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의 일>: 밑 빠진 독은 채울 수 없다

백승무(연극평론가)

<달걀의 일>(안정민 작·연출)은 주인공 민채가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을 통해 희생자에서 주체로, 서사 연구자에서 서사 수행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이다. 민채가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 사건의 주체가 되어 가해자를 지목/직시하고 그 범죄의 위악성을 폭로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여성서사의 주도적 수행자로 변신(을 암시)하는 대목은 작품의 핵심적 서사점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경락과도 같은 이 서사적 매듭들이 과연 제 위치에 정렬하고 있는가?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민채는 잃어버린 기억을 어떻게 회복하는가? 작가는 ‘담벼락 사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성폭력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 사건의 내막이 낱낱이 공개될 필요는 없다. 피해자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는바, 그런 취지를 희곡의 작법에 적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민채가 기억을 회복하는 사건은 서사 전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논리요소이다. 없던 게 생겨났는데 관객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의 ‘전시’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 대안이 폭력과 관련된 인접 사실을 희곡에서 통째로 제거하는 건 아니다. 필요 이상의 과도함, 필연성을 무시한 사실성, ‘적시적소’의 위반, 배려 없는 개연성은 무대 위 나쁜 폭력의 잣대이다. 그 잣대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민채의 변화는 관객이 인지해야 한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교장실 장면과 은서네 장면은 어떤 서사적 기능을 하는가? 교장과의 대화는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을 폭로하고, 은서네 방문은 초등학교 방송반의 추억을 회고한다. 20분을 훌쩍 넘기는 이 두 장면은 인물의 성격 스케치와 사건 전사 설명에 할애될 뿐, 서사적 기능은 미약하다. 은서네 장면 말미에 잠깐 비밀(?)이 누설될 뻔한 순간이 있지만, 별다른 강조점 없이 지나간다. 암시도, 실마리도 부족하다. 에피소드 곳곳에 배치된 작은 실마리들은 나중에 비밀의 실체가 밝혀졌을 때 극의 짜임새를 풍요롭게 하는 좋은 미끼가 된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장롱을 뒤진 민채는 혁필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요요를 발견한다. 그리고 혁필과의 두 번째 만남. 민채는 기억을 회복한 걸까? 말로는 다 안다고 얘기하지만, 모르면서 떠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은서네 장면에서 민채는 분명 담벼락 사건을 기억 못 하고 있었고, 희철도 혁필에게 민채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장담했다. 과연 민채는 ‘그 사건’의 기억을 회복한 것인가, 아닌가? 20년 넘게 잊혀진 기억이 순식간에 복원될 수 있는 것인가? 기억이 상실될 정도로 고통스러운 사건이 새로이 떠올랐는데, 민채는 왜 저럴까? ‘피해자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억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관객과 공유해야 한다. 연극은 부득이하게 관객의 이해도뿐만 아니라 감정과도 일정 정도 동행해야 한다. 저런 태도도 가능하다는 게 개연성이고, 혁필이 하듯이 물이라고 끼얹어야 하는 게 필연성이다. 가능은 하지만 가능성이 희귀한 개연성은 ‘우연’이 되기 쉽다. 반면, 필연성을 배척한 서사는 동력을 상실하고 무너지기 쉽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필연성을 뒤엎는 서사가 합법화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반전이다. 할머니의 집. 민채는 ‘그 사건’ 때문에 할머니와 크게 다투고, ‘느닷없이’ 칼을 들고 할머니를 죽인다. 죽일 정도로 밉다인지, 미워서 죽였다인지 불확실하다. 할머니가 멀쩡한 몸으로 가벼움을 말하는 걸 보니 이 장면은 판타지임이 분명한데, 죽음 자체가 판타지인지, 죽은 이후가 판타지인지 모호하다. 실제로 죽었는데 환영이 나타난 거라면 민채는 가부장제의 폐습에서 할머니를 ‘식칼’로 구원한 것이고(여성 구원자가 탄생한 것이다), 살인 자체부터 민채의 판타지라면, 이도 저도 아닌 이 모호한 결말은 무책임하다. 가해자와 가해사실을 무대에 노출시켜놓고 뜬금없이 할머니를 죽이는 판타지는 뭐란 말인가.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할머니 ‘살해의식’은 서사 연구자 민채가 자신이 탐구하던 여성서사의 수행자로 변신하는 입문 절차일 수도 있다. ‘읽다’가 아니라, ‘하다’의 주어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혁필을 놔두고 왜 할머니인가? 민채의 살해행위는 여신설화의 후속편을 개시하는 복수전인가? 오랜 잠(가사죽음)에서 깨어난 영웅은 호가호위하던 부하를 처단하고 적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이런 해석은 수많은 남성서사의 뻔한 공식이라서 ‘여성서사’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달걀의 일>은 여신이 주인공인 여성서사를 다루는가, 아니면 공백과 짐작이 무성한 새로운 형태의 서사를 다루는가? 여신과 민채는 미러링(무의식적 모방) 관계에 있는가? 여신설화는 그저 소재에 불과한가, 민채의 행위모델인가? 이 서사의 온갖 의문과 불만은 그저 오해와 편견에 불과한가? 혹시 여성서사라는 명패는 작품의 결함과 작가의 오류를 그럴듯하게 은폐하는 포장지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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