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토포필리아(topophilia)
<지금도 가슴 설렌다>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이혜빈
연출: 손기호
주최/주관: 극단 이루
출연: 홍성춘, 김보경, 이지현, 최정화, 나종민, 조주현, 하지웅, 김현숙, 이세영, 김태리
가수: 박희원 연주: 오시원
공연 장소: 선돌극장
공연 일시: 2014년 1월 9일~26일
남산예술센터의 “초고를 부탁해”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인 낭독극 <지금도 가슴 설렌다>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낭독극이라는 기본 설정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도 소극장 무대에 걸맞은 한편의 완성된 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낭독극이라는 형식은 무대 위의 재현 대신 관객의 상상력을 통해 극을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대본을 들고 ‘읽는다’. 인물의 행위가 최소화되고 목소리가 강조된다. 관객들은 처음엔 어색하지만 곧 귀를 열고 대사의 결에서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포착하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여기에 현장에서 직접 가수의 노래와 연주가 진행되도록 해서 소극장을 작은 콘서트 무대로 만든 공연이었다. 흰 색의 사각 무대 위에는 몇 개의 흰 상자가 놓여 있고 배우들은 그 상자에 앉아서 대본을 읽고 퇴장 시에는 사각 무대를 벗어나 가장자리의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는 식으로 극이 진행되었다. 이야기가 전환될 때 가수의 노래가 깃들고 배경막에 도시의 밤 풍경을 묘사한 영상이 비춰지면서 극의 서정성을 더했다. ‘배우와 가수의 콜라보레이션 연극’은 이 공연의 안내이자 공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식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에는 ‘배우’가 읽어주는 극이 있고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있고 어느새 이 둘이 어우러져 가슴에 스미는 따스함이 있다.
이야기는 17세의 여고생 ‘달리’네 가족들이 구정을 앞두고 할머니네 집에 모이면서 시작된다. 마비 증세로 한쪽 다리와 말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와 늘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있는 집에 달리의 엄마, 아빠, 작은 아빠와 막내 숙모 그리고 ‘달리’가 방문한다. ‘할머니의 집’, 달리는 유난히 이 집이 각별하다. 엄마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할아버지의 작은 방에 들어가 잠들어버리기도 하고, 아파트 복도에 나와 그 너머로 보이는 짝사랑하는 오빠의 집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고단한 일상을 눕히는 자리, 할머니의 집은 그런 공간이다. 그러다가 각자의 입장을 좁히지 못하고 이내 투닥거리는 자리, 그런 장소이다. 큰며느리의 자식 걱정, 남편 걱정과 이혼한 둘째 아들의 심통에도, 아픈 아이를 키우느라 힘든 막내며느리에게도 할머니는 그저 “착하게 살아라.” 하신다. 할머니의 자리는 크고 깊어서 여일할 것만 같다. 달리는 가족 간의 크고 작은 다툼 사이에서 자기의 고민을 토로할 길 없어 답답하고 불안하다. 할머니집 아파트 복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래서 달리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토포필리아(場所愛)가 된다. 달리는 이 장소에서 짝사랑하는 오빠의 누나가 빨래를 너는 장면을 보고 우울함이 뭔지 몰라 우울하게 죽은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친구를 만나기도 하며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엄마와 친근함을 쌓는다. 그리고 가족들은 몰랐지만 달리의 첫 졸업식 때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손녀의 졸업식을 지켜보았다. 이푸 투안은 인간과 장소의 정서적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인간이 애정의 대상으로 기억하는 장소에 대한 정서를 ‘토포필리아’라고 불렀다. 이 공연을 보면서, 우리에게 명절에 찾아가는 할머니집이란 가장 원초적인 토포필리아를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이 공연에서 공감하고 감동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극의 갈등은 할머니가 가족들과 상의도 없이 집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라고 선언할 때부터 본격화 된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달리는 망연자실하다. 가족들은 결국 할머니가 암에 걸려 돌아가실 준비를 한 것을 알게 되고 할머니의 집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세대가 교체되고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할머니의 집은 이제 그 자리에 없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할머니집’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린 시절 친척들에게 빙 둘러싸여 재롱을 부렸던, 명절이면 음식과 웃음이 넘쳐나던, 가족들이 나고 자라 이 집을 떠난 뒤에도 때가 되면 돌아와 누웠던 집. 그래서 집이란 의식주를 해결하는 물리적 공간 그 이상의 삶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며 우리가 끝내 떠나왔으나 기억 속에서 떨칠 수 없는 곳이다.
이 극의 포스터만 보면, 가슴 설레는 사람이 여고생 달리이고 달리의 사춘기적 고민이 사랑이며, 그 성장통의 의미가 극의 주제일 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달리가 설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달리의 엄마는 달리를 낳은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설렌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앞에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감정을 자극하는 대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감정이 자연스레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친구에게도 차마 말 못할 사춘기의 고민들은 불안으로 꽉 차 있다. ‘불안’이라는 정서는 세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이 세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죽음에 대해 자각하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사춘기의 성장통은 외부에서 닥쳐오는 일들이 자신의 내면과 어떻게 접속하는지 알 수 없어 깊다. 사춘기는 자기 세계가 열리는 그 설렘을 불안으로 인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렘은 불안을 감출수록 호들갑스럽고 불안은 설렘을 놓칠수록 어둡다. 지나와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그 고민들이 기실 십대를 자라나게 하는 원동력임을 이 연극은 달리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도 가슴 설렌다>가 성장 서사라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이 극에서 잘 설명되지 않은 장면, 그러니까 달리가 집을 나가 어떻게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잘 웃지 않던 소녀인 달리가 어떠한 계기로 할머니의 자리를 쓰다듬는 미소를 가진 아이가 되었는지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우리가 그런 시절을 지나왔다면 어쩌면 그 시절 뛰어놀던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 흔들어주던 골목, 기대 서 있던 담벼락과 숨어 바라보던 풍경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과거에 살았던 장소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그 마음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나머지는 관객들이 가져가 각자의 기억으로 다시 채워야할 부분으로 남는다. 처음에는 낭독으로 채워지던 연극이 자연스러운 연기로 무르익은 것처럼, 우리는 가족이기에 처음에는 어색하고 나중에는 징글징글하다가도 결국엔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