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말고 키스

일시: 2021.3.5.~3.21.

장소: 연우소극장

주최: 극단 백수광부

연출: 이해성(<물음의 키스>), 류주연(<나와의 키스>), 홍경숙(<그리고—키스>)

윤서현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한 극단 백수광부가 극작가 윤영선의 대표작 <키스>를 세 가지 버전으로 무대화하였다. 언어로 매개된 인간관계의 한계와 본원적 고독의 문제를 다룬 2인극이 동시대 관객들에게 어떤 방식과 이미지로 주제의식을 전달할지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연극의 문을 연 작품은 이해성 연출의 <물음의 키스>였다. 공연은 원작의 텍스트를 대부분 그대로 살려 ‘여기’ 있는 ‘나’와 ‘거기’ 있는 ‘너’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간결하고 세련된 연출,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사랑이 식은 남자와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로 다분히 고정되어 있던 원작의 구조는 각 장마다 네 명의 배우(김민선, 김두은, 이정현, 이유정) 중 두 명씩이 성별 상관없이 남자와 여자를 연기하도록 현대화되었는데, 여자를 연기했던 배우가 연이어 남자를 연기하거나 남자를 연기했던 배우가 연이어 여자를 연기하는 장면들을 통해 인간관계의 상대적 속성이 더욱 효과적으로 제시되었다. 연출은 여기에 음성언어뿐만이 아니라 수화까지 포함시킴으로써 관계맺음을 위한 시도의 양상을 확장시켰다. 말이든, 몸짓이든, 시선이든, 다른 무엇을 통해서든, 나는 네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항상 허기지다.

짧게 치고받는 대사 하나하나는 상대를 향한 비수가 되고 애원이 된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그들이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둘 사이의 간극은 깊어져만 간다. 남녀는 결국 서로를 “입!”으로 단속하며 말을 멈추기로 한다. 침묵하게 된 남녀는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간다.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무대가 어두워지면서 둘의 입술이 가까워진다. 한편으로 관객들은, 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택했지만 언어로 인해 더욱 외로워진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으며, 또 더 가깝게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추억들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다. 말보다는 키스가 더 필요했었던 시간들, 말에 매달려 더 중요한 것들을 깨닫지 못했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갔으리라.

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두 번째 작품인 류주연 연출의 <나와의 키스>는 원작의 주제를 매우 독창적으로 변용한 경우였다. 이것은 나와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분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연출은 이를 위해 직접 무대에서 연기하는 한 명의 배우 말고도 동일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상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 작품은 1인극이면서도 2인극인 작품이 되었다.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트렁크를 끌고 나온 무대 위의 인물(송명기 분)은 그 안에서 인형이나 장난감 총을 꺼내 혼자 놀기도 하고 여러 개의 넥타이를 찾아 한꺼번에 목에 걸기도 해보는 등 불규칙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에 반해 영상 속의 인물은 무대 위 인물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정시 기상, 정시 출근, 정시 취침.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그의 모습을 배경으로 타이프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사내 옥상에서 동료들과의 간단한 커피타임 이후 업무는 계속된다. 무대 위의 나와 영상 속의 나는 단순히 취업 전의 나와 취업 후의 내가 각각의 상황에서 느끼는 결핍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사이에서의 분열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원작 대사는 생략되었지만 무대 위의 나와 영상 속의 나는 가끔 대사를 주고받는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 ‘키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의 쓸모,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회에 진입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란 쉽지 않다. 매일의 쳇바퀴 같은 삶이 영상 속 인물을 무디게 하지만 화장실에서 홀로 거울을 들여다 볼 때나 밤에 잠들기 전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분열을 느낀다. 무료하고 때로는 초조해 보이는 무대의 인물과 영혼 없는 지친 표정의 영상 속 인물을 번갈아보다가 문득, 어쩌면 현대인에게 분열이란 그가 존재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세 번째 작품인 홍경숙 연출의 <그리고—키스>는 효과적인 소품 활용이 눈에 띄는 작품으로, 타인과의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풍경을 짜임새 있는 움직임으로 표현해내었다. 무대가 밝아지면 세탁기 한 대와 서로 잔뜩 얽힌 세탁 배수호스 뭉치가 무대 구석에 설치된다. 무대는 그대로 코인빨래방이 된다. 무려 여덟 명의 젊은 배우들(문법준, 전주영, 권다솔, 김혜영, 구송미, 한정후, 신주호, 신대철)이 느릿한 동작으로 서로 그저 스쳐지나가는 가운데 철제 운반기를 끄는 중년의 남성(임태산 분)이 이들 사이로 등장한다. 그의 운반기에는 역시 중년의 여성(정은경 분)이 앉아 희곡 <키스>의 일부를 읽고 있다. 차갑게 서로 스쳐지나갈 뿐인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 서로를 상냥하게 바라보는 중년 인물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주제를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후 연이어지는 배우들의 열정적 움직임과 흥미로운 소품 도입은 이러한 단점을 희석시킨다.

젊은 배우들은 이제 한 명 혹은 두 명씩 등장하면서 외로운 삶을 표현한다. 특히 인간이 아닌 세탁기에 애착을 느낀 한 인물(신대철 분)이 그 내부부품들을 본체에서 분리하여 손에 쥔 채 춤을 추거나 자기 옷을 걸쳐 입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인물은 급기야 세탁기의 텅 빈 본체 속에 들어앉는다. 세탁기 속에 태아처럼 웅크린 인물이 탯줄 같은 세탁기 배수호스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퇴행. 제자리돌기 중인 드럼세탁기는 타인의 틈입을 막은 채 안전지대를 선택한 현대인 그 자체이다.

작품의 후반. 한꺼번에 무대에 등장한 배우들이 회색과 주황색으로 엉켜있던 세탁기 배수호수 뭉치 중 한 호스 끝에 달린 마이크에 달려든다. 발언하고 있는 이의 마이크를 막무가내로 가로채가며 여덟 명의 배우들이 난투를 벌인다. 곧 마이크 달린 호스가 인물들의 숫자만큼 많아지고 이들은 더 이상 난투조차 벌이지 않아도 되게 된다. 각자의 발언들이 각자의 채널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온다. 호스다발에 다 같이 몸이 엉켜있는 처지이면서도 그저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아비규환이다.

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이윽고 예의 그 운반기와 함께 다시 등장한 중년 남녀가 작품의 피날레를 준비하듯 원작의 일부를 연기한다. 그러자 마치 윤영선의 <키스>가 여덟 명의 배우들에게 마법이라도 건 듯 젊은이들은 서로를 향하기 시작한다. 첫 장면과 같은 코인빨래방에서의 무심한 스침이 아니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들이 서로를 감싸듯 스친다.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무대. 한두 명씩의 배우들이 천천히 여운을 남기며 퇴장하고 작품은 막을 내린다.

젊은 관객들이 대부분인 공연의 피날레. 첫 줄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관객이 눈물을 훔치는 것이 보였다. 1997년 작 <키스>가 2021년의 청년들에게 키스한 것이다. 공연은 마지막까지 주제에 충실했다. 무대 인사가 아닌 영상으로 제시된 커튼콜이 관객들의 ‘여기’ 있음과 배우들의 ‘거기’ 있음을,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우리의 서글픈 처지를 강조한다. 평면 속에서 손을 흔드는 배우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고 난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더 기다렸지만 무대 위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관객석에 앉아서 배우들을 그리워했다.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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