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하는 자본주의
오민아
작: 고영범
연출: 박정희
단체: 극단 풍경
공연일시: 2014.10.17 ~ 2014.10.26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4.10.20 월요일
이제 자본은 인간을 지배한다. 자본은 한 인간을 살해할 수 있다. 또는 다른 인간의 삶을 살게 하거나 또 다른 인간이 되게 한다. 연극 <이인실>은 자본에 지배당한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공연은 이인실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해 이인실이라는 공간으로 도착한다. 관객은 이 과정에서 이인실을 지키는 인물들의 변화를 목격한다. 작가의 의도 또한 이러한 변화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인실의 처음과 끝을 지키는 인물은 진석과 미경이다. 막이 오르면 교통사고 나일론 환자인 진석이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음주운전한 공무원을 협박해 합의금을 받을 요량으로 여자친구 미경과 함께 몇 날 며칠을 그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양심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경은 이인실 병동에 남은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진석은 미경을 침대에 눕혀놓고 PC방 알바를 하기 위해 병원 탈출을 시도하거나 합의를 위해 방문한 공무원에게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한다.
이러한 풍경은 이지룡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급속도로 변화한다. 그는 요즘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수한 인물로, 입원이나 수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병원 입장에서 반드시 잡아 먹어야하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적의 없는 지룡은 병원의 말을 모두 믿고 값비싼 이인실에 머물게 된다. “털 뽑고 좀 지지면 된다더니” 겨드랑이 땀샘수술을 위해 전신 마취할 것도 권유받는다. 병원 측에서는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조차 행운이라며 기세등등한 태도를 취한다. 탈북자라는 지룡의 신분과 병원의 태도는 묘하게 중첩되며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해온 남한 사회를 일면을 풍자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자본이 인간보다 앞선 남한사회는 지룡이라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
진석의 비극은 이러한 지룡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지룡의 전신마취를 위해서는 보호자의 수술 동의가 필요한데 보호자가 없는 지룡을 위해 진석이 동의서에 사인을 한 것이다. 바로 이 형식적인 절차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커다란 허점이다. 마치 인간 없이 자생하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인간이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스스로가 생명력을 갖추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찌되었건 이 형식적인 절차로 인해 진석은 지룡의 죽음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긴 셈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병원 원무과 직원은 보호자인 진석에게 찾아와 적극적으로 지룡의 장기를 기증하라고 권유한다. 장례지원비용과 장기기증 장려금, 위로금을 대가로 장기를 병원과 직접 거래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진석은 혼란스러워한다. 이는 그가 정신병동의 이인실에 입원한 상태로 극이 결말을 맞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미경은 다르다. 자본에 눈이 먼 미경은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여겨오던 현실을 지우고 새로운 현실을 꾸려나가기를 꿈꾼다. 따라서 미경은 진석을 부추겨 지룡의 장기를 매매하는 것도 모자라 죽은 지룡의 통장을 훔친다. 미경은 진석에게 지룡의 삶을 살 것을 강요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형태를 갖춰가는 자신의 삶의 안락함을 잃지 않고자 몸부림친다.
자본의 힘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 이는 지룡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깊은 통찰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다. 진석에게 지룡의 유골함은 쉽사리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어떤 것이었지만 미경에겐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었다. 그 유골함은 한 인간의 존엄이기도 하며 부도덕한 현재이기도 하다.
속도감 있는 진행과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은 관객들을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룡의 죽음 이후, 진석과 미경이 지룡의 큰어머니를 찾아 시골로 가면서 급속도로 긴장감을 잃는다. 지룡의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들뿐 아니라, 이야기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흘러간다는 단점도 발견된다. 세 명의 탈북자들의 경우, 그들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의 웃음을 유도할 수 있는 감초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 줄기로 존재했다면 물질을 추구하던 인간의 목적전도현상에 대한 강렬한 풍자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몇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인실>은 꽤나 탄탄한 희곡을 바탕으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공연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들의 삶이 관객의 삶과 밀접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가장 큰 문제는 무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명동예술극장의 높고 깊은 무대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높이나 폭의 차이를 두어 좀 더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넓고 큰 무대 위에서 배우가 돋보일 수 있는 화술과 움직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희곡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 내지 성찰을 능가하는 감동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