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듣는 연극
임야비
우리에게 감각적인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의 덩어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이미지 덩어리는 인식적인 층위에 속하는 것으로, 글이나 연극 또는 그림이나 음악으로도 전체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어떠한 플라즈마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이미지 덩어리를 추출하고 가공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예술적 창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한다. 이 이미지 덩어리는 예술가가 표현하는 수단에 따라 시나 소설이 될 수도 있고,미술 이나 건축 작품 또는 연극이나 음악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로 온전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 ‘환희’라는 이미지 덩어리로부터 시인은 송가를 읊을 수 있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풀어 쓸 수 있으며, 화가는 밝고 생기 넘치는 터치의 작품을 그릴 수 있고, 극작가는 멋진 결말을 가진 연극을 구상할 수 있으며, 작곡가는 감동이 넘쳐 흐르는 웅장한 사운드를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이미지’로부터 ‘구체적인 예술 작품’의 창작이라는 개념적인 도식에 연극과 음악을 대입해 보자.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추출되어 창작된 극작가의 연극(또는 희곡)이 작곡가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음악 작품이 만들어진 경우를 분석해 보자. 작곡가는 극작가가 창조해낸 연극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같은 창작자로서 극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의 원재료가 된 ‘이미지 덩어리’를 감지했을 것이다.
연재의 첫 시리즈는 ‘뮤즈를 울린 극작가 – 셰익스피어’로 정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후대의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워낙에 많은데다가 400년을 거치며 각 작품에 붙인 음악들 또한 그 수가 방대하다. 그래서 1623년에 출간된 ‘퍼스트 폴리오’ 분류에 따라 비극 – 사극 –희극 순서대로 하나씩 짚어 보기로 하자. 시리즈의 첫 편은 그의 최대 히트작인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뮤즈를 울린 극작가
셰익스피어
1.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하지만 역사상 가장 많이 음악화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의 비극성’이라는 이미지에 천착한 이 전대미문의 히트작에 수많은 작곡가들이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음악의 공통점은 ‘사랑’이라는‘밝고 아름다운 주제’와 ‘죽음’이라는 ‘어둡고 격렬한 주제’가 연극처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사랑과 죽음의 대비가 극단적이면 극단적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주 연주된다.
가장 성공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공교롭게도 두 러시아 작곡가에 의해서 작곡되었는데, 하나는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음악과 발레로 표현한 프로코피에프의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의 사랑과 죽음의 비극적 이미지를 음악화한 차이콥스키의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프로코피에프가 1935년에 쓴 발레 음악으로 원곡은 발레 장면에 맞추어 진행되는 약 2시간에 이르는 무용음악이다.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선율과 무용을 염두한 듯한 박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발레 없이 음악 단독으로도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특히 서곡에 해당하는 Introduction, 기사들의 춤, 머쿠쇼Mercutio는 마치 연극 무대를 오선지에 옮겨 놓은 듯한 청각적 즐거움은 선사해 준다.
차이콥스키는 프로코피에프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극을 음악화 했다. 오케스트라 음향만으로 극이 갖는 이미지를 음화한 것이다. 1869년에 완성된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소나타 형식으로 로렌스 신부를 상징하는 서주, 두 가문의 격한 대립을 표현하는 빠른 템포의 제 1주제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애틋하고 아름다운 제 2주제로 이루어진 약 20분의 관현악 곡이다. 차이콥스키 특유의 귀에 착착 감기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연주 내내 팽팽하게 유지되는 긴장감을 통해 높은 음악성과 깊은 문학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거머쥔 명곡 중에 명곡이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초기 낭만주의의 주된 특징인 ‘광기와 과대망상’을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격렬한 비극에 쏟아 부었다. 1839년에 파가니니의 지원을 받아 작곡된 이 곡의 정식 명칭은 ‘로미오와 줄리엣, 합창, 독창 빛 합창에 의한 레시타티보의 프롤로그가 붙은 극적 교향곡(Symphonie dramatique)’이다. 곡의 진행은 대체로 극의 진행과 유사하나 거의 대부분이 음악적 소묘로 처리되어 있어서 오페라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사상을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인원 200명에 연주시간 100분이라는 부담스러운 외형 때문에 자주 연주되지 못한 다는 점이 못내 아쉬운 작품이다.
이외에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가 1830년에 ‘캐퓰렛과 몬테규’를 작곡 했고,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가 1867년에 작곡한 5막짜리 그랜드 오페라’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지만 몇몇 유명한 아리아를 제외하고는 전곡으로 연주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음반으로 조차 접해보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 다음 호에는 ‘뮤즈를 울린 극작가 – 셰익스피어’ 비극 2편으로 ‘햄릿’과 ‘오셀로’가 연재됩니다.
임야비(tristan-1@daum.net)
–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