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듣는 연극
– 임야비
뮤즈를 울린 극작가
셰익스피어 (5)
History (史劇)
1. 존 왕
셰익스피어 전체 작품 중에서도 유독 주목을 받지 못하는 존 왕은 음악적으로도 큰 소재가 되지는 못한 듯 하다. 오직 카스텔누에보 테데스코만이 그의 셰익스피어 연작 서곡 11곡 중에 유일한 사극으로 존 왕을 넣었을 뿐이다. 1941년에 작곡된 이 곡은 드라마틱한 관현악곡으로 대규모 전투 장면과 존 왕의 죽음 등을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2. 헨리 4세
폴스타프! 폴스타프! 폴스타프!
무겁고 딱딱한 이 사극에서 재기 넘치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 늙고 뚱뚱한 기사의 인기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셰익스피어 역시 자신이 창조해낸 이 인물에 대해 흡족해 했는지 그를 전면에 내세운 희극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기남 폴스타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음악화한 작품으로 단연 베르디 최후의 오페라의 ‘팔스타프’를 꼽을 수 있다. 오페라에서 팔스타프라는 인물은 헨리 4세와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서의 등장하는 폴스타프와 완벽하게 동일하지만, 줄거리와 그 외의 등장인물은 윈저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 일치한다. 그래서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는 이어 연재되는 ‘희극’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겠다.
3. 헨리 5세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
얼마 안 되는 우리, 행복한 소수, 짐의 형제들 말이오.
오늘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 나의 형제가 될 것이니
– King Henry V; Act 4 Scene 3
셰익스피어의 사극 중에서 가장 영웅적인 헨리 5세는 영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2차 세계 대전 중에 전설적인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 주연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 헨리 5세는 당시 영국의 정상급 예술가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총동원 되었다. 영국의 국민 작곡가 월튼은 올리비에의 영화 제작 소식에 흔쾌히 배경 음악 작곡을 수락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산발적으로 많은 음악이 나오지만, 통상 연주회용으로 추려진 5곡의 모음곡 형태로 연주 녹음된다. 첫 곡 Overture, the Globe Playhouse는 영화 속에서 미니어쳐로 제작된 당시 런던의 모습을 조망하는 장면의 오프닝 타이틀 곡이다. 마치 기구를 타고 유람을 하는 듯 한 관악기의 연주가 신선하며 이 후 이어지는 웅장한 사운드가 곧 펼쳐질 영웅 서사시의 예포를 울린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곡 Passacaglia: Death of Falstaff는 영화 속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게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는 팔스타프의 임종 장면에 쓰인 음악이다. (실제 원작 헨리 5세에는 팔스타프가 등장하지는 않고, 피스톨과 그 일당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한다.) 치열한 전투 장면을 묘사한 Charge and Battle,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Touch her lips softly and part를 지나 마지막 곡인 Agincourt Song에서 극적인 승리를 자축하는 장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승전의 기쁨을 한껏 고무 시킨다.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1989년 작 ‘헨리 5세’의 사운드 트랙 앨범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음반이다. 배경음악은 수 많은 히트 곡을 낸 영화 음악작곡가 패트릭 도일이 작곡했다. 비록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고 음악도 평이한 편이지만, 아직도 이 영화와 음악이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 경이 사운드 트랙을 연주 및 녹음한 덕택이다. 덧붙여 이 음반에서 재미 있는 점은 원작에서 헨리 5세 휘하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즈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음반에서는 감독과 주연을 맡은 케네스 브래너는 북아일랜드 출신이고, 작곡가 도일은 스코틀랜드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으며, 래틀 경은 잉글랜드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각 지역의 지휘관들이 똘똘 뭉친 것처럼, 영화와 음반의 기획 단계에서 살짝 의도 된 것이 아닐까라는 재미있는 억측을 해 본다.
4. 리처드 3세
왕위를 위해서라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살육을 자행하는 곱추왕의 잔혹한 학살극 리처드 3세는 그 강렬한 욕망의 분출과 매혹적인 악마성이 너무나 훌륭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수많은 예술 장르의 소재가 될 법한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연관된 음악은 월튼의 영화음악과 아펠바움의 극부수음악 2개가 전부이다. 바그너나 베르디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오페라화를 했거나, 베를리오즈나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같은 관현악법의 대가들이 오케스트라 곡으로 만들었다면, 아마 가장 걸출한 ‘셰익스피어의 음악화’가 되지 않았을 까라는 아쉬운 상상을 해본다.
1955년에 제작된 리처드 3세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 감독 겸 배우로 자리매김해 주었다. 이러한 업적의 숨은 공로자로 월튼이 작곡한 영화음악을 빼 놓을 수 없다. 헨리 5세 모음곡과 마찬가지로 리처드 3세의 음악도 파편적인 영화 사운드 트랙 그대로 보다는 정리된 관현악곡으로 더 많이 연주 및 녹음 된다. 독립적으로 연주되기도 하는 Prelude는 왕궁의 팡파레로 힘차게 시작한다. 뒤이어 사냥을 연상 시키는 호른의 신호음이 에피소드 식으로 등장하며, 이어서 삼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에드워드 왕세자의 가련한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느린 부분이 이어진다. 곡의 후반부는 타악기와 금관들이 포효하는 전투 장면으로 클라이막스를 맞이한 후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튜더 왕조를 여는 헨리 7세의 위풍당당한 개선으로 끝을 맺는다. 모음곡 중에는 제 3곡 The Princes in the Tower의 슬픈 선율이 인상적이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삼촌의 더러운 욕망에 희생되는 어린 왕세자 에드워드와 요크 공의 흐느낌이 가녀린 현의 선율과 플룻의 공명으로 런던탑을 울리는 듯하다.
루이스 아펠바움은 캐나다의 작곡가로 연극 상연을 위한 극부수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는1953년에 열린 캐나다의 스트랫포드 페스티벌에서 상연될 리처드 3세의 공연 음악으로 5곡의 모음곡을 작곡했는데, 이 중 팡파레는 축제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매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5. 헨리 8세
거의 무명에 가까운 영국 작곡가 아서 설리반이 1877년에 로열 맨체스터 극단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헨리 8세 모음곡’이 있다. March, King Henry’s Song, Graceful Dance, Water Music 4곡으로 이루어진 이 모음곡은 실제 원작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부분만을 골라 음악화 한 것으로 실제 연극 공연 시 음악을 삽입하기에 아주 용이하게 되어 있다. 음악적으로 큰 가치가 있지는 않지만, 당시 궁정의 팡파레, 무도회, 야외 연회용 음악을 복원 및 모사한 것이 흥미롭다.
Orpheus with his lute made trees, / and the mountain-tops that freeze, / bow themselves, when he did sing:
To his music, plants and flowers / ever sprung; as sun and showers / there had made a lasting spring.
Everything that heard him play, / even the billows of the sea, / hung their heads, and then lay by.
In sweet music is such art: / Killing care and grief of heart / fall asleep, or, hearing, die.
오르페우스가 류트를 연주하면 나무와, 얼어붙은 산꼭대기, 절을 했네 그가 정말 노래를 부를 때면.
그의 음악에 풀과 꽃들이 늘 솟아났네, 마치 태양과 소낙비가 거기 마르지 않는 샘 만든 것처럼.
그의 연주를 들은 만물은, 심지어 바다의 큰 파도조차, 머리를 숙이고, 조용해졌네.
달콤한 음악 속에는 그런 기술이 있어 없애 주네 마음의 근심과 슬픔을 잠재우거나, 아니면 사라지게 하네.
– King Henry VIII; Act 3 Scene 1
헨리 8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 당한 캐서린 왕비의 슬픈 마음은 이를 위로하려는 시녀의 노래로 표현된다. 3막 1장의 이 아름다운 운문은 두 명의 작곡가에 의해 성악형식으로 만들어 졌다.
스웨덴의 현대작곡가 스벤 하빌이 1953년에 혼성합창을 위해 작곡한 ‘Orpheus with his lute’는 엄숙하고 신비로운 미사 분위기를 낸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여러 겹의 공명은 슬픔 마저 증발되어 완전히 텅 비어 버린 캐서린 왕비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카스텔누에보 테데스코 역시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소프라노와 피아노 반주를 위한 가곡을 작곡했다. 오르페우스의 류트 소리를 흉내 내는 피아노의 반주를 타고 소프라노의 잔잔한 애가가 부질없는 슬픔을 흘려낸다.
* 다음 편부터는 ‘뮤즈를 울린 극작가 – 셰익스피어’ 제 6편 ‘희극’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 원문은 Stanley Wells, Gary Taylor의 ‘William Shakespeare The Complete Works Second Edition’ (Oxford), 번역본은 김정환 번역의 ‘셰익스피어 전집’(아침이슬)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임야비(tristan-1@daum.net)
–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