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밀양연극제에서 만난 두 편의 연극
밀양연극촌은 1999년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밀양연극제는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극쟁이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연극을 만들게 되었고, 작품이 있으니 당연히 구경꾼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게 축제의 시작이다. 즉 연극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판을 벌인 것이 오늘의 축제로 진화한 것이다.
축제가 너무 많다고들 지적한다.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우리 국민이 잠시나마 여유를 갖고 즐길 수 있는 일로 축제가 많아서 나쁠 게 없다. 그런데도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축제다운 축제, 그러니까 참여하는 이들 모두에게 즐겁고 유익한 좋은 축제가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축제란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신명나는 축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밀양연극제는 처음부터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연극인들이 연극만 하겠다고 시골 폐교로 들어왔다. 도시에서 고단하게 삶을 유지하느라 낭비되던 에너지가 이제 작품 생산에 집중된다. 관객이 많든 적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작품만 만들면 된다. 저절로 신명이 난다. 그 신명을 보러 사람들이 모인다. 더 신명이 난다. 관객들이 열광하고 배우들은 더 신나고 그렇게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이른바 선순환구조가 자리 잡는다.
밀양연극제의 장점은 하는 이들의 신명이다. 신명은 기적을 만드는 묘약이다. 어느 공연팀이 새벽부터 야외극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 슬쩍 들어가 보니 아는 연출자이다. 인사를 했다. “연극인들 게으르다고 욕 많이 했는데, 이젠 아닌가 봐요. 이렇게 일찍부터 연습을 하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기획자가 끼어들며 대답한다. “그게 아니고, 어제 밤부터 한 거예요. 다들 한 숨도 안 잤어요.” 수십 명의 배우와 스태프가 밤을 꼴딱 새우고도 힘들단 소리 한 마디 없이 오로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몰입하는 그 힘은 특별한 신명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하는 일과 신나서 하는 일은 다르다. 누군가 신이 나면 그 힘은 주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밀양연극촌과 밀양연극제가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고 그 생명력을 나눠 갖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신명이 뿜어내는 향기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그래서 특별히 홍보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신명을 만들고 그런 순환에 힘입어 축제는 계속 진화한다.
언젠가 밀양연극제 개막식에 참여했던 일이 생각난다. 늘 그렇듯 그런 행사에는 지역 유지나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모두 객석에 섞여 앉아 있다. 그리고 밀양시장 등 극히 일부를 소개하는데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머리 숙이는 정도 이상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밀양시로서는 섭섭하게 느낄 법도 하건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한 결과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공을 훨씬 빛나도록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축제의 원동력은 신명이고, 주인공은 그 신명을 즐기는 연극인과 관객이다. 그 핵심과 주인공이 제대로 결합하면 거기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 굳이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지 않더라도 그 에너지의 가치는 대단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결합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그 성공을 지켜보는 것 이상 보람차고 기쁜 일은 없다. 적어도 밀양의 유지와 공무원, 정치인들은 그 기쁨을 경험했고 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된 것이다.
몇 년 만에 밀양연극제를 보러 갔다. 어느 정도 얘기로 알고는 있었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우선 옛 학교 교사를 개조해 쓰던 중앙 건물을 번듯하게 새로 지었고, 또 그 건물 정면을 배경 삼아 ‘성벽극장’이라는 야외극장을 만들어 놓았다. 또 여러 극장들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완된 것은 물론이고, 북 카페까지 있는 안내소, 자료관, 숙소, 화장실 등 모두 깨끗하고 쾌적하게 변했다.
게다가 정말 놀랍게도 그렇게 기승을 떨던 모기떼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유를 물었더니 연극촌 앞에 대규모로 연을 심어서 그렇단다. 나름의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모기 유충을 잡아먹는 생물들이 서식하게 되는 원리라는데 그러고 보니 과거 꼬불꼬불 논이 있던 자리가 엄청난 수의 연꽃으로 덮여 있었다.
연극촌에 도착한 뒤 ‘젊은 연출가전’ 심사를 하느라 열흘 이상 머물고 있는 동료 연극인들을 만났다. 얼마 전 서울에서도 보았건만 반색을 하며 방으로 이끈다. 차도 마시고 과일 대접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렇게 일정 기간 뚝 떨어져 연극만 보며 지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년엔 나도 한 번 심사위원을 해볼까?” 하는 말이 튀어나왔고, 결국 이게 주최 측에 전달되어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굳이 번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대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오후 4시 공연을 보러 나섰다. 극단 하땅세의 윤시중 연출 <붓바람>이란 작품이었다. 얼핏 아동극이란 이야기가 들렸지만 극단이나 연출의 성격상 분명 어른들한테도 뭔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더웠다. 그래서 이 더위에 여기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부모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극장 앞에는 많은 아이들과 거의 같은 수의 어른들이 있었다.
관객 입장이 끝나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백지 위에 배우들이 그림을 그린다. 부처님 같은 형상을 그리더니 붓으로 코를 간질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코가 벌름거린다. 곧 재채기를 할 것 같은 그 모습에 다들 박장대소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관객들은 처음부터 쉽게 마음을 열어젖힌다.
내용은 단순하다. 대성이란 아이가 동생이 갖고 싶다고 조르고, 그 말은 들은 할머니가 어느 산 속 깊은 곳에 사는 동자 셋이 있는데 그들을 웃기면 엄마가 동생을 낳을 거라고 일러주고, 그러자 달봉이라는 강아지와 함께 일종의 모험 여행을 떠나고, 그래서 결국 뜻을 이루기는 하는데, 엄마가 세쌍둥이 동생을 낳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무엇보다도 모험 여행을 하며 만나는 사물들을 대부분 즉석 그림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붓이나 롤러를 가지고 백색이나 옅은 갈색 종이 위에 짧은 시간 동안에 만들어내는 커다란 그림들은 그 자체로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집도 되고 나무도 되고 고개도 되고 심지어 그 고개를 오르는 자전거도 되는 이 놀이는 단순하지만 깔끔한 배우들의 동작과 상상력 넘치는 관객들이 합작으로 이루는 마술이었다.
언덕 아래 작은 집에 불이 켜지고 꼬마 자전거가 실제로 움직이는 기술에 관객들은 탄성을 내뱉는다. 사실 기술적으로 보면 별게 아니건만 워낙 처음부터 모든 걸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하는 데 익숙해진 관객들은 그 정도 기술의 첨가에도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과 함께 여행을 해서 산 속 동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 전통가면극 중 사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비록 커다란 탈을 썼지만 관객들은 모두 그 안에 배우들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가까이 오면 무서운 척도 하고 비명도 지른다. 이른바 놀이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 배우들은 또 하나의 놀이를 제공한다. 엄청나게 커다란 공을 관객석으로 밀어 넣는다. 자기 앞으로 오는 공을 힘껏 당겨 뒤로 넘기는 것이다. 그런데 공이 너무 커서 만만치가 않다. 경사진 객석을 오르던 공이 무대로 굴러 내려가면 배우들이 다시 객석으로 그것을 밀어 올린다. 그렇게 모두 힘을 합쳐 커다란 공을 객석 끝까지 이르도록 한다. 그 단순한 놀이가 또 하나의 카타르시스를 형성한다.
<붓바람>의 이야기 구조는 허술하다. 소위 극적인 사건도 없다. 이 작품이 갖는 약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즉 오즈의 나라를 모험하는 도로시 일행이나 부모를 위해 목숨 건 여행을 하는 바리공주와 비교한다면 대성이가 겪는 일은 결코 위험하지도 않고 밀도도 너무 낮아 싱겁기까지 하다.
물론 관객들은 불만을 품진 않았지만 나는 공연을 보며 내내 궁금하였고, 그래서 공연 후 저녁 때 이루어진 대화 자리에서 연출에게 집중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 질문하였다. 대답은 명쾌했다. 너무 쉽게 가기 싫다는 것이다. 즉 단순한 것으로도 능히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인 뒤 이야기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이야기였다.
속으로 역시 그렇구나 하면서도 어쩌나 보려고 한 마디 슬쩍 던져 보았다. “그렇게 내공 쌓이기를 기다리다가 관객들이 재미없어 하고 그래서 배우들 맥 빠지고 그래 결국 지쳐서 포기하게 되면 어떡하죠? 오늘 관객들이야 워낙 호의적으로 마음을 열어 줬으니까 별 문제 없었지만요.” 그러자 웃으며 답한다. “버텨야죠. 우리가 하땅세 아닙니까? 하늘부터 땅 끝까지 세게 간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세상을 살펴본다 아니고요?”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 작업 정신은 세게 가는 거거든요.”
대화는 원래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서 끝났다. 다음 공연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마무리할 정도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겸손하면서도 당차게 자신의 연극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우리 연극의 앞날이 결코 어둡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사람이 가득하다. 밤 10시에 밀양 시내도 아닌 여기 어떻게 이런 인파가 모일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성벽극장은 객석이 1,000석쯤 돼보였다. 그런데 관객이 끝없이 들어온다. 결국 앞에 종이를 깔고 사람들을 앉히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밤에 멀리서 연극을 보자고 온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돌아가라 하겠는가.
작품은 <탈선 춘향전>이었다. 그냥 <춘향전>이 아니고 앞에 ‘탈선’ 자가 붙은 게 좀 색다르긴 하지만 내용 다 아는 성춘향과 이몽룡 보자고 이렇게 모이다니 정말 평소 볼거리 즐길 거리가 없나 보구나 생각하면서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공연 전 사회를 맡은 배우 명계남이 관객들에게 묻는다. “밀양에서 오신 분!” 그러자 반쯤 손을 든다. 그리고는 또 묻는다. “밀양 밖에서 오신 분!” 그러자 역시 반쯤 손을 든다. “자, 밀양 시민 여러분, 밖에서 오신 손님들께 환영의 박수 부탁합니다.” 이쯤 되니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 더운 여름 멀리서 이 늦은 시간에 식구들 대동하고 올 정도라면 분명 뭔가 있겠구나.”
시끌벅적한 가운데 연극이 시작되었다. 우선 방자가 나왔다. 그런데 남장 여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자가 실제로 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었다. 아마도 이 작품을 연출한 이윤택은 소리도 할 줄 알고 즉흥에도 뛰어나며 아무리 많은 관객이라도 능히 손아귀에 넣고 흔들 수 있는 그런 배우를 원했을 것이다. 배우의 성별보다는 그것이 배우 선택의 원칙이었을 것이고 거기 더해 성별 바꿈이 주는 특별한 재미에 주목했을 것이다.
어쨌든 방자는 처음부터 관객석을 뒤흔들어 놓았다. 소리면 소리 재담이면 재담 관객들은 그(그녀?)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영낙없이 크게 반응하였다. 심지어 중간에 막걸리를 돌리는 부분에서는 여기저기 벌떡 일어나 자기한테 와달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관객들이 있는가 하면 방자의 지시에 따라 안주를 들고 그 넓은 객석을 함께 뛰어다니는 중년의 여성 관객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배우 한 명에 의해 수많은 관객이 ‘탈선’하는 기이한 현장의 목격이었다.
그런데 내용도 역시 ‘탈선’이었다. 물론 줄거리는 그대로였지만 이몽룡은 바람둥이고 춘향이는 욕쟁이며 변학도는 세상물정 모르고 공부만 하다 뒤늦게 달콤한 타락의 길로 접어든 줏대 없는 인사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춘향이의 입에서 쏟아지는 육두문자는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연출자의 말을 들으니 이게 원래 1949년 이주홍의 작품인데 그 원작에는 욕이 훨씬 많았지만 젊은 배우들이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대거 삭제했다는 것이었다.
관객들을 다 앉히느라 워낙 늦게 시작하기도 했지만 분위기가 고양된 탓에 배우들의 즉흥적 재담도 많이 늘어난 듯 자정이 넘어서야 공연이 끝났다. 배우들과 사진을 찍느라 수많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는 장면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야외 카페에서 만난 어떤 선배 연출가가 투덜댄다. “거 뻔한 얘길 뭐 그렇게 길게 해? 딱 한 시간이면 되겠더구먼.” 그래 내가 대답했다. “아니죠, 선배님. 저 관객들한테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에요. 이 밤중에 차 끌고 아이들 다 데리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아이들한테도 오늘은 밤 열두 시까지 잠 안자는 날이라 그랬을 거고요. 그런데 그렇게 짧으면 되겠어요. 저 사람들도 내용은 다 알걸요. 다 알면서도 그저 즐겁고 재미있는 거죠. 그러니까 또 뭐 더 없나 하고 자꾸 기다리고요.”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연출가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욕이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걸쭉하니 우리 맛이 나지. 이윤택도 늙었나 봐. 그런 면에선 거침이 없더니 말이야.” 이 말에도 난 또 나섰다. “아니오. 제가 보기엔 이 정도도 아슬아슬했어요. 제 옆의 여자 분은 춘향이 입에서 욕이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자기 아이를 쳐다보던데요. 일반 극장에서 성인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욕이 더 들어가도 좋겠지만 오늘 같이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은 공연에서는 그래도 자제해야죠.” 물론 이 마지막 변론은 앞서 확인했듯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진다. 즉 이윤택은 관객 성분보다는 배우들의 역량을 고려하여 욕을 줄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루 동안 두 작품을 보면서 어느덧 난 밀양연극제의 찬양자가 되어버렸다. 그래 확인도 안 된 논리까지 동원해 가며 남의 작품을 변호해 주는 참으로 드문 행동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역시 평소의 노선을 벗어났으니 이것도 ‘탈선’이구나 생각하며 혼자 웃고 말았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았다. 이 여름 밀양연극제의 밤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탈선시킬 만한 정말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관리들의 축제, 행사를 위한 축제, 신명 없는 축제가 사라지고 이 땅에 정말 축제다운 축제가 많아져서 우리의 삶이 한층 즐겁고 건강해지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