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이 몸으로 쓴 글
<다정도 병인 양하여>(2013.12.06.~12.29. 성기웅 작·연출, 국립극단 소극장 판)
김 향 (연극평론가)
1. 성기웅, 배우가 되어 자신의 연애에 대해 설명하다
극작도 하고 연출도 하고 때론 드라마투르기도 하던 성기웅이 이번엔 연기자가 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실제 연애이야기를 만인에게 고백하는 연기를. 물론 대부분의 성기웅 역할을 이화룡이라는 배우가 연기하긴하지만 연출가 성기웅은 공연 도입부와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도 등장해 자신의 연애담이 재현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그렇다 이번 공연에서도 성기웅은 전작들인 <깃븐 우리 절믄날>(2008)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1일>(2010) 등에서처럼 설명적인 연출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이나 시대적인 언어나 상황 또는 등장인물에 대해 ‘설명하기’, ‘인용하기’ 그리고 ‘희곡을 낭독하기’ 등을 통해 자신이 ‘다정’이라는 인물과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20세기 초 식민시기의 역사적인 문인들이 아닌 동시대에 살고 있는 성기웅과 그 외 실제 연기자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연애 이야기가 참으로 실제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현실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실주의적인 미장센과는 정반대로 무대 주변에 들고나는 소품들이 마련되어 있고 배우들 역시 관객의 역할을 오가며 무대를 바라보거나 때로 낭독공연 방식이 연출되었음에도불구하고말이다. 배우가 실제로 경험한 연애 이야기를 실명의 배우들이 출연해 연기하는 방식은 ‘그럴 듯함’이라는 사실적 연극성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듯했다. 그런데 실제로 관객들이 ‘그럴 듯함’을 경험하는 이유는 대본 지문에서 드러나듯이 “**출연자들이 실명으로 출연한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현실 그대로의 인물일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 관객들이 출연자와 그들이 자신의 실명으로 나오는 극중 인물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간주하게 되기를 바란다”(대본 2쪽)라는 연출 방향 때문이라 생각된다. 성기웅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실명으로 등장하여 ‘실제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허구적인 이야기를, 무대 위에 있는 듯하면서도 객석에 있는 듯이’ 그 경계에서 연기했던 것이 오히려 더 관객들에게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거짓이 섞여 있다 해도 성기웅이 실제로 겪은 연애이야기는 분명히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그 연애 경험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그렇고 그런 얘기가 아닌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는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 사랑’ 즉 ‘폴리 아모르(polyamory)’에 대한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당사자가 성기웅 연출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관심’, 동시대 남녀의 애정 문화,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로까지 관심이 확장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성기웅 연출처럼 주도면밀하고 섬세하고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출 방식’을 지향하는 이가 이야기하는 연애는 분명 ‘연구거리’일 거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극 무대에 서는 성기웅 연출은 배우로서 하나의 몸성을 지니는데, 그 몸성은 배우로 출연하며 쌓여온 것이 아니라 극작 및 연출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동시대 젊은 연극인이자 ‘일반인, 평범한 관객의 몸성’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이 <다정도 병인 양하여> 무대에서 배우로 출연하며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다자간 사랑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식은 성기웅 개인의 사적인 연애담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욕망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사적 연애 고백 행위라 할 수 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의 무대화는 ‘거짓이 뒤섞인 설명적인 연애극’임에도 관객에게 동시대 연애 문화 풍속도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아니 식민시기 이상(李霜), 권영희, 박태원 등의 특별한 문인들만이 벌였던 스캔들이 아니라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도 맺고 있는 ‘다자간 연애’의 본격적인 조명이라고 여겨야 할 듯하다.
공연을 보기 전 성기웅 연출은 “이 공연을 보면 제가 싫어지실 거에요.”라고 말하거나 공연이 끝난 후에는 “제가 혐오스러워보이시죠?”라면서 초연 후 적지 않게 혹평을 받았던 경험을 드러냈다. 물론 그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꽤 재미있게 관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정의 다자간 연애’의 세 번째 애인인 성기웅 역할이 속된 말로 ‘찌질하게’ 구현되고 있고 무엇보다 그 비호감적 면모를 지극히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을 의식한 발언인 듯했다.
나는 이에 대해 ‘첫째, 자기 얘기를 하는 성기웅 연출이 용감하다고 여겨졌고 둘째, 등장인물 선배 A가 혹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고 셋째, 참 재밌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성기웅 연출에게 하지 않은 네 번째 말이 있었다. 성기웅 연출이 연애하는 동안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慾)을 경험하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다는 말은 감춰두었던 것이다. 그가 <햄릿>의 대사를 인용해 다정의 유약함을 비난하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리어왕>)라는 대사를 신경질적으로 읊어댈 때 자기성찰의 고통이 경험되었던 것이다. ‘다자간 연애’를 경험하기 위해 다정과 실제 연애를 하고 그것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또 실연을 통해 무대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성찰적 행위는 성기웅의 인문학적 글쓰기 그리고 ‘희곡 쓰기’에서 ‘배우의 몸 쓰기’로 확장한 글쓰기였다고 여겨졌다.
무대에서 그의 언어는 과장되게 경험되지 않고 다수의 서사적 연출 방식에도 불구하고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연기는 낯설지 않으며 또 한편으로 이러한 극적 행위들은 그 의미가 열려 있는 기표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관객은 공연의 기표들을 고정된 기의로 연결시키지 않고 관객 나름의 개인적인 연애의 기억을 되살리며 열린 의미를 생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기자들의 설명은 다행히도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관객들 개개인의 연애 경험이 섞인 다채로운 의미로 해석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2.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평소에 일부일처제에 불만을 느껴오던 기웅은 우연한 기회에 다정이 여러 명의 남자와 사귀는 다중 연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제안에 따라 다중 연애에 뛰어든다. 모든 연애 과정이 그렇듯이 그들의 초기 연애 상황은 달콤하고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기웅이 다정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는 거리감이 발생한다.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이들의 만남의 횟수가 적어지는 과정에서 기웅은 자신들의 친구들 즉 마두영, 현pd 등과 자신의 다중 연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게 되고 그 가운데 기웅은 다정의 연애편력을 표로 만들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등 지적인 분석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이 다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은 분석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었다. 기웅은 다정과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아이러니하게 그녀의 첫 번째 연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이 시점에서 다정은 또 다른 이와 사랑을 시작하는 등 엇갈린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
성기웅은 다정과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그 특유의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다정에게 빠져들어 혼란스러워 한다면 이에 비해 다정은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감성적인 듯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잘 아는 면모를 보여준다. 연기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다정은 유약한 듯하지만 자신이 의존적인 성격의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감정의 흐름에 충실한 여성이다. 그리고 남자가 리드하는 것에 따라 춤을 춰야 하는 탱고를 좋아하고 삶 자체를 그렇게 사는 여성이다. 그러면서도 다정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반정부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첫 번째 연인 몰래 다수의 남자들과 바람을 피는 용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성기웅 연출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었으며 이후에는 첫 번째 오랜 연인과 이별하고 새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다 결혼까지 하는, 어찌 보면 거침없이 연애를 하며 세상을 사는 여인처럼 보인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만도 다정은 최소 여섯 명의 남자들과 동시에 또는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다중 연애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에서를 보면서 다정이 누구인가, 어떤 성격을 지닌 여자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성기웅을 비롯해 다정을 연기하는 두 명의 여배우는 열심히 다정을 탐구하고 그녀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다정은 연애를 하는 다수의 여성들 중의 한 명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성기웅이 이런 다정을 어느날 불현 듯 특별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밀롱가에서 파트너를 바꿔가며 탱고를 추듯이 이 세상을 밀롱가 삼아 여러 명의 남자를 동시에 또는 바꿔가며 춤을 추는 다정을 보며 성기웅도 어느덧 바람둥이가 되어 간다. 다정과의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 다른 여인들과 원나잇스탠드를 하고 여자 친구를 만들기도 하는 듯 다중 연애에 충실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다정과 연애가 끝난 후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희곡으로 쓰는 성기웅은 결코 아름다운 또는 재미있는 기억을 간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웅은 다중 연애를 원했기에 다중 연애자 다정과의 연애가 재밌는 추억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그 역시 ‘사랑의 아름다운 칼날에 베인 듯한 상처,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는 사랑을 탱고에 비유하며 탱고를 원어인 ‘땅고(tango)’로 부르는 전문 배우에게 전문적인 설명을 하도록 하여 지식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결국 관객은 ‘탱고는 탱고요, 연애는 연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사랑은 때론 정열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여자들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원만한 이해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그래서 결국 쓸쓸할 수밖에 없는 감정’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 명과 다중 연애를 하고 있든 일부일처 관계를 맺고 있든 남자끼리든 여자끼리든 이들이 겪는 사랑의 감정은 어찌 보면 늘 아쉽고 이로 인해 쓸쓸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무대 위 리얼리티, 진실함에 대한 보고서의 의미
철도노조가 파업을 풀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2014년 갑오년(甲午年) 말띠해 첫달에 나는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를 살펴보며 이 작품이 동시대 인간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성기웅 연출이 ‘설명하는 방식의 연출’을 통해 삶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때 <다정도 병인 양하여>가 보여주는 다정과 기웅은 각기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노동자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연애를 하는 중 각기 따로 집회 현장에 가기도 하고 실연을 해서 슬퍼하고 쓸쓸한 사랑의 감정으로 또 다른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나누는 다중 연애는 지극히 사적인 스캔들에 머무는 것이 아닌 억압적인 사회문화의 흐름 속에서 개성적인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다고 여겨진다. 단지 일부일처제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인간 삶을 옥죄고 억압하는, 평등하지 못하고 민주적이지 않은 삶의 현장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는 성기웅 개인의 사적인 연애담을 관객들에게 풀어놓았고 그가 탐구하던 다중연애는 결국 ‘사랑의 쓸쓸함’을 다시 증명한 꼴이 되었지만 이처럼 다양한 사랑 방식의 추구는 현재 불합리한 삶의 현장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새해에 여러분 모두가 각기 개성적인 방식으로 행복을 쟁취하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