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00년 후의 꿈을 묻는다

윤진현

인천 시립예술단 합동공연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

작 : 차원이

작곡 : 장영규·김선·배승혜

연출 : 강량원

예술감독 : 이병욱, 김종현, 윤성주, 강량원

단체 : 인천시립예술단

공연일시 : 2019/03/01 15:00~2019/03/03 15:00

공연장소 :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관극일시 2019/03/01 15:00

 

인천 시립예술단 합동공연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

극단, 합창단, 교향악단, 무용단 등 4개 단체의 협력경험 중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건국 시기를 놓고 논란이 있던 끝이라 더욱 감개무량하다. 각 지방마다 만세운동 재현행사도 많고 기념공연도 많았다. 각 지역에서 어떤 공연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다만 올해는 관 주도거나 관변행사로 비교적 단기간에 기획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는 3·1운동의 본령을 상기하여 민간주도를 원칙으로 삼고 충분히 시간을 갖고 준비되어 명실상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민주주의를 제고하는 진짜 축제가 될 수 있기 바란다.

 

인천에서는 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 시립무용단, 시립극단 등 4개 시립예술단 15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합동공연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 공연되었다. 인천에서는 이러한 시립예술단의 합동공연은 2004년 <심청왕후>, 2007년 <바다의 문>에 이어 세 번째이다. <심청왕후>는 잘 알려져 있는 「심청전」 소재 작품인 데다 새로운 시도여서 비교적 호평을 받았었지만 <바다의 문>은 당시 TV드라마 <주몽>에서 주목 받은 ‘소서노’ 캐릭터에 편승하여 ‘비류백제’를 과장한 허술한 작품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이번 작품에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다.

 

개별 단체의 역량은 물론 대단하다. 인천시립합창단, 교향악단, 무용단 등은 내외에서 상당한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개성 강한 각 단체의 예술감독의 성향이 단기간에 미적인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 극적 중심이 될 시립극단의 주도성이 확실히 보장될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뮤지컬 또는 음악극은 극적 기반 위에서 축조되어야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지원을 받는 음악극 공연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상상하게 되지만 이것은 생각처럼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뮤지컬 또는 음악극은 명백한 극적 기반 위에서 축조되어야 한다. 극적 상황을 해석하는 음악적, 신체적 해석이 극적으로 얼마나 설득력을 갖고 구성되는가가 성패의 관건이다. 이는 합창이나 교향악 연주에서 근간으로 삼는 음악적 전개의 긴장과는 비슷해도 다소 차이가 있기에 내부적으로 충분히 합의를 하고 결과물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결과는 우려대로였다. 스토리의 전개 또는 극적 발전보다는 독립된 각 장면의 이어 놓은 데 불과하였고 무용단과 합창단의 가수, 연극배우로 3분되어 표현된 연기는 충분히 어울리지 않았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숭고한 감정에 치중하여 전반적으로 부담스럽고 강압적이었다. 단순히 장엄한 음악으로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것으로 위대함에 공감하게 되지는 않는다. 공연을 통해서 인물을 이해하면서 역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그 인간적 발전과정을 전제로 한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하란사는 스스로 사용한 이름, 후세에 임의로 김란사로 바꿔서야..

 

더욱이 이번 작품은 근대 초기 여성 선구자 ‘하란사’의 활동을 소재로 삼고 있었다. 처음 ‘김란사’를 다루는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누구인가 의아했었다. 알고 보니 ‘하란사’. 본 성(姓)이 ‘김씨’였던 그녀가 ‘란사(낸시)’라는 이름과 함께 남편 하상기의 성을 따서 ‘하란사’로 활동했던 것은 근대 초기와 일제 초반까지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의 관습을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고 친가에서는 출가외인으로, 시가에서는 타성받이로 제대로 된 소속처가 부재하던 여성들이 자신의 공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시기의 방편이기도 했다. 하란사의 가문에서 ‘김란사’로 독립유공자를 신청하고 사회적으로 본 성이 김씨였음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하란사’ 자신이 ‘하란사’로 이름을 정하고 활동했던 것을 후세에 자의로 ‘김란사’로 바꿀 수는 없다. 가까운 예로 우리가 작가 ‘이상’의 본명이 ‘김해경’이란 것을 알아둘 뿐 ‘이상’을 ‘김해경’으로 바꿔 부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하란사 생애의 중요한 장면을 나열하기보다는 그녀의 인간적 성장과 고뇌, 결단과 의욕의 과정을 오히려 극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다만 지역색을 협애하게 해석하기 쉬운 데 비해 인천과 대단한 연관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개항장 인천의 성격을 인물의 성격과 연동하여 ‘하란사’에 주목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한 개방성은 오늘날의 인천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자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또한 이번에는 다소 미흡한 결과라 해도 이렇듯 시립예술단의 협력으로 새로운 공연을 선보인다는 발상은 여전히 유용하고 의미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2007년 이후로 중단되지 않고 이러한 합동공연이 계속되었던들 오늘의 공연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1919년 100년 후의 꿈을 우리가 넉넉히 달성했다고 보기는 부끄러운 점이 적지 않지만 2019년 다시 100년 후 꿈이 어떤 것인가는 지금 시작해야 할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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