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집이다/ 장윤정

당신의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여기가 집이다>

장윤정

 

작, 연출: 장우재
단체: 극단 이와삼
공연장소: 대학로 연우소극장
공연일시: 2014/04/18-05/25

 

 

집이란 무엇일까? 왜 그토록 우리는 ‘내 집’ 에 안달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안정 때문일 것이다. 심리적 안정과 삶의 안정. 모진 풍파가 차고 넘치는 세상 속에서 오롯이 한 몸 누이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 그것이 ‘내 것’ 인 집에서 기대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다면 집에서 얻는 이점은 소유해야지만 가능한 것일까? 소유만이 안정을 제공하고 행복을 생성하는 것일까? 만약 무소유의 상태에서 행복을 얻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여기가 집이다>는 이러한 집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며시 인생을 논하고 있었다.

 

<여기가 집이다>에서 집은 고시원이다. 일반적으로 고시원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 영원한 삶의 터전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최대한 일찍 ‘나가기’ 를 기대한다. 더 나은 형태의 안정된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물들은 苦자를 벽에 달아 세상은 쓰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그 덕에 삶에 대한 긴장을 놓치지 않게 된다. 자신을 구제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삶의 태도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규칙을 한 번에 와해시키는 인물이 등장한다. 새로운 집주인인 ‘동교’ 다. 동교는 고시원의 개념을 흔들어버린다. 고시원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공간이 제공하는 의미에 집중한다. 고시원은 근본적으로 집이며 집은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곳인 것이다. 무엇보다 동교와 기존의 세입자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동교는 현재에 집중하는 반면 세입자들은 미래의 삶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집이다>에서는 세 번에 걸친 선택의 문제가 나타난다. 첫 번째는 기존의 규칙과 질서를 무시하고 동교의 질서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두 번째는 동교가 제공하는 돈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이 고시원의 공간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 선택의 과정 속에는 매번 삶의 가치관이 은연중에 개입되고 있다. 고시원에 살 되 돈을 내지 않고 받지 않겠다는 질서는 자본주의 질서에 어긋나는 태도다. 세입자들은 혼란스럽지만 이내 슬며시 새 질서에 편중한다. 그러나 장씨만은 동교의 태도를 경계한다. 장씨는 과거 경찰공무원으로서 윤리의식이 강한 인물인데다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또, 장씨에게 고시원은 사회의 연장선에 놓인 공간이었다. 애초에 장씨에게 고시원은 ‘집’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고시원 내에서도 최소한의 자본 논리가 진행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 갈등은 나아가 두 번째 문제에서 증폭된다. 동교가 제공하는 돈을 인정하는 문제다. 동교는 사회가 아닌 고시원 내의 일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월급을 지급하기로 한다. 고시원에는 술에 취해 사는 최씨와 도박을 즐겨했던 양씨, 그들의 아내들과 고시를 준비하는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영민이 거주하는데 이 중에서 누구보다 양씨 부부가 적극적이다. 그들에게 자존심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자들이나 생각할 문제였다. 좋게 보자면 비(非)위선적인 치열한 삶이고 나쁘게 보자면 치졸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이들의 태도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도록 만든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 해 살아온 인생들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몰락을 겪었을 뿐이었다. 더불어 아들까지 잃었으니 나름 인생의 고(苦)를 맛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동교의 돈은 열심히 사는 방식의 일환일 뿐이었고 궁핍한 삶을 탈출 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물론, 최씨 또한 돈이 필요하기란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에겐 돈이 필요했고 홀로 된 동교에겐 가족이 필요했으니 모종의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그렇게 제거 된 듯 보였던 자본주의의 질서는 은연중에 지속되고 있었다. 이들과 장씨는 근본적으로 동교의 돈을 어떻게 인식하는 지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 장씨는 돈을 곧 힘으로 인식한다. 장씨가 동교의 친구인 종택이 동교의 말에 따르는 태도를 두고 ‘꼬붕’ 으로 지칭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꼬붕의 논리는 간단하다. 동교는 돈이 있고 집의 주인이지만 종택은 돈이 없고 집의 주인이 아니다. 즉, 동교의 뜻에 움직이는 것을 곧 돈의 논리로 설명한다. 어쩌면 장씨는 동교의 돈에 따라 움직이는 세입자들 또한 꼬붕으로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 또한 꼬붕으로 전락되는 것을 경계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세입자들과 동교는 필요에 의한 관계이지만 가족이라는 형태를 구성해나간다. 이 문제는 결국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라는 집단의 정체성 문제로 확장되었다.

 

장씨는 혈연관계의 가족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한 존재다. 반면 최씨나 양씨, 동교는 부득이하게 가정이 와해된 인물들이다. 비록 물질로 엮인 사이지만 점점 가족의 형태를 띠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분명 심리적 안정을 얻고 있었다. 이를 두고 장씨는 ‘가짜’ 라고 칭한다. 장씨는 세입자들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곳은 집이 아닌 단지 고시원일 뿐이며 고시원이기에 머무르는 곳이 아닌 거쳐 가는 공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교의 질서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의 돈 또한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씨에게 진짜는 고시원 밖의 세상이었고 비록 의절했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가족이었다. 장씨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었기에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인물들은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팔을 다친 최씨나 손을 다치고 다시 돌아온 신씨, 다쳤던 손이 회복된 양씨를 통해서 이것은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세상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상처입고 들어온 인물들이다. 고시원은 다친 이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잠시 회복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각 인물들은 이러한 장씨의 논리에서 벗어나 현재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것을 인지하면서도 가족의 형태를 구성해간다. 진심으로는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점점 묘한 정을 교류해 나간다. 애초에 물질로 형성된 관계였기 때문에 분명 불안하고 불안정한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랜만의 안정에 도취되어 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고시원을 집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고시원은 세상과 격리된 공간이다. 마치 냉정한 사회를 등지고 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하는 심리처럼 세입자들에게 고시원은 점차 세상의 안식처로 변화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에게 집은 더 이상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이 인식하는 집은 물질을 떠나 가족을 의미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오래전 헤어졌던 아내가 청소를 하고 있고, 오래도록 떨어진 부부는 오랜만에 겸상을 한다. 헤어지려했던 연인들도 화해의 분위기에 휩쓸려 서로를 용서한다. 또, 각자 가진 상처를 목메게 뱉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고시원이었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집의 형태였기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선택의 문제, 머물 것인가 나갈 것인가의 갈등이 일어난다.

 

결국 장씨는 이런 기묘한 안정과 행복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가게 된다. 그는 세상과 격리된 채 나약해질 이들을 우려한다. 또, 고등학생에게 경제적 안정을 기대하는 태도를 사회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질책한다. 세입자들이 자립할 능력이나 의지마저 잃어버릴 것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다. 그의 심리는 황지우 시인의 <눈보라>를 읊는 것에서 드러난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길은 곧 현실이며 비록 그 길이 벼랑으로 가더라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 후 맨발으로라도 고시원을 나서려는 장씨는 마치 황야로 나서는 오이디푸스 같다. 자신이 마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있는 장씨는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떠났던 신씨가 돌아온다. 신씨는 고시원을 떠나는 날 산에서 집 없이 울고 있던 노숙자를 발견했었다. 그 상황이 연상되면서 장씨와 노숙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쩌면 장씨는 눈보라 같은 세상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고시원을 나서는 장씨의 모습에서 삶의 의지가 크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씨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동교다. 동교는 애초부터 비현실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유토피아적인 질서를 생성했다. 게다가 언제나 감정의 동요 없이 이성으로 사고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동교가 장씨의 이탈에 최초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흥분한다. 장씨의 거부는 끝까지 자신의 방식에 교화되지 않은 태도이며 자신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이 웃기만 했지만 사실 동교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돈 앞에서 연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형태를 얻고 싶었기에 모른 척 지냈던 것이다. 동교는 장씨를 향하여 돈이 아닌 마음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불안하지만 행복한 척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되묻는다. 이 지점에서 <여기가 집이다>의 화두가 드러난다.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진짜는 불행하고 가짜는 행복하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가짜로 사는 것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진짜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혈연관계지만 뿔뿔이 흩어지거나 의절한 상태라면 그것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질로 얽혔지만 공동체를 형성하며 가족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되고 정을 교류한다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고시원으로서의 공간이 진짜인가? 집으로서의 공간이 진짜인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혈연관계여야 하는 것인가? 장씨와 동교의 대립은 크게 인생관에 대한 대립으로도 나뉠 수 있다.

 

앞서 표현했듯이 동교는 현재, 여기를 바라본다. 반면 장씨는 미래, 바깥을 바라본다. 공연은 누가 더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두 입장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현재를 보지 못하는 장씨의 삶은 전전긍긍의 연속이며 애써 홀로 외로움을 택하면서 현재의 즐거움을 놓치며 살았다. 반면 동교는 미래에 물질이 사라지면 결국 와해될지도 모를 가족관계에 집착한다. 신기루 같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미래에 직면하게 될 두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장씨는 결국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놓치고 동교는 나태한 삶에 안주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다만 여기서 ‘집’ 이란 소유하는 것인가 거쳐 가는 것인가, 집은 어떤 형태를 집이라 정의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대두 된다. 집이 곧 인생으로 비유되기에 집에 대한 해석은 곧 인생관이 되기 때문이다. 삶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집에 대한 인식은 변화한다. 삶을 곧 꿈이라 여겼을 때 집은 잠시 머물다가는 공간이 된다. 이때의 집은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난다. 반면 삶은 꿈과 같은 신기루가 아니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라고 보았을 때 집은 소유해야만 하는 물질 개념이 된다. 집을 소유하기 위하여 그만큼 성실해져야 하는 것이다. 공연은 집을 소유할 것인가 소유의 문제에서 벗어날 것인가 하는 선택 또한 관객의 몫으로 둔다. 어쩌면 이것은 나아가 물질의 문제에 기준을 둘 것인가 마음먹기의 문제에 기준을 둘 것인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장씨와 동교의 대립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공연은 온실 속 화초 같은 공간인 고시원을 두고 삶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된 최씨와 자칫 나약해질 위험이 있는 양씨를 함께 묘사함으로써 고시원에 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한다. 한 가지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공연 내내 고민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여기가 집이다>의 미덕이 잘 나타난다. 연극이라면 필연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우재 작가 및 연출의 필력에서 잘 드러난다.

 

장우재 작가는 연출로서의 공간 활용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글을 ‘재미있게’ 잘 쓴다.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는 내 집 마련 열풍과 방 한 칸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여기가 집이다>는 시의적절한 작품이었다. 사실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표현하였다. 무거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다양한 논의거리가 함축된 작품이라면 더욱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시종일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가 잘 표현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필력이 잘 나타났다. 더불어 고시원 내 각 공간에 대해서도 샤 막으로 잘 구분하여 형상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각 공간의 인물들은 집중 조명되거나 동시에 그림자처럼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우재 연출의 연출력이 드러난 장면은 장씨가 꿈에서 동교를 살해한 장면이었다. 장우재 연출은 살해 장면을 아주 차분하고 느릿하게 표현하였다. 장씨가 격앙되는 내용의 대사를 읊으면서도 살해하는 행동은 차분히 진행하여 빠르고 격한 움직임보다 오히려 더 섬뜩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빠르고 격한 움직임은 상당히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차분히 칼을 움직여 찌르는 행동과 목소리는 이성적인 움직임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장씨의 살인은 갑작스러운 행위였지만 재치 있는 연출 덕에 절정으로 향하는 층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최씨 처가 좁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온 몸에 묻어내는 행위에서 온기의 열망과 삶의 열망이 표현되었다. 또, 그와 동시에 옆에서 청소를 하는 양씨 처는 ‘리라꽃은 피건만’을 흥얼대는데 처연한 삶의 아픔도 이제 그만 삶의 일부로 녹아버린 모습이 드러난다. 이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행위들은 삶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들이다. 이 점들을 연출은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점이 없었다. 각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최적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발성과 성량, 인물의 성격까지 각 배우들은 자신이 가진 개성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었다. 재공연 된 작품인 만큼 전에 비하여 더 안정감 있게 인물을 해석하고 표현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쉽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보완했으면 하는 점은 동교의 성격 구축이다. 그나마 장씨가 동교를 마치 현실의 인물이 아닌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과 장씨와의 대립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내보인 동교의 대사에서 현실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남는 동교의 이미지는 신기루 같은 이미지다. 여전히 비현실적인 잔상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이 무조건 회의적이지만은 않다. 사실, 비현실적인 질서체계를 제안할 만한 인물이라면 분명 현실적이지 않은 성격의 인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연의 절정부분에서 동교의 진심이 모두 쏟아져 나오는데 그 시간이 적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동교의 속사포 같은 진심은 순식간에 드러나도 지나간다. 마냥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던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이었기에 상당히 임팩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짧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다시 일상의 비현실적인 동교로 돌아가 버리는 부분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마도 장씨의 변화는 나타났지만 동교의 변화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동교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장씨가 고시원을 나간 일은 분명 동교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실 동교는 장씨의 내면을 꿰뚫고 있었다. 다른 인물들은 물질의 문제에 얽매인다면 장씨는 마음의 문제에 매여 있음을 본 것이다. 어쩌면 동교 또한 마음의 문제에 매여 있기에 장씨를 더 변화시키길 바랐을지 모를 일이다. 동교는 물질이 충족된 대신 제대로 된 가족이 없다. 물질로 해소되지 못하는 마음의 불안을 가상으로나마 위안 받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단호하게 고시원을 나가버리는 장씨의 모습에서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동교는 인위적인 행복에서라도 위안 얻기를 선택했고 장씨는 나가버렸다. 이 과정에서 분명 동교는 어떠한 변화를 겪었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극 중에서 동교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결국 변화하였다. 다른 세입자들은 자신들의 나약하고 치졸한 면들을 밝힌 후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 되었다. 물론, 장씨가 나간 후 동교 또한 말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울음 외에 말 한마디 없어져버리긴 하였으나 그것만으로 동교의 내면 변화를 표현하기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동교는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교의 변화가 더 기대된다. 가능하다면 대사가 아닌 행위로써 동교의 변화가 표현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여기가 집이다>는 결국 집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아가 인생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이것은 작게 소유와 무소유의 문제로 표현되면서 크게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삶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었다. 덧붙여 마음의 문제와 물질의 문제 또한 짐작해볼 수 있다. 결국 어떤 삶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이들이 결국 가족의 형태에서 와해될 것인지, 서로를 자신감의 기반으로 삼고 이 공동체가 삶의 원천으로까지 발전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어쩌면 그렇기에 알 수 없는 미래 대신 현재지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일지도 모르며 알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차분히 대비해두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태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선택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너도 나도 부족하고 불완전하기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존재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각자 내면에 자리한다. 각 인물들은 이에 대하여 단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 공연으로 현대 사회에서 가족과 집의 의미에 대하여 반추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삶의 태도까지 고민해본다면 아마도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혹시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나아가 자신에 대한 연민까지 가슴으로 느껴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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