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제의 의미/ 우상전

                     ‘서울연극제’을 지속할 것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오랜만에 중앙일간지가 ‘연극기사’를 다뤘다. 이번 평론가협회가 주최한 합평회 성격의 좌담회를 경향신문이 기사화 했다.

기사 타이틀부터가 썰렁하기 그지없다.

“서울연극제 정체성 모호… 예산 부족해 연극질 저하”

소제목은 더 으스스하다. “심사과정 의구심” “더 이상 연극적 이슈를 생산하지 못한다.” “부족한 예산 탓에 연극의 질적 수준을 담보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서울연극제’야말로 한국연극의 모든 문제점을 한곳에 응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긴 역사를 가진 연극의 대표적 축제에서 아직도 ‘정체성‘이 운위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한국연극이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2. 한국연극에서 여전히 ‘지원금’은 공연의 질적 수준을 담보할 정도의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3. 서울연극제가 질적 수준을 담보하지 못하고, 연극적 이슈를 생산하지 못하는 게 ‘예산’ – 지원금 때문인가. ‘시상’ 때문인가. 아니면 둘 다에 문제인가?

 

물론 이 기사를 읽고 많은 의문점이 동시에 머리를 스치는 게, 나 한사람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강한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은

 

1. ‘서울연극제’에 대한 이러한 지적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이야기인데도 왜 평론가들이 (갑자기) 이 시점에서 이런 강한(?) 발언을 하기에 이른 것인가?

2. 이번 연극제는 서울시와 공동주최인데 왜 예산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가. 박원순시장은 ‘나쁜 남자’인가? 그런데도 협회장과 회원들이 박원순시장을 그토록 지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맹목적인 정치적 이념 탓인가?

3. 공정한 심사와 시상은 한국연극에서 불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연극계 전반의 수준 탓일 뿐인가?

4. 왜 연극인들은 상금도 별로이고, 흥행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상’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5. 박장렬회장은 합평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참석했는데 코멘트가 없는 것인가?

 

‘서울연극제’의 슬로건이 주는 의미

 

이번 연극제는 시울시와의 최초의 공동주체를 내세웠지만 (누가 보아도) 박장렬회장이 박원순시장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치룬 잔치(?)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 행사였다. 슬로건도 그렇고, 최초의 공동주최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면서 그는 “옛날부터 연극의 사회성에 관심이 컸으며, 따라서 연극은 사회성을 갖춰야 한다”고 인터뷰를 통해 설파하고 있다.

그러니까 박회장이 말하는 사회성이란 작품이나 공연을 통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실제로 현실정치판에 참여하는 (특정인 선거운동을) 사회성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좌우간 서울시와 공동주최한 이번 연극제에서 합평회에 참석한 남명렬부회장의 입에서 “예산이 부족한 건 심각한 사실”이라고 발언이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또 “유수의 극단들, 나름의 수준을 담보하는 극단들을 서울연극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유인책이 거의 없다.”는 고백이 나온다 말인가?.

또 그는 “올해 공식 참가작에 지원해준 1천8백만원은 연극 한편을 만들기 위한 고정비용도 안 된다. 한 달 넘게 연습해야 하는 참가자들에게 최저임금도 안 되는 거의 자원봉사 수준의 여건이다.”고 탄식을 하고 있다. 얼마나 지원이 허약하면 공동주최에서 이런 ‘예산타령’이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물론 이 말에 이진아 평론가가 “만약 예산이 지금보다 2배로 늘면 ‘서울연극제’의 수준이 올라가겠나?”고 다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으로 돌리고, 우선 내가 “잡은 물고기 떡밥 주는 것 봤니?” 하면서 “선거 입후보자에게는 달려들어야지 감싸면 되레 아무 것은 얻을 수 없다.”고 예언(?)을 했는데, 내 말이 적중한 것 같아 씁쓸하다.

그렇다고 박원순시장이 인색한 사람인가? 선거 전에 국회에서 서울시의 지원금 자료가 공개되었는데 박시장은 엄청난 돈을 자신의 정치기반에 나누어주면서 선심을 쓰고 있었다.

자그마치 양대 노총에 138억 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어느 사찰에도 무려 30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혜화동의 조그마한 박물관에도 4천여만 원을 지원하는 게 국회자료를 통해서 공개되고 있다. 그런데도 그 명단에 서협은 없었다.

그런데도 박회장은 ‘뉴스스테이지’와의 인터뷰에서 “3억이 안 되는 예산을 가지고 이 정도 프로그램을 하는 것은 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회장은 아마 ‘기적’이라는 말의 쓰임새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기적’은 무슨 일의 결과가 잘 됐을 때 쓰는 말이다.

즉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할 때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 ‘기적적으로 망쳤다’라고 할 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보기에) 예산보다도 심사(시상)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사(시상)에 대한 의구심 Ⅰ

 

1. 나의 제안

 

박장렬회장이 1기 취임하던 그 해, 나는 모든 연극제 참가공연을 다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시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시상’의 결과가 심사자에 따라 서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쭉 ‘서울연극제’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 ‘시상’이 되는 것을 보면 괜히 심사(心事)만 뒤틀릴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 평론가협회의 합평회에 (일부러 참가해) 시상에 대한 문제점을 발언하기도 했다.

그때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면 “지난해 시상이 협회장 선거의 ‘논공행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논공행상‘에 대한 의구심은 한국연극협회도 마찬가지라고 연극인들이 쑥덕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협회와는 별도의 독립 집행기구를 만들어 운영해야 매번 협회장이 바뀌어도 정치적(?) 중립성이 유지되어, 공정한 심사와 시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평론가들 앞에서 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협회장과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론가들마저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물론 협회야 ‘시상’이 없으면 할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치지만, 어째서 평론가들은 내말에 반응이 없었던 것일까?

 

평론가들의 침묵

 

그 당시에, 연극평론가들이 침묵한 것은 협회(장)의 심기를 건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협회(장)에 밉게 보이면 일단 일거리, 심사를 맡기지 않을 위험이 크므로 상호간에 잘 지내는 게 상수라고 여기는 듯 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런 나의 발언을 못들은 척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쩌면 이게 연극판에서 그동안 평론가들의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사’를 자신들이 주도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존재감을 잃게 됨으로, 나름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른다.

왜? 협회에 ‘입바른 소리’를 해봐야 연극판에서 일거리만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미 ‘시상’이 쪽박 나고, 극단의 연극제 참여가 파산상태(?)에 이른 지금에 와서야 –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인 지금에 와서 이런 강경발언을 쏟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협회의 ‘심사’에 대한 고려가 없자, 결국 참고 기다리다가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더 이상 멸시당하는(?) 것을 참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건 “서울연극제의 심사결과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면서 “주최 측인 서울연극협회가 직접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것이 문제”라는 발언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각 협회는 각종 심사를 각자 자신들의 ‘고유 업무’라고 여기면서 ‘시상’을 통해 나름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2. 그럼 평론가들은 믿을 만한가?

 

그렇다면 (이의를 제기하는) 평론가들에 의한 심사는 그동안 의구심을 갖게 한 적은 없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가의 매너리즘에 빠져서 오랫동안 특정인이나 특정분야에만 몰입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를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이에 대한 불만과 저항으로 양 연극협회가 평론가들에 의한 심사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평론가들의 심사에 소외감을 느껴) 각 협회가, 각자 자신들이 심사와 시상에서 이기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이런 점에서, 평론가협회가 주축이 되어 협회와 별도의 독립기구를 만들어, 즉 평론가를 중심으로 심사위원을 선정해 심사에 임하면, 모두가 인정하는 공정한 심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명동예술극장이 생긴 뒤, 남산예술센터 개관 2주년에 모여 세미나를 한다기에 ‘대극장 활성화방안’을 논하는 줄 알았더니 겨우 한다는 말이 공공극장이 활성화되면 소극장이 사라질 거라는 ‘소극장 걱정’을 하고 있는 게 한국의 평론가들이다.

무엇에 한번 꽂히면 앞뒤, 옆도 돌아볼 줄 모르는 ‘벽창호’ 기질의 평론가들에게 개방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는 박근혜대통령이 늘 여론에 시달리는 ‘소통부재’ ‘독선정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질적으로 현장경험이 없는 여성평론가가 대다수인 우리 현실에서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한국연극에서의 모든 시상은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게 사실이다. 아니 모두 없애야 한다. 그래야 한국연극이 새롭게 ‘갱생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심사(시상)에 대한 의구심 Ⅱ

 

국제대회에서 성적만 좋지 않으면 한국축구는 꼭 ‘인맥축구’의 구설에 시달리곤 한다. 이번에는 또 ‘의리축구’가 구설에 올랐다. 즉 대표선수의 선발이 실력보다는 인맥이나 의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한국축구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국민들의 질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설의 배후에는 항상 ‘한국축구협회’라는 단체가 존재한다. 이런 한국축구의 고질병을 단숨에 해결하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히딩크’다. 그의 덕에 출세한 축구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연고대 출신으로 채워지던 ‘인맥축구’가 그의 공정한 선발로 인해서 파괴되고, 명지대 출신인 박지성 등이 발탁되어 세계적 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공정한 평가나 심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항상 축제가 끝나면 시상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키는 각 연극협회는 결과적으로 ‘축구협회’처럼 한국연극을 망친 원흉이 되고 있는 셈이다.

 

국립발레단의 사례

 

이건 내가 국립극장시절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례다. 한국발레를 ‘국민의 예술’로 올려놓은 것은 바로 김지영같은 젊은 발레리나들이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건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하여 연극, 국악, 한국무용, 현대무용처럼 ‘국제무대’에서 성가를 올릴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는 장르- 국내 시상에서 특정인들에 의해 ‘나누어먹기’, 또는 공정성에 대한 구설이 끊임없이 오르는 장르- 즉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르는 지속적인 발전을 멈춘 상태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장르는 아무리 국내에서 최고상이라는 ‘대통령상’을 수상해도 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국내상’이 권위도 없을뿐더러, 항상 공정성에서 신뢰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국내의 각종 예술상이 권위를 인정받았다면, 국제적 명성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국민들에게라도 크게 어필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발레의 경우도 (예전에는) 국내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 그나마 발레리노들에게는 ‘병역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자체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국민들 대다수는 그런 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발레가 발레리나들이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자, 국내에 팬이 생기고, 발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국민의 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무용인들과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특히 한국무용전공자들은 나의 ‘한국무용의 발전에 시상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발레와의 비교논리’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암담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연극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연극의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저급한’ 시상제도를 완전히 일소하는 게 그나마 발전을 위한 유일한 개선방법이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각종 국내용 시상제도는 각종 이권단체(협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발전적(?) 정책 수행이 불가능한 단체나 협회가 가장 손쉽게 성과(생색)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무감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게 시상제도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부작용(부조리)에도 무감각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시상을 남발하는 것은 (예술장르에 상관없이) 발전에서 최대의 악재가 되고 있는 게 작금의 한국적 현실이다.

왜? 이런 종류의 시상이 남발되면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관객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창작의욕을 상실케 하고, 기존 예술가들에게 외려 매너리즘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와 상호간에 반목을 조장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현실에서, 그나마 해외 연극제에 참가해 수상이 불가능한 처지라면 우리 연극계만이라도 이를 자각하고 ‘가만있는 게’ 발전을 위해서 더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한국연극(서울연극제포함)을 망친 것은 지원금이 아니라 ‘시상’이라고 해도 절대로 과한 말이 아닐 것이다.

서울연극제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내가 연극제의 시상이 ‘논공행상’이라고 떠들던 그때라도 모두가 들고 일어나 개선점을 찾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서울연극제가 지금에 와서 이런 정도의 평가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연극의 3요소

연극의 3요소가 무엇인가? 희곡, 무대(또는 배우), 관객이 아닌가! 그런데 희곡이나 무대(극장)가 없어도 연극은 얼마든지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배우’가 없고 ‘관객’이 빠지면 연극(공연)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왜? 관객이 없는 공연은 아무리 회차가 쌓여도 ‘리허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배우야 대학에서 ‘학벌’을 따기 위해 꾸준히 인력을 배출하게 되니 걱정할 게 없지만, 관객이 없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극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요소에 결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이 없다는 현실이 한국연극의 최대의 과제이자. 모든 문제점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왜? 관객이 없으니 당연히 ‘돈’이 돌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작비가 없어 항상 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게 연극인들의 처지다. 그러니 창작자들에게 치사함을 제공하는 지원금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연극인들이 ‘시상’에 목숨을 거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공연에 관객이 없어도 -어차피 없을 것이니, 그나마 ‘상’이라도 타 존재감을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게 현재의 ‘시상제도’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이 완성된 양 우쭐거릴 수 있는 ‘순간 도취감’을 제공하는 게 각종 시상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인들이 상금도 없고 흥행의 보증수표도 되지 못하는 ‘시상’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한국연극에서 ‘관객’이 빠지고 ‘시상’이 절대적인 연극의 3요소로 둔갑하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연극인들은 어차피 관객에는 관심이 없고, – 이미 자신감을 잃어 -그저 어떻게 해서 ‘상’을 타느냐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연극은 후져도 프로그램은 잘 만드는 게 관행(?)이 된 게 한국연극이다. 이때 자신들의 경력란에 수상경력을 써 넣는데도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시상’에 공정성이 없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한국연극의 중요이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는 다시금 구차한 ‘지원금타령’으로 이어지는, 또 그걸 받으려고 눈치보고, 아부하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비굴한 연극인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수상대상자나 시상자나 모두가 마찬가지)

그러니 모두가 당연히 시상을 주도하는 윗선(지원단체)에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되게 처신할 수밖에 없으며, 이게 공정성을 잃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판이야말로 정치적 중립의 ‘시민단체’(?)가 가장 긴요하고 절실한 게 현실인데도, 이마저도 정치에서의 진영논리가 판을 치니, 정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게 연극판이다.

이런 현실이니, 나름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 협회 등은 각종 시상을 남발하게 되고, 기득권을 누리려니 공정성도 없이 ‘인맥과 의리’로만 시상을 하게 되니 자연히 의구심만 만발해 져 오히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게 현재의 시상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할 최선의 대책은 (현재의 상황에서) ‘관객’을 연극의 3요소로 살려내는 길 뿐인 것이다.

 

‘불멸의 여자’에 대한 유감

 

앞에서 박장렬회장이 ‘옛날부터 연극의 사회성에 관심이 컸으며, 따라서 연극은 사회성을 갖춰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런데 이런 발언을 하고 있는 협회장이 작년 연극제에서 한국연극사상 최고의 사회성 공연인 최원석의 ‘불멸의 여자’가 수상에서 제외된 것을 박회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불멸의 여자’는 창작극사상 최초로 우리 사회가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감정노동자’의 문제를, 그것도 연극이 앞장서 세상에 알리고, 이를 고발한 최초의 사회성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부터 KAL의 여승무원이 기내에서 ‘라면’ 때문에 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시작하여, 줄줄이 남양유업 대리점 사건까지 우리 사회는 ‘감정노동자’들의 애환과 이른바 ‘갑을논쟁’이 국민들의 분노로 가슴을 적셨던 한해였다.

이건 현재도 진행형이어서 갈수록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감정노동자’가 한국에서만 552만에 달하며, 이는 전체 취업인구의 20%를 웃돌고 있는 게 현실로, 각 세대 구성으로 따지면 한집 건너마다 ‘감정노동자’가 한사람씩 살고 있다고 할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엄청난 사회적 문제를 ‘서울연극제’가 한발 앞서 조명한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창작극 사상 우리 연극이 우리의 ‘사회상’을 앞장서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오래전부터 선거 때마다 특정후보를 지지, 서명하는 것을 최고의 ‘사회성’으로 여기고 있던 ‘3류 예술가’ 구성집단’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결과(시상)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러고도 연극제의 ‘질 저하’가 예산(지원금)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것인가? 단언컨대 ‘시상’이 한국연극을 망친 게 분명해지는 대표적 사례다.

기사에 의하면 연출가 심재찬은 “예술로 사회를 성찰하려면 우리가 그만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참! 손에다 쥐어줘도 ‘X인지 된장인지’를 구별 못하는데 무슨 놈의 통찰력?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올해 연극제가 시작한 얼마 후, 원로분이 나를 보자 이런 넋두리를 하시는 것이다. “너 연극제 구경했니? 정말 수준이 엉망이더라, 나도 이에 대해 글을 좀 써볼까 한다.” 이런 말이 나오는 근본적인 원인이 시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연극 ‘유도소년’이 주는 교훈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내 글을 꾸준히 읽은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나는 오래 전 서울연극제 운영위원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운영회의에서 ‘짬뽕’을 비롯한 ‘평강공주거울이야기’ 등 젊은 연극인들이 만든 공연 4편을 연극제의 ‘초청공연’으로 하자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고 썼다.

그때 내 의견이 묵살당하고, 결국 원로평론가 여석기선생을 모시기로 운영위원들이 결정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바로 그 ‘평강공주’를 만든 ‘공연배달서비스간다’팀이 창단 1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유도소년’을 구경했다. 극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중견연극인들을 만났는데. “유도소년을 보러간다”고 했더니 그들에 대한 ’놀라움‘과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중견연극인들의 반응에 더 놀랬다.

왜 그랬을까? 공연 내내 그 생각을 떠올리며 관람을 했다. 첫째 이들의 공연은 ‘신선도’면에서 ‘조재현 그룹’의 공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즉 연예인을 앞장세워 ‘흥행몰이’를 하는 그런 연극이 아니었다.

무명의 젊은 배우들이 최선을 다하는 무대였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내뱉고 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드는 공연이었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유머와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니 초만원으로 가득한 객석의 젊은 관객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그들의 무자비한(?) ‘자기 헌신’이었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들의 몸을 던져 ‘죽도록’ 연기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동안 기성연극에서 볼 수 없는 열정이 넘친다. 아직도 ‘평강공주’에서 나를 감동시킨 그들의 에너지가 10년이 지난 지금도 식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한마디로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뮤지컬에 눌려 쓰러져가는 연극을 그들이 버텨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는 그들에게도 선배들, 아니 연극계 어른들의 성원과 지원이 깃들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극장 문을 나섰다.

 

청소년극 ‘비행소년’의 여신동

 

요사이 나를 너무나 기쁘게 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연극 ‘비행소년’의 연출이자 무대디자이너를 겸하고 있는 ‘여신동’이다. 살다보니 이런 똑똑한 후배도 만나게 된다는 기쁨을 맛보기에 충분했다.

그가 중앙SUNDAY와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하겠다.

“무대와 객석이 나눠져 있는데도 ‘울컥하거나 닭살이 돋으며’ 카다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에너지야말로 공연의 힘인데. 어려운 텍스트로 무대와 객석을 더욱더 분리시키는 지금의 (한국)연극이 안타까워요.”

“내가 무대디자이너로서 참여한 연극들을 보면 너무 권위적이고 고상해요. 또 어렵고, 객석에서 저도 많이 자는데 (웃음), 그건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만나기를 열망해요. 메시지의 감동이 아니라 에너지로 오는 감동의 순간이 연극의 힘이거든요.

메시지를 원하면 책을 보면 되는데 연극이 텍스트전달에 그치는 게 답답하고, 그걸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어요. 서로 만나는 것이 연극의 원형인데, 이해하는 사람만 봐야 한다면 예술이란 게 과연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보이사우나’ 때도 연극계 사람들은 서사가 없는 걸 못 견뎌 했어요. 뭔가 찾아내려는 강박관념 때문이예요. 반면 감각이 열려있는 음악이나 미술계 사람들은 열렬히 호응했어요.

관객들은 (관객이 아니라 연극인들이겠지) 어려운 메시지를 얻어가겠다는 허영을 버리고 편하게 오감을 열고 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현장에서 만나는 에너지에 모든 걸 맡겼으면 좋겠어요.

‘피나 바우쉬’ 작품도 고상해서가 아니라 그 에너지 때문에 감동을 느끼잖아요. (한국의 연극인들은 ‘피나 바우쉬’의 국제적인 명성에 눌려서 그냥 보는 걸!) 그걸 느끼려면 오감이 다 전달돼야 하죠. 눈물을 흘릴 때 눈, 코, 귀, 입, 피부가 다 동원되지 않나요. 그런 공연을 위해 이렇게 부딪치고 있어요.”

젊은 연극인 중에 이렇게 똑떨어지는 말을 하는 후배가 있다니! 선배들도 감히 설파하지 못하는 자기의 미학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말을 하다니! 내 연극인생에서 이런 똑똑한 소리를 하는 후배를 보게 되다니! 그저 감동이 일 뿐이다.

젊은 후배들아 좀 본받아라! 설령 연극을 잘 만들지 못해도 상관없다. 왜? 연극이야 돈 많이 들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더 좋아지는 법이니까.

따라서 먼저 자기의 철학을 가져라! 알고 보면 너희들의 선배, 선생들 자기의 논리 하나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지다. 기죽지 마라, 원래 자기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레 ‘권위’만 내세우는 법이니까!

 

‘서울연극제’의 개선안

 

그럼 이야기를 바꿔 ‘서울연극제’를 계속 살리려면 연극인들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한마디로 이제는 ‘유도소년’이나 ‘비행소년’과 같은 공연에도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

그리고 차라리 서울연극제를 ‘신작’이 아닌 (신작을 배제하고) 지난해 흥행이 좋았던 작품들을 모아 (관객들의 관심으로) 지원금을 주고 – 이런 경우에는 지원금은 ‘포상금’의 성격을 갖게 되는 – 페스티벌 형식으로 치러지는 게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공정성을 찾을 수 없을 바에는 말이다.

또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공연들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해 그들의 취향과 관심을 가늠해보는 장소로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 극작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꼭 연극제를 겨냥해 신작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우선 지원금으로 ‘작가료’를 벌 수 있고 잘되면 상도 타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게 서울연극제의 전통(?)이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창작극의 육성을 명목으로 서울연극제 (전에는 대한민국연극제)를 시작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제작환경이 바뀌고 사회현실에도 변화가 온 게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문학(인문학)마저도 퇴조현상을 빚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다시금 이의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소낙비’를 피하는 게 상수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창작극 육성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게 현실이다. 따라서

 

하나. 관객들에게 지난해에 관람하지 못했던 좋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축제)를 제공하는 연극제로 변신하는 게 어떨지? 그러면 이미 입증된 그나마 좋은 연극을 소개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사실 이건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다. 점점 연극의 질이 하락하는 시점에서, 그래도 괜찮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장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서울연극제’마저도 ‘저질시비’에 얽매이면 연극은 아예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 지원금을 주어 연극인을 ‘포상’하는 이중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 심사로 인한 의구심이 아예 해소되어 협회는 명예를 회복하게 되고 연극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단 하나의 단점은(?), 협회 임원들이나 원로 선배들이 신작을 선발한다는 명분으로  심사과정에서 설치지 못하는 게 되는 점일 것이다.

동시에 이제는 한국의 전통적(?)으로 극작가를 양산하는 체제와 환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

 

1. 좋은 작품이 양산되지 못하면 서울연극제의 시상에 자꾸만 ‘나눠먹기’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게 되는 현실이다.

2. 현실적으로 ‘좋은 신작’ 5편으로 연극제를 꾸릴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지원금을 높일 경우에, 이게 또 다른 부조리를 양산할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협회장이 ‘관피아’였으면…

 

연극인들은, 어느 해 서울연극협회로부터 연극인들과 소통(대화)의 자리를 ‘예술가의 집’에서 마련한다고 문자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는 걸 기억할 것이다.

특이한 게, 50세를 기준으로 미만인 회원과 이상인 회원이 각각 다른 날짜에 나와서 만남과 대화를 갖자고 협회가 주문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무척 흥미를 느꼈다.

아마 선후배가 서로 섞어서 모임을 가지면, 후배들이 아무 말도 못하기 일쑤여서 분리해서 모임을 갖는다고 이해했다. 솔직히 나이든 선배들이 끼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불편하기 마련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궁금해 했던 것은 딴 데 있었다. 젊은 연극인들의 참석인원과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가서 보면 젊은 후배들의 풍속도(?)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후배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어 무척 가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50세 이상은 내일인데 왜 오늘 오셨어요?”

“젊은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번 들어보려고 왔지.” 그러면서

“오늘은 듣기만 할 게” 그리고 협회장 주재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첫 주제가 올해 ‘서울연극제’의 예산이 총 3억 중에 1억 원이 깎였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은 아쉽게도, 그 큰 회의실에 기껏 10여명 남짓이 전부였다. 그래서 궁금해 질문이 있다고 발언을 신청했다.

“오늘 여기에 올해 연극제에 참가하는 극단대표나 참가자가 나와 있냐?” 회장이하 모두가 ‘흠칫’ 놀라는 느낌을 받았다.

놀랍게도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수혜 당사자는 아무도 없는데, 이게 첫 주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좀 언짢은 소리를 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연극인이 쫒아 와서 “젊은 사람들 모임에 왜 끼어 초를 춰! 나가자”해서 끌려 나왔다.

놀라운 것은 3분의 1이나 되는 서울연극제 예산이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삭감됐는데. 참가 당사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연극판의 현실이라니, 그저 누가 나서서 얻어다 주기만을 기다리는 게 전부란 말인가?

사건은(?) 그 다음날 발생했다. 국립극장에서 같이 근무하다 문화재단에서 실무를 보는 후배로부터 나한테 전화가 왔다. 그것도 오전 10쯤 이른 시간이었다.

“선배님 어제 협회 모임이 나가셨어요?”

“응”

“거기서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사실은 들으러 갔다고 못 참고 몇 마디 했는데. OOO가 와서 별로 말도 못하고 끌려나왔어.”

나는 영문을 몰라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래 마침 전화 잘했다.”

“연극제 예산이 1억이나 삭감됐다고 하던데 왜 그렇게 됐어?”

“올해 전반적으로 재단의 예산이 삭감 되어서요. 할 수 없이 세 프로젝트에 각각 1억씩 총 3억을 깎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많지도 않은 예산에서 그나마 3분의 1을 깎으면 어떻게 해. 그것도 연극인들 유일한 축제에“ 대답이 없다.

“내 생각에는 재단이 잘못한 것 같아. 그러려면 프로젝트를 하나 줄여야지 전부 1억씩을 깎으면 모든 행사가 부실해져서 어떻게 하나?” 그리고 내가 덧붙였다.

“내가 올 연극제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무대에 서봐야 교통비도 안 나오는 축제에 어떻게 참가를 하겠어? 자기도 한번 생각해봐!”

그러면서 “좌우간 누가 예산심사를 했어. 심사자 명단 한번 대봐.”

“안 돼요”하면서 웃는다.

“설령 재단이 돈이 없어 그런 요구를 하더라도 심사위원들이 예술가들일 텐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막고 나서야지. 할 수 없으면 프로젝트 중에서 하나를 제외하자고 해야지, 모두가 부실하게 이게 뭐야, 이게 말이 되나, 그걸 옳다고 맞장구쳐서 모든 프로젝트를 병신 만들어!”

“하여튼 올 연극제가 개판이 나면 문화재단이 책임을 져야 해, 연극판의 제일 큰 행사가 제대로 되겠어! 이건 재단과 심사위원들이 책임을 져야 해, 올해는 어쨌든 예비비라도 충원해 삭감하지 말고 대주고, 다음해부터는 미리 공표를 해서 행사가 축소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솔직히 내가 심사위원을 거론하는 게 굉장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혹 불똥이 거기까지 확대될 거라고는 생각 못한데다. 그것도 내가 이렇게 나오는 게 그는 무척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자칫 재앙(?)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그 후 1년이 지난 후에 그가 왜 나한테 아침 일찍 전화를 하게 됐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담자리에 있던 인터넷 신문기자가 토론의 주요 내용을 내가 발언한 양 바로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사실 나는 별로 말도 못하고 나왔는데, 상당한 양의 발언을 내가 한 양 기사를 만들어 보도한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걸 읽고 재단이 놀라 나한테 전화를 건거였다. 좌우가 그 후 예산은 복원되고, 그 후 박장렬회장은 최종원 국회의원님이 힘을 많이 쓰셨다고 나한테 말했다. 과연 그럴까? 민주화 이후에 공무원들의 기세가 얼마나 세졌는데,

지금 연극판은 예산이 깎여도, 그저 누가 알아서 얻어 오겠지 하는 무력증이 전부인 게 현실이다. 모두가 이런 태도로 일관하니 협회장도 박원순시장의 ‘눈치’만 살피다가 “그 적은 예산으로 53개 프로젝트를 소화했다”는 무용담(?)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라면 차라리 협회장을 ‘관피아’가 맡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권의 풍향에 일비일희할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공무원은 영원해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결국 1억 예산도 인터넷 ‘신문기자’가 얻어준 셈이고, 다시금 예산이 오른다면 이는 경향신문의 기사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할 짓인가? ‘지원금’을 얻어오는 능력발휘도 힘든 형편이라면 차라리 (우리 처지에서는) 협회장을 ‘공무원출신’이 해 ‘예산 걱정’이라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 우리는 언제 협회가 ‘관피아’ 라는 소리라도 들어보나! 정말 답답한 심정이다.

다행히 박원순시장이 재선되었으니, 이제는 ‘서울연극제’의 예산 걱정이라도 덜 게 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개인적으로 박원순시장과 절친한 사이인 연극인만 외려 지원금 혜택을 보고 있다는 부조리한(?) 소문이 이 판에서 사라지고 풍요로운 ‘서울연극협회’가 되기를 간곡히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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