 두고 천지개벽을 요구했다. 세월호는 우리사회의 결함에 대한 참혹한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굳이 문학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아이들의 죽음이 국가개조 요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해서이다. ‘공공의창’에서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촛불정부’ 민생 1순위는 육아환경 개선이었다. 좀 이상하지 않는가? 촛불정신의 핵심과제가 육아라니! 육아를 위해 촛불을 들었나. 촛불에서 육아로 넘어가는 것도 상상력의 영역이다. 정부도 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아마도 획기적인 개선안이 나올 것이다. 의제는 상상력에서 발안되어 통계학으로 결정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에서 내일의 친구로 변신하는 매직연기력
그렇다면 연극계의 과제 1순위는 무엇인가? 블랙리스트는 무엇에 대한 메타포였나? ‘천지개벽’과 ‘육아’에 해당하는 우리의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요즘 각종 토론회의 주제인 지원제도를 예로 들자. 한푼이라도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래서 열심히 토론하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지원금의 규모와 지원분야, 지원방식을 스스로 정하고 제안한 적이 있는가? 정답은 ‘있다.’ 그런 거 하려고 문화예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미 관료화되고 특권화되었지만 원래 문예위는 정부와 싸우라고 예술계가 파견한 대리투쟁조직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예산을 짜는 시기에 위원장은 삭발투쟁과 팻말시위를 마다않아야 하고, 예술관련제도 개선을 위해 단식농성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예술계의 총대인 것이다. 그런 문예위가 적군의 총탄이 되었다. 블랙리스트 재발을 막고 지원제도를 비롯해 각종 복지정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문예위를 되찾아야 한다. 위원장 및 위원 선출방식부터 부서장 임명권까지 예술인들 품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문예위 앞마당은 하향식 공무집행이 아니라, 상향식 예술청원의 현장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술인 품’이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팻말 본 눈 구함
문예위는 어떻게 되찾아오는가? 싸움이다. 한 문예위 위원은 노골적으로 꿀팁을 제공한다. “나는 연극인들이 총궐기를 해서 예산투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 연극도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은 이때에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극인들이 다시 광화문으로) 나가야 해요.” 문예위를 되찾아서 예산을 당장 5천억으로 증액하고(현재 2,300억), 민간극단 자활을 위한 특단 조치를 시행하고, 공공극장을 전부 대관극장으로 변경하고, 연극백년을 위한 중장기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지원제도 ‘개선’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연극계 자립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연극인을 살리는 정책을 펴야한다. ‘구조’를 바꿔야 한다. 예술정책의 ‘항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우선 단일한 목소리,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연대조직이 있어야 한다. 정책개발과 감시, 견제를 위한 크고 강한 조직이 필요하다. 연극계 1순위 과제를 정하고 퍼뜨릴 연극인연대가 절실하다. 그 과제가 적힌 팻말이 보고 싶다.
새로운 예술운동이 몰려온다
최근 ‘미투운동’과 관련하여 연극계의 힘이 조직화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조직화된 힘만이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변화는 연극계, 예술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토양 자체를 바꿀 동력으로 자라나야 한다. 과대평가 아니냐고? 성폭력·성차별 반대운동이 어떻게 사회개조운동이 될 수 있냐고? 페미니즘은 인간해방운동이다!(벨 훅스) 그 속에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할 모든 가능성이 내장되어 있다. 지난 세기까지 모든 해방운동은 실패했다. 계급철폐를 내세웠던 노동운동이 대표적이다. 페미니즘은 성공가능성 높은,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해방운동이다. 연극계의 조직화된 힘이 새로운 주제와 문제의식으로 연극계를 부흥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부흥은 오랜 싸움을 위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동안 연극계는 정권투쟁에 몰두했다. 그래서 소원대로 문재인정부가 탄생했다. 그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가? 이제는 연극계,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한다. 문예위 포럼에서 “문예위의 주인은 문체부 과장이다”라고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박자를 맞추지 않았다. 독립된 문예위가 우리가 살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 편이 잡았다고 문예위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원정책을 오랫동안 신중하게 생각할 때다.
돈이 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면 지원책이라도 확실히 마련해야 우리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도 우리를 위한 단체를 만들자, 정치색을 배제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목소리를 낼 사람들을 모으자, 그리고 그런 조직을 결성하자, 언제까지 정치권의 하수인으로 살 것인가? 소원대로 정권이 바뀌지 않았는가, 그러니 우리 모두 다음을 기약해보자.
얼마전에 글로 다툼이 있었다. 어느 연극인이 00연대에 참가한 후에 이메일을 받았더니, 이재명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겠다는 답신이 왔다고 몸씨 답답해 하는 글을 올린 걸 읽고 무척 화가나서 내가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젊은 연극인이 아주 기분나쁜 글을 올려 기분이 상해, 또 내가 한마디 했다. 그건 다름아닌, 이재명후보를 지지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연극계가 너무 너무나 한심해서 그랬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 연극인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앞장서서 우리 연극계의 형편이나 처지를 당선자에게, 그러니까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지지에 대한 조그마한 보상이라도 요구하는 열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소한 선처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태도는 자기가 지지하는 분이 대통령이 되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심보인지 ,블랙리스트처럼 전 정권의 보복에만 열을 올리고 이를 수행하지 못해서 안달이지,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분의 5년 임기를 다 보내버린다. 지난 대선에서 연극계의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문재인대통령이 당선되기를 열렬히 기원한 건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을 한번이라도 모셔서 우리의 처지를 하소연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거기다 연극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부터 벽안시하고,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심려를 끼치지 않겠다고 나서서 어떤 요구도 못하니 , 이런 답답한 꼴이 어디 있는가? 이런 현실에서 앞날이 깜깜한 연극계가 장래에 무슨 광명을 볼 수 있겠는가? 답답할 뿐이다. 그런 주제들이 대선만 다가오면 , 또 누구를 지지한다고 법썩을 떠니 정말 화가 난다. 젊은 후배들의 이런 꼬락서니를 늙은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서 여기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연극인의 가난은 자업자득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 정말 우리 모두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