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 릴레이 글 (1~27)
연극인 100인 릴레이 글 1
<연극의 무덤 대학로>
연극의 메카라 불리는 대학로에는 매일 밤(심지어 아침까지도) 수많은 공연이 올라간다. 하룻밤에 무려 이백 여 편. 지구상에 이렇게 연극보기를 좋아하는 도시가 또 어디에 있을까. 과연 이 굉장한 연극동네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아마도 서울대 문리대가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한 후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문예진흥원, 동숭미술관 등의 예술관련 건물이 들어서던 70년 후반부터 80년 초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연극의 메카로 자리 잡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 붉은 벽돌로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르코예술극장. 1981년에 개관을 하였으니 벌써 35살이다. 필자도 1980년 초 고등학생 때 이 극장에서 단체로 연극을 관람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숱하게 많은 명작을 배출하며 이 극장의 정신적 주춧돌을 세우신 분들은 지금 연극계의 원로선생님들이 되셨고, 그분들이 아르코 극장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지금의 우리에게 넘겨준 자산이 서울연극제이다. 그러니 서울연극제와 아르코극장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울연극제를 아르코극장에서 내쫓는단다. 더 황당한 것은 이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 연극을 보호하고 지원하여 한국의 연극인과 국민의 문화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겠다는 문화예술위원회 소속 한국공연예술센터라는 사실이다. 2015년 서울연극제의 프로그램 중 일부가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부합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될 것이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일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문화예술을 지원한다고 모인 사람들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아버지를 내동댕이 쳐놓고는 엄정한 규정(규정집이 실제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함)에 따라 처리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역사와 뿌리를 송두리째 패대기치고 새로운 것 만들자는 작태는 저 옛날 총칼 들고 국민을 겁박한 군사정부가 한 짓 아닌가. 그러나 역사가 쌓이지 않는 연극은 곧 죽는다. 우리의 역사 인식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린 매일 저녁 진력나게 목도한다.
대학로의 저녁 풍경. 호객꾼, 소위 삐끼라 불리는 콧수염 보송보송한 청소년 알바생이 혜화전철역 출구를 나서는 나에게 다가와 끈질기게 말한다. “싼 거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한 시간 단위로 공연을 하기 때문에 얼마 안 기다려도 됩니다.” 내가 물어본다. “혹시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아르코 대극장에서 하는 서울연극제 같은 공연은 없습니까?” 즉시 청소년 알바생이 영악하게 대답한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하는 척 한다. 잠시 후) 그 연극은 이미 티켓이 매진됐다는데요, (다른 티켓을 꺼내 보이며) 이 연극은 기다릴 필요도 없고 정말 죽여주게 웃깁니다. TV나오는 개그맨들 많이 나와요.” 내가 다른 거 보겠다고 발길을 돌리니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내게 했던 똑같은 말을 건넨다. 결국 한 사람이 그 청소년 알바생을 따라간다. 따라간 그 사람이 무엇을 볼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사람이 다시는 연극을 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슬프다! 자본주의의 최말단에 존재하는 앵벌이는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호객행위를 하고 그 알바생을 따라 극장에 갔다 온 사람은 연극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독백을 되뇐다. ‘연극이란 무엇일까?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사회가 지닌 불가사의한 삶의 양상 따위를 인간의 진실한 말과 행동을 통해 실시간으로 구현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는 무대예술.’ 정말 이걸까! 다음 날 대학로의 아침 풍경. 연습하러 가는 길인데 중고생들이 마로니에 공원에 바글바글하다. 뭐냐고 물었더니 야외수업의 일환으로 연극 단체관람을 나와 있단다. 그 아이들에게 무얼 보러 왔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라이어 라이어>, <갈갈이 패밀리>라 한다. 전자는 한 남자가 두 여자와 바람을 피려고 온갖 거짓말을 둘러대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연극이고 후자는 요즘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본부의 개그콘서트 아종이다. 일과가 끝난 오후에 성인들이 연애소동극을 보던 개그콘서트를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든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이걸 아침부터 교육의 목적으로 본다니 매우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이들을 인도하고 온 선생님들의 공연선택기준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진실한 말과 행동을 통해 관객의 감동을 자아내는 연극은 폐기처분된 것인가? 오호통재라!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교육의 최전선에 있는 선생님들이 개그콘서트를 연극이라고 선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화예술위원회 한국공연예술센터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감동을 자아내는 우리 연극의 뿌리를 키워 토양을 다시 다져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뿌리를 파헤쳐 버리는 꼴 아니오? 정말 연극을 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원금 몇 푼 들고 예술가들 머리 위에 올라 앉아 심사한다고 개폼 잡는 거 당장 때려치우시오. 대신 당장 거리로 나가 삐끼와 싸우든 경찰을 동원하든 국회의원을 데려와 호객행위금지법을 제정하든 학교를 찾아가 선생을 설득하여 연극을 홍보하든 어떻게든 간에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연극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널리 홍보해주시오. 당신들이 바라보는 일개 연극인과 일개 연극단체들은 그럴 힘이 없다오. 당신들은 권력과 조직이 충분히 있잖소. 그 좋은 권력 어따 쓰오? 우리네 연극의 뿌리가 잘못 자랐으니 이제 자르네 마네 심사하는 엄한 데 쓰지 말고 제발 관객개발이나 구립극단 설립 지원, 극단 지원 활성화, 아르코 등 공공 극장 입장료 인하 같은 생산적인 곳에 힘써주시오. 왜냐하면 당신들은 국민의 세금을 먹고 사는 공무원들이니까. 국민에게 좋은 연극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당신들은 사정기관이 아니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명심하시오.
그리고 마지막. 이 땅의 연극예술가들이여! 우리가 오늘 저들 권력의 횡포에 입 다물고 앉아있다면 내년쯤엔 돈 많은 녀석이 나타나 우리를 무릎 꿇리고 재갈 물릴 것이오. 속절없이 굴종하여 짹 소리도 못 내고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작은 소리라도 내시오. 우리 시대에 이곳 대학로를 연극의 무덤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그리하십시다. 연극에 시대저항정신이 빠진다면 그것이 어찌 제대로 된 연극일 수 있겠소!
2014년 11월 20일
극단 인어 대표 최원석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 / 극단 완자무늬 대표 김태수
<다시 고개를 쳐드는 완장의식>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 이상한 전쟁이 시작 되었다. 36회 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서울연극제’를 대관심사에서 제외/탈락시켰다. 난감하다. 황당하다. 연극인 전체를 모독하는 일이다. 상황이 빨리 종식되길 바라나, 저들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리 없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에 기대어, 우리 연극인들은 연극정신을 되찾는 희망의 기회로 역전 시킬 준비를 하자. 여기엔 행동이 필요하다.
이 정부 들어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다. 그게 우리 대학로 연극인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저들은 나중에는 ‘아님 말고’식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식으로 치고 빠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유벙언일가로 몰아붙이면서 교묘히 초점을 흐리듯이. 불리하면 그 원인을 전정부나 전전전 정부 탓으로, 술에 물 타고 물에 술타기하는 수법을 쓸 것이다.
수구들의 식민사관과 사대주의 냉전의 사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윤창극후보가 하나님의 믿음의 세상에 빌붙어 식민세상을 미화하고 당연시하는 발언, 김명수 교육부장관후보의 모든 게 교육이라는 아전인수식 인생관, 이인호 한국방송공사이사장의 김구 뒤틀기, 국정원의 간첩 만들기, 법대로를 앞세워 시민들 탄압하고 괴롭히고 겁주어 입 틀어막기, 관피아, 해피아, 군피아….. 대명천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서울 연극제는 심사대상이 아니다. 시기의 조율이 필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연극단체들이 접수를 하고, 서울연극제와 일반 선정 단체와의 조율을 하는 일이 그들이 할 일이다. 그런 일을 서울연극인 3500명의 축제를, 몇 십 명에서 십여 명 되는 일반극단하나로 취급하는 꼴은 비상식적이다. 올해는 서울연극제 기간 동안 53개의 공연이 올라갔다. 이것만 보아도 연극제와 일반극단의 대관신청의 사안은 다른 것이다. 그걸 동일시하려는 억지가 이런 사태를 낳은 것이다.
심사에서 탈락된 또 다른 이유로 예술위 위원장의 ‘엄중한 잣대, 올바른 잣대’를 운운하는 엄정함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잘 들여다보자. 그 자체가 억압인 것이다. 원칙과 상식을 앞세우고 법 대로를 앞세우며, 자신들이 하는 일은 로맨스고 남이하면 부정인 아전인수식 행정의 전형인 것이다. 그 잣대를 왜 자신들한테는 적용하지 않는가! 굳이 낙하산식의 인사로 한정하진 않겠다.
이제는 나이든 어른 축에 끼는 사람으로, 이 나이까지 현장을 지켜온 연극인으로, 쎈터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행정 직원한테 면담을 요청하고 기다리고 대응할일에 자괴감이 든다. 하물며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나 후배들한테 미칠 모멸감은 두말하면 무엇하랴! 당사자들은 이런 파급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수인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갑도 아닌 것들이 갑의 행세를 흉내 내는 ‘완장질’에 불과한 것이다. 갑은 국민이다. 모두가 갑이다. 그러니 갑은 없는 것이다. 서열을 세우고 갑,을,병을 따지는 것 자체가 지배논리다. 우리가 인정해야 존재하는 것이 갑이다. 오해하지 마라. 착각하지 마라.
세상이 자꾸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삭막해지는 것 같다. 그걸 막고 방향을 바꾸고 건강하게 ‘사람 사는 세상’ ‘자연과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고 저항하는 일이 우리 연극인들의 본분일 것이다. 제3세계 이주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의 여성들한테 대하는 지금 우리 행동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종교단체나 시민단체들의 노고에 고마울 따름이다. 시어머니노릇 더하는 며느리, 식민경험이 있는 우리가 이주노동자들한테 더욱 학대적이고 더욱 비인간적으로 구는 처사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어쩌다 우리 국민성이 이토록 포악해졌는지 무섭다. 막가파식이다. 이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처사도 그런 현상과 그런 심리에 다름 아니다는 인식이 확고해진다.
서울연극제를 서울연극인을 무시하는 처사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 문제가 공적사안으로 넘어가 공적으로 대해야 하니, 공인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과 ‘가타부타’ 말을 섞자니 불쾌하다. 우리 연극인들은 등장인물이 하는 말의 속마음과 속사정을 꿰뚫어 보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엄중한 잣대’ 운운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다. 당신들의 속사정을 모두가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를 바보로 아는가.
당신들은 뭔가 오해하고 있다. ‘어떤 자리’는 당신들이 잘나서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니다. 문화 예술인들을 위하고 그 일이 결국 국민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술위원회는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자리다. 특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우리 연극현장인들이 서명운동을 해가며 발 벗고 나서서 새롭게 세운 위원회다. 현장인들이 중심이 되어 문화행정을 주도해야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 그게 덫이 되어 우리를 물고 있으니, 주인을 물려고 대드는 개 같은 행색이 되고 말았다. 짐승 같으면 짐승이려니 하고 넘어 갈 수 있지만 이건 인간세상이다. 인면수심을 맞이하고 있으니 이런 적반하장이 또 있으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처사는 한국연극 100년과, 40년을 바라보는 서울연극제와 ,3500명 회원들의 서울연극협회와 서울연극제를 기다리는 서울시민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몰 역사, 몰 개념, 몰 행정, 몰상식적 처사임을 만방에 고한다.
2014년 11월 21일
극단 완자무늬 대표 김태수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3 / 정범철
<진상을 좀 소상히 밝혀주시길! 진상 좀 그만 부리시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속이 답답합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모든 연극인들이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니, 모든 언론들이, 비연극인들조차 목소리를 보탭니다. 왜 저러냐고…. 속된 말로 진상피우고 있다고. 35회 역사의 연극제를, 3500명이 참가하는 축제를 어떻게 서류가 미비하단 이유로, 하나의 극단으로 치부하며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지, 그 심사 기준의 잣대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현재의 사태에 대하여 얘기해봤자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입만 아픈 상황이니 제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면서 연극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아르코 대극장이 문예회관으로 불리던 시절, 그곳에서 올라가는 연극들을 셀 수 없이 보며 미래의 저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연극인이 되었고, 연극을 더 잘하고, 오래 하고 싶어서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극단을 만든 다음, 제가 정한 목표는 바로 서울연극제에 열심히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연극제가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배님들께 여쭙겠습니다. 아닌가요? 제가 착각하는 것인가요? 35년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연극제가 우리나라에 또 있나요? 저는 서울연극제 참가를 위한 서류심사에서 탈락하는 것도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하며 매년 준비를 하고 신청했습니다. 젊은 극단이 참여할 수 있는 ‘미래야솟아라’ 부문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자유참가작’ 부문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극단 이름과 작품이름을 홍보할 수 있어서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올해! 공식참가작 선정에 상까지 받으며 분에 넘치는 박수를 받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후배들에게 서울연극제에 꼭 신청하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인 관객만 앉혀놓고 자기 위안만 난무하는 공연이 아닌,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평가를 들으며 단단해질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지금 이게 뭡니까. 지금껏 우리나라 연극의 역사를 창조하고 이어오던 극장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제를 단 하루도 공연할 수 없다니요! 1년은 365일입니다. 서울연극제는 30일정도 하지요. 이게 왜 안 되죠? 이런 결정을 내린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당신들은 연극인입니까? 아니면 연극을 싫어하는 예술행정가들입니까? 알 수가 없지요. 심사를 누가 하셨는지 공개하지도 않고, 단 몇 줄의 심사평조차 하시지 않으니까. 그런데 심사위원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과정이 공정하다면 공개 안 할 필요 있나요? 오히려 공개를 안 하니까 불신이 생기는 거 아닌가요? 그냥 후배로서 여쭙겠습니다. 저희 후배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결정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속 좀 시원하게 진상을 규명해주십시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진상을 규명하지 않기로 유명한 국가가 되었나요? 진상 좀 그만부리시고 부디 제발 진상을 규명해주시길 강력히 촉구합니다!
2014년 11월 22일
극발전소301 대표 정범철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4
< 아! 연극이 죽는다! 불편하고도 아주 소박했던 그것! >
서울연극제는 일 개의 신청 건일 수 밖에 없다!
5명의 심의위원 전원 만장일치,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유인화 센터장/ 김의숙 공연운영부장)
이것은 명백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연극 탄압이다. 서울연극제 뿐만 아니라 연극계 전체의 대참사다. 이번 사태에 대한 반발로 한국공연예술센터장에게 직접 답변을 듣기위해 100여명 가까이되는 연극인이 아르코대극장 로비에 모였고, 거기에 모인 연극인들 앞에서 직접 설명한 유인화 센터장과 김의숙 공연운영부장의 대답이 바로 이를 증명함 셈이 되고 말았으니 그 옹색한 형편에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연극계 밖의 누가 들을까봐 오히려 걱정이 되고 부끄러워서 함부로 떠들며 흉을 보기에도 힘겹다. 우리의 현실이 이러하다는 것인데 누워서 침을 뱉으랴! 연극계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관리자들은 심의위원들을 초청해놓고서 과연 무슨 작당들을 했다는 말인가? 작당 아닌가? 공정한 심의의 반대말은 뭔가? 가이드라인 제시가 공정한 심의인가? 전년도 축제 자료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꼭 읽어보고 설명을 들어봐야 그 축제의 개념을 알 수 있다면 그 전문심의위원들은 뭐하는 사람인가? 끝까지, 작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걸 우리가 믿어줄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심의위원들 다섯 사람을 공개할 수 없다는 원칙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원칙은 도대체 누구를 위함인가? 한국공연예술센터는 뭐하는 곳인가? 각성하라!
‘특별히 엄중한 잣대, 바른 잣대’ 라는 말, 그리고 ‘규정대로 하였다’라는 말은 도무지 당신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방도로 보이질 않으니 오히려 도움을 청해온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겠다. 현장 연극인의 말을 경청하라! 그 높고 경직된 자리에서 서둘러 내려와서 내면의 성찰을 관통하고 그저 사람 되기를 꿈꿔라! 예술인 혹은 예술행정가가 되기 이전에 적어도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는가! 심의위원들은 각성하라!
‘서류기제미비’라는 이유는 또 무언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그동안은 어땠나?>를 적어서 제출해야하는 신청서를 받아놓고 도대체 어떻게 엄중한 규정을 들이댈 수 있는가? 선정된 다른 축제들은 또 어떻게 그 빈 공백을 채웠는가? 자료에 의하면, 대관신청기간까지 공식적으로 결정된 사항이 없을 경우, 그 어떤 ‘일개 단체’에서도 거짓으로 공백을 채워놓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설명할 건가?
차라리 ‘그래왔었다던’ 관행인 즉, 축제기획 -> 대관신청 -> 참가작품 최종결정 -> 축제지원금 결정 -> 축제진행 -> 축제평가 등의 ‘제도적인 결함’을 합리적으로 꼬집는다면 모를까 이러한 걸 다 무시하고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축제의 대관결정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다. 제정신인가? 그래서 수퍼울트라매가톤급 <갑질>이라고 흉을 보는 것이다. 각성하라!
덧붙여서, 서울연극제는 35년동안 지속되어왔다는 그 자체가 이미 신뢰성을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봄의 제35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8편의 관객수가 9천 2백이고, 서울연극제 전체 53편의 관객수는 1만 8천명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잣대로 공공성과 신뢰성을 말할 수조차 있는가?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관객들에게도 역시나 폭력적인 결과이며 명백한 문화 테러다.
서울연극제를 꼭 심의해야한다면, 기획의도와 목표를 현장연극인들과 예술경영 주체가 공유하고 함께 발전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연극제 참가작 1개 작품(50대 연기자그룹 공동기획작 ‘레미제라블’)에 대해 공익성과 신뢰성을 거론하는 일은 직권남용이며 월권행위가 맞는 말이다.
또한 공식적인 답변에서 보이듯, “지난 제35회 서울연극제에서 특정공연에서 모금행사가 이루어졌다.” 에 대해서도 그 사실관계를 잘 따져봐야할 일이다. 누가 모금운동을 진행하였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행사종료 후 센터의 해명요구에 정말로 불응하였는지 정확히 알아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공연예술센터의 유인화센터장과 김의숙공연운영부장! 당신들은 엉뚱하게도 사실을 왜곡, 폄훼하고 있다. 각성하라!
이상은, 서울연극협회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을 천천히 살펴보면 금새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고 이 글은 서울연극협회의 대변인일지라도 말로 설명하기가 매우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며 매우 상식적인 논리다.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저지른 행동이라면 모두 사퇴하라!
참고로, 2014년 제35회 서울연극제 현황을 인용한다.
제35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8편 (희곡아 솟아라 에서 올라간 1편 포함)
미래야 솟아라 8편
자유참가작 8편
기획초청작 2편 (2013년 전국연극제 대상수상작, 2013년 일본 젊은 연출가 콩쿨 수상작)
공동기획작 1편 (50대 연기자 그룹과 공동기획)
창작공간예술축제 26편
이상 53편의 크고 작은 연극이 올려졌다.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연극축제이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는 공익성을 들이대면서도 갑자기 관객수익률 1%, 4% 운운하는 한국공연예술센터에 묻고 싶다.
서울연극제 작품들을 가지고 관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라는 말인가?
말마따나, 공기업을 기업원리에 따라 운영하자는 논리를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과 뭐가 다른가?
연극인들이여 총궐기하라!
이번 사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과 창작활동에 여념이 없는 연극인 모두에게 반문화적 테러를 자행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각성하라!
정부지원금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연극계 뿐만 아니라 전체 문화예술인들은 모두 다 한 목소리로 탄원해야 마땅하며, 이번 연극계 사태에 대한 책임은 바로 당신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직권남용! 이란 말이 나오면 불편한가?
이제 직권남용! 이란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이 필요하다.
경청하라!
아무런 소통과 공유없이 연극축제를 망치는 일은
관리자의 직권남용을 넘어서 자격미달이다!
공무원의 태만함과 안일함 그리고 상식의 결여, 무지의 극치다!
상급기관은 이번 사태를 묵과하지 말고 철저히 조사하라!
감사권을 발동시켜라!
이번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습하라!
그래서 서울연극제 심의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연극인들이여, 다함께 일어서자!
우리가 연극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연극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 개인이 예술정신을 위해 멀리 달려간다고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정신의 완성을 위해서 지금의 이 연극탄압의 역사를 목도하고도 그냥 모른 척 한다면 우리는 후세에게 무엇을 남기며 가르칠 수 있는가?
존경하옵는 연극계 원로선생님들! 선배님들! 후배님들!
이번 사태에 눈과 귀, 입을 닫고 계신다면 연극계 어르신들이 일궈놓은 그 모든 훌륭하신 업적들이 모두 싹쓸이 된다는 사실을 멀지 않은 미래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하려는 제자들과 그동안 연극정신을 꽉 움켜쥐고 달려온 후배들에게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극인이라면!
이번 사태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극처럼 살았다!
우리는 얌전하고 폼나던 연극 그 자체다!
우리는 그저 연극 일 뿐이다!
그러므로 연극인들이여 행동하자!
2014. 11. 23.
극단 작은신화 + 좋은희곡읽기모임 절대배우장용철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5 / 오태영
<예술탄압의 신호탄>
한 그루 푸르른 소나무를 바라보라. 그 소나무에서 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면 우리는 뿌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는 한국문화예술 위원회에서 큼직한 사고를 쳤다. 서울 연극제를 대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이번 태도는 한국 연극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처사로 받아들여지며, 더 나아가 한국 예술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으려는 분서갱유의 신호탄으로 느껴진다.
“모든 예술가는 땅속 깊이 묻어버려라!” 저 높은 곳에서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인지, 담당 국장의 과잉충성이 불러온 코미디인지 모르겠으나, 눈먼 충성 차원의 실수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럼 한국 연극의 뿌리는 어디인가.
친일연극과 반일연극이 교차되던 암울한 식민지 시대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좌우익 이념 연극이 치열하게 대치하던 해방 공간으로 잡아야 할 것인가.
우리 연극의 뿌리를 더듬어 가자니 처음부터 애매하고 우울하구나.
그럼 서울 연극제로 시기를 좁혀보자.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을 만난다. 그리고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낸다. 7.4 남북동동성명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담고 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7.4 공동성명 이후 주체사상을 앞세워 김일성 1일 독재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고, 남쪽은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수순을 밟게 된다.
어찌됐든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은 모란봉 극장에 초대되어 연극 한편을 보게 된다.
아마도 <꽃 파는 처녀> 라 짐작된다. 그리고 돌아와 대통령 박정희에게 전한다.
“각하, 연극 아십니까? 평양에 가니 뭘 보여주는데 대단했습니다.”
“연극? 딴따라들 얼굴에 분칠하고 뭐 이러는 거?”
“각하! 경제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이 융성해야, 다른 나라에서도 대접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산 기슭에 장충동 국립극장이 들어서고, 문예 진흥원이 발족되고, 드디어 1977년 가을, 국가에서 처음으로 예산을 지원 <대한민국 연극제> 가 거창하게 치러진다. 이것이 서울 연극제의 시작이다.
시작이 정치적이 됐든 북한 연극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졌든, 그 뒤를 이어 지방 연극제 (지금의 전국 연극제) 등 각종 연극제가 줄을 잇고 오늘의 연극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그간 시행착오도 많았고 잡음도 있었지만 35년 이란 역사만큼 좋은 창작희곡과 역량 있는 연출가를 배출, 우리의 연극이 해외로까지 진출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뿌리를 뽑겠다? 정신 나간 예술행정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어떤 국가든 우매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예술을 탄압하기 마련이다. 역사는 늘 그래왔다. 시끄러운 예술가의 입이 국민여론에 한 몫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기능 중 하나가 <비판>에 있다. 정부권력의 시녀가 되어 웃음을 파는 예술가도 있지만, 모든 예술가가 입을 모아 한 결 같이 국가 정책을 찬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 그럼 대한민국은 정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이나 기능이 있는가?
우리나라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제도가 원만하게 기능하는 국가인가?
국회의원을 믿을 수 있고, 판검사를 믿을 수 있는가.
국가 권력을 그나마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은 언론과 종교와 예술이다. 그런데 언론은 믿을 수 있는가? 종교인을 믿을 수 있는가? 마지막 남은 건 바보들의 집단 예술가 밖에 없다.
나는 이미 7-80 대에 탄압을 받아 본 작가로써 절망이 뭔지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치판 분위기는 예술을 탄압하던 군사정권 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다. 평생에 한 번이면 됐지, 또 다시 그런 예가 닥친다면 나는 이 땅에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작가가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한다면, 발언할 수 없다면, 그 터전을 잃는다면, 작가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오래 살 생각도 없다. 내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도록 투쟁할 것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가 예술과 권력의 치열한 싸움이 되기를 바라겠다.
2014년 11월24일
극단 전설 극작가 오태영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6
< 또 가만히 있으라고? >
내년에 개최될 제36회 서울연극제가 아르코예술극장의 대관심의에서 탈락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연극인들’이 ‘연극인회관’에서 쫓겨난 것이다.
수십년간 연극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연극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바로 그 연극인들이 쫒겨난 것이다.
문화예술위원회 산하 공연예술센터의 장과 심의위원 몇몇이서(반발이 두려워서 절대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결정한 일이란다.
그리고는 어떠한 해명과 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겠단다.
감히.
35년을 이어온 한국 연극의 전통과 역사를!
그 어떠한 상의와 조율도 없이 한순간에 휴지통에 던져버리고는!!
모든 것이 엄격하고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 결정된 사항이니 그렇게들 알고 ‘가만히 있으라’한다.
나는 이번 사태의 배후에도 분명 어떤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의 작당모의가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화예술위원장이 됐든 공연예술센타장이 됐든 누구든지간에 독단적으로, 그것도 일개단체도 아닌 ‘연극인 전체’를 상대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이유가 없지않은가!
아니라고?
근거도 증거도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뭐 그들의 모의를 직접 보고 들은건 아니니까 정말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어떠한 세력도 개입한 것이 아니라면 이건 정말 더더욱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연극계가 그렇게 우습고 만만한가?
일선기관 공무원 한두명의 재량으로 서울연극제라는 전체 연극인의 35년 역사를 잣대질할 만큼?
‘문화예술위원회’인가 ‘문예총독부’인가?
‘공연예술센터’인가 ‘공연예술감사원’인가?
문화예술위원장과 공연예술센터장은 연극계 전체를 경시하고 모욕한 것에 대해 즉각 사과하고 사퇴하라!
이번 사태가 어떤 세력의 외압에 의한 것이든 몇몇 공무원의 오만과 무지에 의한 것이든!
나는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명백한 연극탄압에 대하여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규탄하고 싸울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2014년 11월 25일
연극집단 반 배우 정성호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7
<진정 이 글을 쓰게 하십니까?>
제 글이 7번째가 될 겁니다. 정말이지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써야 하는 현실에 비통한 심정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글을 쓰기 전 사태가 해결 될 거라는 소박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서울 연극제의 전통성과 서울 연극제가 지닌 의의, 아르코예술극장의 상징성, 연극의 현재성, 갑의 횡포 등 앞선 글을 통해 아실 겁니다.
내년이면 36회를 맞이하는 서울 연극제 대관 심의 탈락이라는 작금에 사태에 이건 아니라고 분명 잘 못 됐다고 다시 검토하라고 외치는 연극인들의 목소리가 안 들립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마음을 열고 들으십시오. 마음이 안 열리면 귀라도 여십시오.
직접 찾아가 코앞에서도 말을 했으니 들리긴 했을 터인데 지금까지도 시정이 되지 않음은 말이 말로서 가치가 없거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시나 봅니다. 예술의 기본은 소통입니다. 소통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예술을 할 것이며 예술행정을 하겠다 하십니까?
엄중한 심의를 하셨다고요. 그 전까지는 심의를 하시면서 편향된 선택을 하셨었나요? 이전에 대관심의를 통과한 팀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서울 연극제가 연극의 터전인 대학로에서 연극의 상징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올리질 못 할 만큼의 수준인가요? 35회 연극제를 치룬 모든 연극인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창작극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는 서울 연극제를 폄하하는 건 이 땅에 창작극을 만드는 연극인들을 모독하는 겁니다.
말 안 듣는 아이 길들이기 위해 매를 듭니다. 매가 무서우면 말 들으라고… 매가 통하는 것도 사춘기 이전까지입니다. 서울 연극제는 매 든다고 무서워 말 듣는 아이도, 반항하는 사춘기도 지나 벌서 35회나 지났습니다. 그래서 연극인들은 서울연극제를 축제라 부릅니다. 연극 현장에서 시대의 정신을 지키겠다고 창작으로 날 밤을 새우는 선배, 동지, 후배들의 의식세계를 공유하며 예술 세계를 향유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응원을 하는 장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예롭고, 그러기에 갈망하고, 그러기에 지키려는 겁니다. 무슨 말을 들으라고 듣기를 바래서 매를 든 겁니까? 왜요 말로해선 이길 수 없는 연극인만의 범접할 수 없는 논리가 있던가요? 밥그릇 뺏어도 꺾이지 않는 연극인의 생리가 무섭던가요?
심의를 하신 심사위원 분들이 누군지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글 밥 먹으며 지켜온 연극이라는 현장에서 선생님이라고 인사드렸던 분들 중에 혹 계시다면 가슴이 찢어질 거 같습니다. 만약 연극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들이 심의를 했다면 심의위원 선정부터가 불공정합니다.
연극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연극인입니다. 연극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도 연극인이고 연극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도 연극인입니다.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도 연극인입니다. 연극인이 없는 연극이 존재 할 수 있을 까요? 서울 연극제는 일개 단체의 행사가 아닙니다. 집행부의 정치색에 따라 서울연극제의 가치가 달라집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본질을 흐리지 말아 주십시오. 서울 연극제는 연극인들이 만드는 겁니다. 연극인들이 그 가치를 만들고 지켜내는 겁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미래도 그럴 겁니다. 연극의 역사를, 시대의 정신을 기록하는 연극인이 만드는 서울 연극제 함부로 대하게 두지 마십시오. 연극인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습니다.
2014년 11월 26일
극작가 김수미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8
<현 정부의 문화정책, ‘문화융성’에 역행하는 한국공연예술센터!!>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는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기반 구축이다.
이 가운데 문화융성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문화융성.
문화융성이란 무엇인가.
문화는 좁은 의미로 예술을 의미하기도 하고, 보다 넓게는 대중예술,
생활문화를 포함하며,유네스코(UNESCO)에서는 문화를
예술과 문자뿐 아니라 삶의 양식, 인간의 기본권, 가치체계, 전통,
믿음으로 넓게 정의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융성을 인문, 예술, 콘텐츠, 체육, 관광 등 문화 분야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예술가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며, 시민들의 문화향유권과 사회 내의 문화 다양성이 확대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문화 예술인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며
이러한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우자
정치적 성향을 떠나 환영하였다.
그리고 기대 또한 컸다.
그런데 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반문화적 폭거가 얼마전 발생하였다.
그 어떤 이유로도 납득 될 수없는,
35년 전통의 서울연극제가 아르코 대관심사에서 탈락한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대관심사에서 탈락한 게 뭔 대수냐고.
너네가 독점한 것도 아닌데 다른 데서 하면되지 뭔 그리 호들갑이냐고.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와 무식에서 나오는 말이다.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전통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새로움을 만드는 혁신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오래된 것을 지키는 전통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다.
서울연극제의 아르코 개막은 전통이다.
연극에 있어 아르코는 고향이자 집 같은 곳이다.
연극계 최고의 잔치를 제 집에서 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쫓겨나서 열어야 한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납득될수 없는, 아니 용인될수 없는 일이다.
35년 전통의 서울연극제는 이 나라가 지켜야할 문화 예술의 가치이며
서울연극제가 매년 안방으로 삼아 치러왔던
아르코에서의 개막 전통 또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이다.
이 전통은 타협의 대상도 아니며 심사의 대상도 아니다.
문화 예술은 특정의 집단이 그들의 목적 수단으로 사용할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문화 예술을 불순한 의도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가치를 볼모 삼아
문화 예술인을 길들이려하는 행위 또한
더더욱 해서는 안된다.
문화 예술과 문화 예술인을 함부로 대하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서울연극제는, 아니 이 나라의 연극은,
연극인들은, 이 나라가 지켜야할 가치다.
문화융성은 이들을 지키는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정부는 이 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말살이 아닌 문화융성이 진정 맞다면
그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이번 사태의 원인을 찾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주길 바라고 앞으로는 제대로 된 문화융성을 제대로 시행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전통은 끊을 수 있을지언정
정신은 끊지 못한다.
제 아무리 억압하고 누르려해도
서울연극제는, 아니 이 나라의 연극은,
연극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연극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7일
– 극단 드림시어터컴퍼니 배우 양권석 –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9 / 극작가 연출가 조광화
<훗날, `그 사건 이후로 서울연극제는 사라졌다`라는 기록이 남길 바라는가?>
서울연극제는 현 서울연극협회 집행부의 것만이 아니다.
서울연극제는 현 문화예술위원회나, 한국공연예술센터의 것만도 아니다.
서울연극제는 탄생한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전체 연극인들과 관객들의 재산이다.
올해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대충 넘어가자`거나,
이 집행부는 맘에 안드니 하지 말자`거나
이번 참가신청한 단체들이 변변찮으니 쉬어가자`거나
서류가 미비하니 자격이 없다`거나
이번 사건은 저들의 책임이다`라고 할 일이 아니다.
서울연극제는 우리 모두의 재산이고, 가치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 부족하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쳐나가고 발전시켜야할 책무다.
올해는 부족하니, 내년엔 잘해….
이번에는 맘에 안드니 쉬고, 다음번에 또 도전해봐…
그리 말할, 어느 한 단체의 어느 한 행사가 절대 아니다.
뭔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면, 누가 먼저 알았든 간에,
보완하고, 더 준비시켜, 어찌되든 최선을 다해, 막을 열어야 한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이나 고결한 신분의 평가를 얻어야,
개최할 가치를 얻는, 그런 사업이 아니다.
마치, 이 나라의 국회가, 이 나라의 행정부가, 이 나라의 공무원들이, 일을 잘 못한다고, 외교를 잘 못했다고, 정책을 잘 못한다고… 문을 닫을 수 없듯이… 서울연극제도 계속되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정책을 보완하고, 바른 인재를 기용하고, 다듬어 나가야할 일이다.
맘에 안든다면 고칠 일이지, 하지 못하게 할 일이 아니다.
서울연극제를 잃는다는 것은 연극인에게 큰 상처다.
연극의 상징을 잃는 일이다.
이 나라에, 연극쟁이라는 언저리에 있다면,
그 누구라도 서울연극제가 잘 되도록 노력하거나 기원할, 유형 무형의 의무가 있다.
과연, 서울연극제가 열리지 못한다고, 연극인 전체가 상처받을 일인가?
그런 의심이 든다면, 그저 지켜보거나, 방관하거나, 외면하거나, 사라지게 버려두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평가를 들을 각오를 하라.
`그 사건 이후로, 서울연극제는 사라졌다. 연극인들은 막지 못했다.`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연극인은 누구인가?
바로 나고, 여러분 하나하나이고, 서울연극협회고,
무엇보다 공연예술센터 관계자와 심의위원이고, 문화예술위원회다.
그런 날 오지 않길 바란다.
2014년 11월 28일
극작가 연출가 조광화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0 / 극작가 노경식
<한국연극의 屠殺行爲(도살행위)>
35년 星霜(성상)의 나이를 먹은 “서울연극제”는 오늘날 서울의 대학로 거리를 한국연극의 세계적 메카로 만들어내고 성장, 발전시켜 온 연극예술의 뿌리이자 대들보요 참얼굴이다.
연극예술에 관련돼 있거나 관심있는 서울 시민치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터. 우리네 서울연극제의 역사와 빛나는 전통은 그만큼 자랑스럽고 훌륭하고 대단한 것.
그런 서울연극제가 하루 아침 청천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아무런 사전 예비정보나 납득할 만한 양해사항도 없었다.
주무부서인 문화예술위원회(한팩)는 이른바 ‘특별히 엄중한 잣대’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심의규정(대관)이라는 것을 들이대며, 망나니 칼짓(?)하듯이 30여 개가 넘는 극단들을 모조리 한꺼번에 탈락시켜 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한국연극의 屠殺行爲(도살행위)에 다름아니다.
이제 서울연극은, 한국연극은 枯死(고사) 일보 직전에 다다른 셈이다.
그동안 선배 어르신들에게서 이어받아 고생스럽게 피땀 흘리며 쌓아올린 극예술의 금자탑이 경각에 이르고, 만사휴의에 그치는 것은 아닐지? —
아무래도 그 속 깊은 黑幕(흑막)과 眞意(진의)는 또한 다른 데 있는 듯.
모름지기 예술은 예술의 논리와 공식으로 풀고, 다른 정치적 음모나 논리가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정부의 5대 국정지표의 한 가지가 ‘문화융성’이라고 감안할 때,
음험하고 사뙨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다시금 예술인들을 제자리에 갖다놓고,
부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굴러갈 수 있게 잘 밀어주고 도와주기 바라는 바이다.
2014년 11월 29일
극작가 노경식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1 / 연극인 이해성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서울연극제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한 마디로 이건 사건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황담함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두 번째 드는 생각은 궁금함이었다. 왜 그랬을까?
극단 대표자 회의에서 서울연극협회의 상황보고를 들어보고 한국공연예술센터측의 해명과 한국문화예술위의 보도문을 살펴보았다.
센터측에서 말한 두 문장이 뇌리에 남았다.
엄중한 잣대. 일개 단체. 황당함과 궁금함은 더 확대되었다.
엄중한 심사기준 적용이라면서 심사위원과 심사과정을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다 잘 알아서 했으니 결과에 불평하지 말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 폭력적이다. 심사위원이 무용관계자만 다섯 명인지 행정 관료만 다섯 명인지 알 수가 없다. 연극계 인사가 아예 배제되었다면 어떻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지. 공정한 심사를 하였다면 왜 그렇게 심사위원과 심사과정 공개를 꺼리는지. 계속 궁금할 뿐이다.
센터에서 말한 심사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도 공정성을 잃었다. 대관심사에서 선정된 다른 몇몇 페스티벌에서 제출한 서류가 서울연극제 서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내년에 잡혀있는 페스티벌 작품선정이 대관신청서류 제출마감보다 뒤에 잡혀있으니 당연한 결과 아닌가. 센터 스스로 뭔가 엄중하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을 자신들의 해명을 통해 자인하는 꼴이다.
일개 단체라서 사전 조율할 필요도 없고 다른 단체와 똑같이 심사결과를 번복할 수도 없다고. 센터측에서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국공연예술센터의 서울연극제에 대한 아주 잘못된 인식이 드러난다. 한국 공연예술 축제로서는 가장 크고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는 서울연극제가 일개 단체라니. 협회원 수천 명이 참여하고 더 많은 비회원이 참여하고 싶어 하고, 수만 명의 관객이 향유하는 축제를 일개 단체라니. 아르코 극장과 대학로 예술극장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니 지금의 대학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연극인들의 가장 큰 축제를 일개 단체라니. 서울연극제는 연극인들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장소가 붉은 벽돌의 아르코 극장이다. 그런데 일개 몇몇의 개인이 심사를 하여 일개단체의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연극제를 상징하는 극장에서 연극계를 대표하는 서울연극제를 밀어냈다.
이건 아무래도 큰 사건이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설들을 들었다. 연극계 내부적인, 공연예술계 내부적인, 정치적인, 등등의 설들. 설은 설일 뿐.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어느 집단이든 내부적인 갈등이 있고 감정싸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갈등 때문에 집단 전체를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든 소통을 하고 집단 전체가 잘 되는 방향으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어느 설에 해당되든 서울연극제는 그 설을 일으킨 사람들을 포괄하는 큰 문화자산이다.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서울연극제는 연극계의 자산일 뿐 아니라 공연예술계의 자산이고 서울시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자산이다. 몇몇의 사람들이나 일개 단체가, 아니 연극계에서조차도 당대에 함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행사이다. 35년 동안 천박한 자본주의를 거스르며 산화해간 선배들의 피맺힌 유산이고 앞으로 수십 년이 될지 수백 년이 될지 척박한 예술계를 살아갈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할 문화자산이다. 축적되어왔고 축적되어가야만 할 문화예술의 정수이자 정신이다. 만일 서울연극제를 일개 단체로 잘못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잘못된 결과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서울연극제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또한, 이번 기회에 서울연극제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이다. 한국공연예술센터는 하루빨리 심사위원과 심사과정을 공개하고 책임소재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연극인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2014년 11월 30일
연극인 이해성
100인의 릴레이 글 12 / 배우 이종승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비상식의 시대. 정의가 사라진 시대!
무지가 빚어낸 몰상식한 행정. 기초예술을 무시하고 문화말살정책의 일제시대로의 역행.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요즈음 대한민국의 어느 한 곳 멀쩡한 곳이 없다.
사회 전체가 정의가 내팽개쳐진 채 온갖 부정과 비리,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로 가득한 요즈음 겉으로는 문화융성을 외치면서 안으로는 입맛대로 길들이려는 시도로 보이는 행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어느 한 곳 믿음을 주는 곳이 없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가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기록하고, 대변하고 역사를 이어가는 살아있는 정신! 그것이 연극이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대학로 곳곳에 적혀있는 글귀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라는 것이 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연극은 서양은 물론 우리의 역사 속에, 삶 속에 수 천 년간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연극을 지속하게 하는가? 연극의 역사를 지우고 단절시키려는 지금! 미래가 있겠는가? 연극이 지원금에 목메어 입맛대로 움직이는 시녀가 되어야 하는가?
답은 그럴 수 없다 입니다. 절대 그렇게 돼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병들고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할 때 가장 옳은 소리를 내고 마지막까지 깃발을 들고 휘날려야 하는 것이 배운자와 예술가들 아닌가!
이제까지 서울연극제 35년의 역사 속에 어떻게 잘되고 좋은 것만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검증되고 검열된 작품만 해야 하는 건가? 그럴 수 없지 않나?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창작희곡의 개발과 실험의 장으로써 서울연극제가 이뤄온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번 서울연극제 대관심의 탈락은 나와 너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연극인, 나아가 서울시민과 문화예술계 전체의 문제다.
또한 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수많은 대학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라는 말을 되풀이할 것인가? 시간 때우기 식으로 시간만 보내다 “이제 뒤집을 수 없으니 그만하자” 할 것인가? 답은 우리의 행동에 달려있을 것이다.
2015년 서울연극제 대관 심의위원들이 그래도 대학의 교수요, 연극계의 선배요, 어른이라는 사람들일 텐데, 어떻게 자식을 거리로 내쫓고 고향을 버리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서울연극제의 맥이 끊어 지면 무슨 낯으로 연극을 한다고 할 것이며 고개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탈락은 됐지만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심의는 했지만 불법은 아니다. 아르코에서 못하면 다른 곳에서 하면 되지 않냐?’ 이러실 겁니까? 아니면 밝히지 못할 만큼 부끄럽긴 한 겁니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체인가?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융성하는 막중한 단체가 아닌가! 예산을 늘려 지원해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려 드는 건 다른 의도가 있으므로 보여 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인가?
또한 공정하고 엄정한 잣대는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대상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형평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면 심의 기준과 심의위원을 공개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문제 될 게 없으면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떳떳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서울 연극제는 서울뿐 아니라 모든 연극인들의 축제와도 같은 행사이다. 이대로 일방적 통보에 의해 역사와 전통의 연극축제를 연극을, 연극인을 무시하게 할 순 없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 보면 송강호가 김상경을 향해 날라차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씨발, 여기가 무슨 강간의 천국이냐? 개나 소나…’
강간을 당한 적도 없지만 지금의 내가, 연극인들이 꼭 강간당한 기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연극협회와 각 지역 협회, 연극인을 무시하고 폄하한 유인화 센터장과 김의숙 대관 담당부장, 그리고 이를 조정하거나 시정하지 않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권영빈 위원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즉각 책임지고 사퇴하라.
알베르 카뮈는 ‘정의론’에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서울연극제는 연극인뿐 아니라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대한민국의 가장 오래된 연극축제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울연극제의 대관심의를 탈락시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서울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극장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축제를 즐길 권리를 위해 천만 서울시민과 연극인들이 함께 항의하고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2014년 12월 1일
좋은 희곡읽기 모임, 배우 이 종 승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3 / 한국희곡작가협회
<서울 연극 죽음의 날에 부쳐>
2014년 11월 14일은 한국 연극계의 심장부인 서울 연극의 상징적인 죽음을 알리는 참담한 날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기관인 문화예술위원회의 산하에 있는 한국공연예술센터(약칭 한팩)가 ‘서류 미비’를 내세워 ‘2015년 정기대관 공모 선정 결과’ 명단에서 서울연극제를 탈락시킨 날이다. 왜 이 날이 참담한 역사적인 날이고 상징적인 죽음의 날인가?
서울연극제와 아르코예술극장의 역사적 가치
1977년 출범한 서울연극제는 한국 연극계 최대 행사로서 지금까지 존속해오고 있다. 연극계 일각에서는 과거에 비해 권위와 명성이 약화되었다고 보기도 하나, 서울연극제는 아직도 건재하다. 작품 선정의 다양한 방식과 절차 등 연극제의 운영이 한층 더 진보하였고, 동시대 현실 문제를 담은 작품들이 공연되어 이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서울연극제는 단순히 특정 지역의 연극제들처럼 해마다 치르는 ‘서울’만의 연극제가 아니다. 서울연극제는 한국 현대 연극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전통이다.동시에 명실 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창작극의 산실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 한국 연극계의 심장 역할을 해온 서울연극제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판인데 어찌 참담한 날이 아니며 상징적인 죽음의 날이 아니란 말인가?
특히 제5회부터 연극제가 열렸던 아르코예술극장(구 문예회관대극장)은 한국 현대 연극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원로와 중견 연극인에겐 연극 정신과 예술혼을 불태운 터전이다. 젊은 연극인에겐 한번쯤 밟아보고 싶은 희망과 꿈의 무대다. 엄혹하고 살벌했던 1970년대와 80년대 군부 정권 시절에도 이 극장에서 연극은 계속 올려졌다. 무용 등 다른 공연예술에도 열려 있긴 하나, 우리 연극인에게 아르코예술극장은 특히 과거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역사적인 공간이며 극작과 연극 정신을 발현하는 예술의 창조 공간이다. 또한 이 공간은 무대를 밟고 싶은 희망과 꿈을 키워주는 미래의 열린 공간이자 서울 대학로의 상징적인 핵심 극장이자 연극 예술의 건축 문화재다.
한팩 심사의 자기모순과 저의
서울연극제와 아르코예술극장 각각의 역사적 가치와 이 둘의 불가분리의 관계가 이러할진대, 문화예술위원회의 한팩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지녔기에 사소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서울연극제 대관 신청을 탈락시킨단 말인가? 한팩이 공식적으로 서울연극협회에 전달한 공문에서 탈락시킨 이유를 살펴보면,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한팩이 지적한 서류 미비는 똑같이 서류가 미비했던 한국연극연출가협회측의 대관 통과와 상충되어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리고 서울연극제는 예년과 준비 과정이 동일하기에 올해와 마찬가지로 작년에도 서류 준비가 동일하였다. 그런데 작년에는 통과된 데 반해 올해는 탈락되었다. 한팩은 상황이 이런 데도 ‘엄정한 잣대’ 운운하며 심사의 적절성을 주장하고 있다. ‘표적 심의’의 비난과, 탈락시킨 다른 저의가 깔려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이밖에도 한팩이 지적한 공연 작품의 참신성과, 레미제라블 특별 공연 관련 문제가 심사 기준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백번 양보하여 받아들인다 해도, 그 점들 때문에 서울연극제가 대관 탈락되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한팩에 대한 불신은 높아만 간다. 작년에는 심사위원 명단을 떳떳이 공개했으나 올해는 규정에 없다며 공개하고 있지 않다. 급기야 한팩에 대한 불신은 서울연극제 같은 중요한 행사를 대관 탈락시키면서 상업성이 강한, 극단이나 ‘연극열전’에게 대관해준 것을 문제 삼는 것으로 비화된다. 한팩의 권위와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하고 있다.
공연예술을 지원하여 공연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할 한팩이 왜 대관 탈락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을까? 한팩의 입장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한팩은 서울연극협회나 이 협회가 주관하는 서울연극제를 너무 하찮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팩은 서울연극협회를 ‘하나의 단체’로 언급한 적이 있다. 이 협회에 소속된 극단이 몇 백 개인데 단순히 하나의 단체로 보다니! 몇 명이 모인 극단이 대관 신청하는 것과 똑같이 취급한단 말인가. 서울연극협회의 존재를 폄하하는 오만함을 지닌 한팩이 서울연극제 정도를 하찮게 보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둘째, 한팩이 보낸 공문을 읽으면, 행간을 통해 한팩과 서울연극협회의 갈등이 읽힌다. 한팩이 작년 서울연극제에서의 레미제라블 공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올해의 심의 이전에 한팩은 서울연극협회와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설령 양측의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또는 한팩의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다고 해도, 갈등의 해결 방식으로 한팩이 갑의 위치에서 서울연극제와 협회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공연예술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한팩의 입장에서 서울연극제나 협회에 문제가 있다면, 좀더 인내심을 갖고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갈등이 있다면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갈등의 관계를 상호 발전적인 관계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예술 현장 일선에서 유연하게 처리하라고 설립한 것이 한팩의 존재 이유들 중 하나 아닌가.
예술 행정의 문화권력
그런데 한팩은 어떻게 했는가? ‘엄정한 잣대’라는 심사 기준을 내세워 서울연극제를 단칼에 날려버렸다. ‘단칼에 날려버린다’는 표현이 과격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전 예고도 없이 마른 날에 날벼락을 맞은 자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한팩이 서울연극제의 역사적 가치를 알았더라면, 서울연극협회에게 좀더 배려심이 있었더라면, 사전에 협회에게 심사 요건을 갖추도록 권유하거나 경고라도 주어 협회가 심사 요건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한팩은 왜 이번 대관 탈락 결정을 ‘보복성 심사’라고 하는지 경청해야 한다.
한팩이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봉사하는 단체가 아니라, 갑의 위치에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공공기관이라는 걸 한국 연극계에 보여주어 우리 연극인들을 벌벌 떨게 하고 싶었던가? 이걸 예술 행정이라고 하고 있는가? 행정을 배우는 초자도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오직 행정의 문화권력자만이 이렇게 한다. 이번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을 주도했던 담당 실무자들은 한팩을 책임지고 운영할 만한 자격이나 실력도 없는 인물들이다. 한팩은 서울연극제를 말살 위기로 몰아넣은 사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한팩은 공연 예술을 발전시키고 융성하게 돕는 공공 예술 센터지, 침대의 크기(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팔다리를 잘라 문화예술의 역사와 숨통을 끊어버리는 신화적 존재 프로크루스테스가 아님을 명심하라.
꼭두각시 연극 전문가
흔히 하는 말에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표현이 있다. 실상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가혹하고 무섭다는 뜻으로서 아는 사람한테 당한 피해자가 부정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지경이 되도록 연극을 아는 한팩 담당 실무자와 연극을 전공하는 심사위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점이다. 이번 사태가 연극에 무지한 실무자들이나 심사위원들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 전혀 무지하니까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해당 전공 분야의 심사위원을 두지 않고 심사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근본 문제가 발생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연극계의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소위 ‘연극 전문가’라는 심사위원들도 대관 탈락 결정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너무 충격적이다. 우리가 연극계에서 연극 전문가를 신뢰하지 못 한다면, 연극계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수많은 연극인들은 어떤 전문가의 말과 비평을 경청하며 활동해야 한단 말인가. 연극을 전공하니까 연극과 관련된 서울연극제 행사를 무조건 옹호하고 비호하라는 말이 아니다. 서울연극제든, 그것을 주최하는 서울연극협회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게 돕는 위치에 있어야 전문가다운 전문가다. 서울연극제 대관 심사에서 대관탈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의식있는 바른 소리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역사적 사건이 될 대관탈락을 막지 못할 바에야 사직을 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단 말인가. 연극 전문가들이 한팩의 말대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의 ‘엄정한 잣대’에 따라 심의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거야말로 권력 기관의 말대로 따라하는 ‘어용’ 전문가이고, ‘꼭두각시’ 전문가가 아닌가.
불신이 점차 쌓여간다. 한국 연극계에서 이런 전문가들이 자기 소신도 없이 공공기관의 지시대로 얼마나 많은 심사를 수행할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심사들이 이렇게 진행되었을까. 우리 연극인들이 이런 사람들을 전문가로 모시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분발하고 활동해야 하다니! 이런 연극 전문가들이 정리하고 제시하는 대로 한국연극계의 역사와 지도가 그려져야 하는가! 나랏돈을 먹고 심사했으면서도, 심사위원 명단 공개를 하지 못하는 한팩의 궁색한 변명 속에 숨어 있는 연극 전문가들이여! 전문가답게 소신껏 심사했다면, 역사 앞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밝혀라!
한팩은 이번 사태를 더 이상 변명으로 지연하거나 장기화해서는 안 된다. 힘의 남용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태를 원점으로 돌려 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팩은 스스로 문화 권력 기관임을 자인하게 되어 역사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서울연극제를 주최하는 서울연극협회도 이번 기회에 자성할 것이 없나 살펴야 한다. 서울연극제 대관이 탈락되었다고 공분할 수 있지만, 한팩으로부터 사소한 지적도 받지 않도록 내부적으로 한팩의 심사 기준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극제의 운영 방식이나 제도 개선 등을 통해 공공 예술 기관의 방침을 준수하려는 태도의 전환이 요구된다.
실무자들의 소통 절실
행정에서 시스템과 제도가 문서화되고 엄격한 기준이 마련된다 해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정치한 시스템과 제도라 해도,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포용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과 제도는 없다. 시스템과 현상 사이에는 틈과 균열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틈과 균열 때문에 마찰이 생기고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이 틈을 메우고 문제를 해결하고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게 바로 사람이다. 한팩과 서울연극협회는 단체 대 단체로 관계를 맺고 만나겠지만, 실무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만나는 게 중요하다.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은 만남과 소통의 계기를 부여한다. 그래서 분열하고 대립하는 가운데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서울 연극에 대한 희망의 대화를 나누길 바란다.
2014.12.2
(사) 한국희곡작가협회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4 /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
<에딘버러, 아비뇽 그리고 서울>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100인 릴레이 글에 동참합니다. 글재주가 워낙 없다 보니 그저 두서없는 넋두리가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지려나 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서울연극협회에서 낸 성명서에 나온 바와 같이 서울연극제는 ‘아르코예술극장 대/소극장과 최근 대학로 예술극장 대/소극장에서 동시에 개최되는, 1977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36년째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연극제의 정통성을 잇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장, 최대 규모의 연극제’입니다. 그런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15년 제36회 서울연극제 개최를 위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의 대관 심의에서 탈락시켰습니다.
‘엄중한 잣대, 바른 잣대’로 대관 심사를 해서 대관을 취소한 관계자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그저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뿐이 없습니다. 문화 융성하겠다고 하는 이 나라는 문화결핍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35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연극제를 지원하여 국제적으로도 명망 있는 에딘버러나 아비뇽 축제처럼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축제로 만드는 것이 문화융성 아닌가요? 그렇게 하려면 힘을 합쳐도 이루기 힘든 이 판국에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엄중한 잣대, 바른 잣대를 가지고 선정한 심의위원들의 대관심의 과정에 대한 생각과 그들이 판단 근거를 듣고 싶습니다. 이것은 결코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지지한다면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선정에 많은 문제 제기가 있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지지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의위원 공개를 해야 합니다. 공개하지 못할 만큼 숨기고 싶은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책임지기 두려워서 비공개로 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진행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정말 문제가 있는 기관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일반 개인회사나 개인이 운영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대관 선정이 뭐 그리 심각한 일이라고 비밀스럽게 진행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진문화를 가진 사회일수록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존중됩니다. 비밀스럽고 다양함이 없는 사회는 경직되고 건강하지 못합니다. 문화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지는 사회일수록 후진국입니다. 문화융성을 하겠다는 것은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시점에 제36회 서울연극제 개최를 위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의 대관 심의에서 탈락이라는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선진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요청합니다. 심의위원의 명단을 공개해주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공청회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한국연극의 발전 방향도 이야기해보고 대관심의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12월 03일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5/연극인 기국서
<우리 연극인들은 지금.>
문예회관 대관이 전부 무산됐다는 말을 듣고 김태수 형, 박장렬 회장 등과 통화가 있었다.
이틀 뒨가…문예회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핏대를 세운 사람들이 50여 명 모인 것 같았다.
펼침막이 펴지면서, 손팻말이 올라가면서, ‘권태’ 혹은 ‘풍경’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어쨌건 이유가 밝혀졌다. 계속해서 수군대면서, 고함지르면서, 옮겨 다니면서, 기다리면서, 모멸감이 펴졌다. (화가 났다)
헤어스타일이 공주병 같은 여자와 잠바 때기를 입은 여자가 같이 단상에 앉았다.
큰 소리와 조곤조곤이 계속되면서 로비는 그야말로 로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연극계 어른들은 거기 모인 후배들에게 조언한 뒤 테라스에서 신중하게 앉아있다.
안내 서비스를 명심해야 할 사람들이 작은 권력을 지키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누군가로부터 느닷없는 동물 폭력적 폭언이 나올까 저어되는 순간이었다.
술 한잔 마시면서 상상에 의거한 많은 억측 같은 예견들이 나눠졌다.
웃기
그러면서 비장과 자조감이 싹튼다.
그 후 며칠 뒤…그러니까 며칠 전.
세종시 문화체육관광부를 방문했다. 화요일 오전 11시. 15명의 연극인들.
장관, 차관, 비서실, 고위공무원들이 거의 자리를 비웠다.
말단 정규직 하나가 방패막이 하느라 쩔쩔맨다.
소리가 높아지자 사복들이…문화부에 경찰견들이…
어쨌건 그들이야 절차를 따르는 거지. 할 일을 하는 거지.
경멸감이 퍼졌다. (절망감 같은 거)
우리 대한민국 연극계의 현주소가 적나라해지는 지금.
후배들도 웃음기가 얼굴에서 사라진 지금.
나랏돈 일체 거부하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장터에서 공연을 해야 하나?
몇십 명의 연극인들이 한강에서 몸을 던지는 이벤트를 해야 하나?
서울의 모든 공연장이 일주일쯤 휴관해야 하나?
이 야만의 시절을 격파할 상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2014년 12월 5일
연극인 기국서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6/배우 강애심
<우리의 축제는 우리가 지켜야한다.>
35년 역사를 가진 연극제가 대관 심사에서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연극제는 서울연극 협회가 주관하지만 수 천명의 연극인의 행사이기도 하다. 심사 기준이 뭔진 잘 모르지만 이해가 안 가는 답변과 말 바꾸기와 떠넘기기로 일관하는 한 팩 관계자들의 입장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 연극 협회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세월동안 역사의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이사장이 바뀌어도 서울 연극제는 문예회관이었던 시절부터 아르코 극장과 대학로 예술 극장에서 계속 열려져서 연극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식지 않게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대관이 안 된다면 연극제는 어디서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서울연극제는 일개 단체의 행사가 아니라 수 천명의 연극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이다. 지금 그 축제를 하지 말라고 막고 있는것과 다름없다. 아마 그 기간에 대관이 된 다른 연극단체도 껄끄럽고 미안할 것이다. 연극제가 빠졌는데 미안해서 어떻게 맘 편히 공연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축제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한 팩 관계자분들은 다시 고려하여 극장을 연극제 품으로 돌려주고 연극제 집행부와 연극인들도 더 분발해서 순수한 열정의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높은 수준의 예술이 될 수 있게 노력 해야만 한다.
2014년 12월9일
배우 강애심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7 / 배우 공재민
<무능한 예술행정 공공기관>
연극을 하는 한사람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센터장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도 일은 하지 않고 정치만 한다고 싫어한다 합니다.
무용계에서는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두른다고 합니다. 또한, 센터에 거의 모든 직원 및 관리자분들도 무능하고 억지스럽다고 싫어한다고 합니다.외부 인사들도 마찬가지라 하는데….
유독 문화부에서만 그것도 고위관계자들만 아무 얘기 안 하고 계십니다…이것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정치적이던 아님 그 것이 삶의 방식이든 간에 주변에서 그렇게들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스스로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아무리 정치적인 측근이라도 주어진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분란만 일으킨다면 다시금 고려하고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조직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정도를 최소한 넘어서지 않는 게 도리이고 그들에 작은 의무라고 생각합니다.인간은 자신을 위해 사는 동물이라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함께했으면 합니다. 주변 얘기를 듣고, 보고 대화라도 했으면 합니다. 우리 삶 속에는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 주시고, 들리는 그 소리를 들어봐 주십시오.지켜주십시요.
무능은 무능입니다. 그 무능을 정치적으로만 해결한다면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이성이 존재할 수 없는 땅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언제부터인가 공공기관에서 예술행정 하시는 몇몇 분들은 무능과 게으름으로 안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갑으로서 예술가들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처음 그 일을 공부할 때…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를 돌아보십시요…그리고 각자의 현장에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들을 봐주시고, 함께해주십시오.
서울연극제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연극인들과 함께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2014.12.10.
배우 공재민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8 / 배우 지춘성
< 방관하는 자는 무책임을 얻는 대신 무능력과 가난을 짊어질 것이다 >
시 하나,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가둘 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조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그들이 내게 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 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2014년 11월 14일 35년 역사의 전통과 상징을 가진 서울연극제가 공공기관이란 탈을 뒤집어쓴 변종 바이러스 집단과 그 속에 기생하는 단세포 지능을 가진 개 쓰레기들의 작당으로 대관 심사에서 탈락됐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당한 것이다.
오로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온 우리를 얇디얇고 쥐꼬리 같은, 썩은 권력을 이용해 짓밟은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과 명예를 차디찬 길바닥에 내팽개친 것이다.
하지만 능지처참(陵遲處斬)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도 남을 개 쓰레기들은 반성은커녕 뻔뻔한 낯짝으로 아직도 우리의 숨통을 조이려 하고 있다.
또한, 개 쓰레기들은 부정비리의 작당을 공모할, 평론가 김△혜, 평론가 이△경, 평론가 김△희, 문화예술인 박△재, 공연기획자 인△진 등을 들러리로 불러 이미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만행의 결과를 회유로 거수케 했다. 현장 연극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아르바이트비를 주는 조건이다.
공모자들은 자기들이 개 쓰레기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도,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도 알려 하지 않고, 허수아비 거수로 더러운 밥그릇에 연극인들의 피눈물로 뒤범벅될 양식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공모자들 역시, 이번 대관 참사에 반성으로 전전긍긍하기는커녕 버젓이 우리 삶의 터전을 기생충처럼 아직도 기웃기웃하며 활보하고 있다. 자기들 밥그릇의 크기가 줄어들까 걱정하며 말이다. 참으로 개탄을 금치 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존심 하나면 꽉 찰 크지도 않은 밥그릇을 빼앗긴 것이다.
네발 가진 강아지도 제 밥그릇을 빼앗기면 짖어대고 으르렁거리고 물기까지 한다.
우리는 참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화를 내야 한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
우리는 물어뜯어야 한다.
그 대상이 확인되면, 다시는 우리의 밥그릇에 손가락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게 발기발기 찢어, 씹어 삼켜버려서, 흔적조차 없애야 한다.
연극인들이여!
침묵하지 마십시오.
짖어대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며, 미래의 우리 후배들에게 온전한 밥그릇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2014년 12월 11일
배우 지 춘 성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19 / 배우,연출 강제권
<마로니에 有感(유감), 그리고 그 빨간 벽돌 극장…>
철없던 고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왔던 서울, 마로니에 공원의 빨간 벽돌 극장을 보면서 조심스레 배우를 꿈꾸었던 나.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연영과를 가지 못하고 일반 학교로 진학한 후 연영과만큼이나 열심히 연극을 했다. 그럴 바엔 그냥 그쪽으로 갈걸…
몇 년이 지나 스무 살이 되어 찾은 마로니에, 그리고 그 빨간 벽돌 극장. 그곳에서 올려지는 수많은 공연들. 선배들을 보면서 가졌던 용기와 희망. 그리고 다시 조심스레 만들어갔던 연극인으로서의 꿈. 그 과정에서 지금의 서울연극제 취소 같은 일을 겪기도 했다…
마로니에를 향한 그리움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군 복무 시절 꾸던 꿈 대부분이 마로니에 꿈이었다. 대부분 고향 꿈을 꾸는 게 일반적일 텐데 나는 희한하게도 마로니에 꿈을 꾸곤 했다. 햇살 눈부시게 비치는 날이라던지 우울한 날이라던지 난 그곳에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좌절을 하고 희열을 하고 슬픔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따스했던 햇볕을 라이트 빛처럼 받아들이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찰라 잠에서 깨어 서글펐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처럼 나에게는 메카였던 대학로 마로니에, 그리고 그 지성소 같은 곳 빨간 벽돌 극장.
아쉽게도 난 아직 그 빨간 벽돌극장 무대에 서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나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마흔이 된 지금도 역시 그 동경의 행위는 진행 중이다. 먼 곳을 돌고 돌아서 이제 다시 스무 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지성소 입성에 대한 희망 탑을 쌓고 있었는데, 그 희망을 짓밟아버리기라도 하는 듯 서울연극제 대관 취소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만일 일본에 ‘고시엔’을 못 열게 구장들이 허가를 안 내준다면? 올림픽을 담당하는 경기장에서 올림픽을 못 열게 한다면? 그것을 준비하던 선수들은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낄 것인가…? 그거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든 걸 바쳐 꿈을 키워왔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인가…?
서울연극제는 35년 동안 지속되어온 행사로 연극인들에게는 고시엔, 올림픽과 같은 행사다. 이 서울연극제를 통해 훌륭한 배우들, 연출, 작가들이 배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행사를 막는 건 그동안의 전통과 연극인 전체를 무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연극인들이 딴따라라 불릴지라도 그건 즐거움을 주고 감동을 줘야 하는 대상인 관객들 앞에서 딴따라인 거지 행정을 담당하고 공무를 담당하는 당신들의 딴따라는 아니다. 차갑게 생각하고 뜨겁게 행동하는 우리 연극인들의 행동을 치기 어린 딴따라의 그것으로 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겐 세월이 흘러도, 사람이 바뀌어도 이어져 내려온 불굴의 藝術 魂(예술혼)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열심히 생계와 힘겨루기하며 작고 허름한 연습실에서 꿈을 키우면서 그 빨간 벽돌 극장에 서보기를 꿈꾸는 많은 연극인들이 있다. 이들의 바람을 당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꺽지 말아주길 바란다.
서울연극제를 지켜주세요! 35+1
2014년 12월
배우/연출 강제권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0 / 연출 홍영은
<서울연극제는 지켜져야 한다.>
저는 지금 초등학교 저학년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뛰어놀다 제 대본에 써 있는 ‘서울연극제를 지켜주세요 35+1’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곤 이게 무슨 뜻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서울 대학로에서 해 온 가장 오래되고 큰 연극축제야”
-그런데 왜 플러스 1이에요?
“35회 동안 그러니까 35년 동안 이어온 축제를 못 하게 해서 무사히 한 해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플러스 1이야. “
-왜 못하게 하는데요?
그러게. 왜 못하게 하는 걸까? 선배님들과 선생님들이 피땀으로 일군 극장에서 35년 동안 이어온 전통을 왜 끊으려 하는 걸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이틀 전, 1인 릴레이 시위를 아르코 예술극장 앞에서 했다. 서울연극제를 지켜달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지난날 마로니에 공원 앞의 아르코 예술극장은 내게 꿈의 극장이었다. 34회 서울연극제에 자유참가작으로 참여했던 지난날,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가하며 가슴 벅차올랐던 시간이 있었다.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서울연극제에 참여한 선생님들의 작품을 보며 꿈을 꾸었던 지난날이 바람과 함께 코끝을 매섭게 스치며 지나갔다.
젊은 연극인들에게 서울연극제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이고 조금 더 힘내라는 격려이며 정진하라는 채찍과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런 서울연극제가 이런 굴욕을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릴레이 시위를 할 때 진열돼 있던 피켓의 문구가 떠오른다.
“진상 그만 떨고 진상을 소상히 밝히시길..”
제발.
2014년 12월 14일
극단 홍차 대표 홍영은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1 /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대표 오세곤
<논리적 기만의 극치를 성토하며>
서울연극제의 대관 탈락!
참으로 기절초풍할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논리란 때로 허구적이다.
그렇게 허구로 빠진 논리는 기만을 가려주는 최상의 도구가 된다.
극장에서 대관 공고를 내고, 대관을 원하는 단체나 기관이 신청을 하고, 들어온 서류를 원칙대로 심사하여 대관 결정을 하는 것은 너무도 논리적인 절차로 보인다. 신청이 미달이 아닐 경우 탈락자가 나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서울연극협회가 서울연극제 때 사용하겠다고 대관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앞서의 절차적 논리를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탈락을 하자 반발한다. 정해진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엄격한 심사 과정에 대해서도 강한 불신의 태도를 보이며 다시 살려내라고 생떼를 쓴다. 그야말로 비논리적 억지의 극치이다.
이상이 형식 논리 차원에서 본 이번 사건의 전말이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논리적으로 서울연극협회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용을 아는 우리가 보면 이건 황당한 말장난일 뿐이다.
원칙은 사람이 정한다.
원칙은 일에 맞게, 일이 잘 되도록 정하는 것이다.
서울연극제가 대관 탈락이 될 수 있는 원칙이라면 그건 잘못 정해진 것이 분명하다.
서울연극제의 전신인 대한민국연극제가 생기고 몇 년 안 돼 문예회관이 개관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연극제는 당연히 거기서 하는 거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행정 편의를 위해 절차를 밟아달라는 협조 요청이 있었을 것이고, 별로 심각하지 않은 요식행위라 생각하고 요청에 응했을 것이다. 아마 그 동안 대관 심사위원들도 미리 서울연극제 기간으로 표시된 달력을 놓고 심사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예진흥원이, 이후 문화예술위원회가, 또 그 이후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직접 기획을 하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심사위원들에게 제공되는 달력에 공란이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다.
기획 공연은 심사위원들에게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런데 서울연극제는 형식상 심사 대상으로 되어 있다. 며칠 안 남은 공백에서 그나마 서울연극제 같은 고정 행사를 빼고 나면 일반 단체에 나눠줄 여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때로 예술적 수준도 높지 않으면서 날짜만 차지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반면에 기획 공연은 아예 대관 선정 발표 목록에서 빠져 있으니 불만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본질을 제대로 볼 줄 안다면 기획 공연의 폐해를 지적하겠지만 우리 연극계에 그런 기만행위를 밝혀낼 만큼 행정에 밝은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기획 공연을 허용한 것부터 잘못이다. 법적인 허가권을 갖고 있지 않다 해도 실제 그걸 허용하고 말고는 연극계가 정할 일이다.
또 서울연극제 같은 연극계 대표 행사에 대해 대관 심사제도의 적용을 수용한 것도 잘못이다. 그건 처음부터 심사 대상이 아니라 협의해서 함께 결정하든지 아니면 결정 내용을 통보해 주는 방식이 되었어야 옳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또 정부산하기관 등과 일을 할 때 책임자들에게 자주 하는 조언이 있다. 민간 전문가들로부터 제대로 된 자문이나 심사를 받으려면 정말 마음을 비우고 가능한 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변하면 공무원이건 산하기관 직원이건 누구 하나 틀렸다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걸 지키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왜냐 하면 그렇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나면 십중팔구 자기들의 잘못까지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까지 드러날 각오를 하고 자문을 받고 심사를 맡기지 않으면 모두 허구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기만적 요식행위일 뿐이다.
이번 사태에서 심사위원들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약자이고 피해자이다. 물론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 잘못은 있지만 그건 연극계 전체에 해당되는 어리석음이므로 그들만을 비난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철저히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정보도 안 주고 심사를 하라 해놓고 그 결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우는 꼴인 것이다.
가장 비난받을 대상은 한팩과 문화예술위원회일 것이다. 이런 행사는 형식상 신청을 받기는 하지만 심사해서 탈락시키고 말고 할 수는 없다는 가장 중요한 정보를 주지 않은 채 원칙대로 엄격하게 심사해 달라는 주문만을 했을 것이다. 심사위원 중 일부가 원칙대로 하면 서울연극제가 탈락하는데 그건 곤란하지 않느냐고 할 때도 담당자는 엄정한 심사만을 주문처럼 되뇌었을 것이다.
지금의 아르코극장, 즉 문예회관을 지켜온 건 연극인들이다. 더욱이 대학로극장은 이미 상가로 전락해 버린 걸 오로지 연극인들의 노력으로 살려낸 것이다. 이 극장들의 주인은 당연히 연극인이다. 그런데 그 극장을 잘 관리하라고 맡겼더니 그 관리인이 완전히 주인 행세를 한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제 주인으로서 다시 질서를 잡아야 한다. 서울의 연극단체들은 모두 한팩의 극장들을 원한다.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어 한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한팩은 절대 기획 공연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단체들이 골고루 쓸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한팩의 기획력을 이용하여 일반단체들의 기획 홍보 마케팅을 지원해야 한다. 물론 서울연극제도 함께 노력해서 더 성공적인 행사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연극을 진정한 주인으로 세우고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예술위원회와 한팩이 갖춰야 할 최우선의 자세일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봉사가 이루어질 때 그 종사자들도 직업인으로서의 참된 행복과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적어도 주인이 아닌 사람들이 주인 위에 군림하면서 느끼는 병적으로 왜곡된 쾌감에서는 빨리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극도 살고 그들도 건강해지는 일석이조의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마침 현 정부가 내세우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주객이 전도돼 있는 우리 연극계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2014년 12월 14일
오세곤(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대표)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2 / 30대 연출가들의 글 – 김현진, 마두영, 박지연, 백석현, 석봉준, 이성구, 이재민, 이현빈, 장한별, 홍영은
<우리는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행동하겠습니다.>
지금 30대 연출가들은 대부분 IMF를 기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극이 좋아서 연극이 하고 싶어서 대학에 진학하거나 극단에 지원했던 우리들은, IMF로 어려워진 부모님들의 ‘먹고 살기 힘든 연극을 왜 하려고 하냐’는 질책을 받으면서도 연극이 좋아서 연극이 하고 싶어서,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공연을 지켜보며 꿈을 버리지 않고 연극에 매진했다. 30대를 기점으로 우리는 돈이 최고 가치가 된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예술이 경제활동의 최하위 계층으로 평가되어 관련 학과들이 폐지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지만, 연극인으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는 원로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을 지켜보며 더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우리는 늘 지켜봐 왔다. IMF가 와도, 전 세계 금융위기가 와도 물질만능사회에서 정신의 가치와 소중함을 중요시하며 행동하시는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을.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 앞에 우뚝 선 시스템이라는 벽을 지켜보고 있다. 부당함과 불공정, 그리고 불통이라는 시스템의 벽을.
연극인들의 명예와 자부심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준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당사자들은 일언반구 말이 없다. 1인 시위를 해도, 궐기대회를 해도, 100명의 릴레이 글이 계속 업데이트 되어도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35년간 1년에 한번 씩 모여서 벌여왔던 연극인들의 상징적이고 명예로운 잔치를, 준비가 미비한데 심지어 모금활동까지 하지 않았냐며 억지를 부리고 모함을 하며 잔칫집에서 쫓아내놓고는 아무런 말이 없다.
젊은 연극인들에게 서울연극제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이고 조금 더 힘내라는 격려이며 정진하라는 채찍과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런 서울연극제가 이런 굴욕을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원금으로 연극제작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연극계에서 서울연극제의 <희곡아 솟아라!>와 <미래야 솟아라!>는 20~30대 연출가들에게 희망이고 도전이었다. 그리고 서울연극제 기간 동안 수많은 선생님들과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 연극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기쁨이자 활력이었다. 서울연극제는 연극인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는 축제의 장일 뿐 만 아니라, 선배와 후배를 이어주고 동료들과의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는 교류의 장이었으며, 또한 실로 막막한 현실에 고립돼 외로워하고 힘겨워하는 젊은 연극인들에게는 치유의 장이기도 했다.
연극인들의 명예와 자부심에 상처를 주고, 35년 역사의 서울연극제를 모욕한 이 있을 수 없는 사태를 이제 더 이상 지켜보지만은 않겠다.
대학로의 뿌리는 연극이고, 마로니에 공원과 아르코 예술극장은 바로 그 연극의 중심이다. 중심에는 뿌리가 단단히 박혀있어야 한다. 모든 연극인들은 그 중심에 서서 당당하게 각자의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자명한 사실이 어이없는 굴욕을 그만 당하고 어서 제자리를 찾아갔으면 한다. 그리고 그 제자리를 찾아감에 있어서 명백한 진상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마라. 우리는 계속 지켜볼 것이고, 선배들이 그랬듯이 이제 행동할 것이다.
2014년 12월 15일
30대 연출가- 김현진, 마두영, 박지연, 백석현, 석봉준, 이성구, 이재민, 이현빈, 장한별, 홍영은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3/ 극작가 김나영
<서울연극제에 관한 상징적 명상>
어느 날, 한강물이 오염됐으니(사실 정수시설에 관한 서류제출에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 데다 공원에서 진행된 사적인 모금행사가 공원관리사무소에 사전 신고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한강은 서울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정부의 발표가 나온다.
그날부터 서울의 상징을 청계천으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된다. 시민들은 더 이상 한강시민공원으로 소풍을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둔치에서의 조깅이나 산책도 매우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상황이 된다. 대신 정부에서 지정한 청계천이 서울의 상징이 되어 앞으로 유구히 계속될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하기로 한다. 지나간 역사의 상징인 한강은 기억 속에서 순식간에 멀어져간다. 아니, 멀어져가야만 한다.
새로운 상징인 청계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까지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말이면 청계천으로 가족단위 소풍을 나가야 하며, 조깅이나 산책은 청계천 주변에 사는 시민들 위주로 적극 참여를 권장한다.
볕이 좋은 날엔 일광욕도 즐겨야 한다. (유럽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강변에서 일광욕 즐기는 것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는 한강 둔치처럼 으슥한 곳 대신 밤에도 조명이 휘황찬란한 청계천을 이용해야 하며, 아이들은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는 대신 청계천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물고기를 잡으며 놀아야 한다. 서울지도를 그릴 때 웃고 있는 입술 모양인 한강을 그려넣는 건 당분간 몹시 조심해야 할 사항이다. 뿌리박혀 있는 상징을 빼낸다는 건 여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게 서울의 상징을 바꾸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다.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징을 바꾼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피나는 외면과 무관심만이 지난 역사를 지우고 새 역사를 받아들이는 일을 가능케 한다.
지금부터 청계천을 서울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시민이, 아니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도 백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한 세대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관련 기록과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까지 모두 지워버린다면 어쩌면, 진짜 어쩌면 백년 안에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염된 한강물을 정화시키는 것보다는 그래도 한 세대의 의식을 갈아엎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니까. 그런데도 시민들이 자꾸 한강둔치로 기어나온다면, 서울지도를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웃는 입술모양의 한강을 그려넣는다면, 아이들이 시민공원에서 몰래 축구나 농구를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아야 하나? 정부는 이제 청계천의 서울 상징화라는 첫 번째 플랜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를 대비해 한강물 말리기 두 번째 플랜을 고심하고 있다.
2014년 12월 16일
좋은 희곡 읽기 모임, 극단 필통 극작가 김나영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 24/ 극작가 최준호
<연극과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을 바라는 글>
연극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문화예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드라마, 영화와 같은 영상예술콘텐츠가 발전해도 연극은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연극은 그 안에 문학, 역사, 철학, 이념, 과학, 음악 등 인류의 모든 인문을 깊게 녹여낼 수 있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스크린이 아닌 눈앞에서 살아있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를 보고 느낀다. 한정된 무대는 수 천만리의 세상을 안을 수 있고, 한정된 공연 시간은 억만년의 세월을 담을 수 있다. 그렇기에 윤주상 선생님의 말씀대로 연극은 어떠한 정치, 이념보다 숭고한 예술이다.
서울연극제는 단순히 일개 단체가 올리는 행사가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제이다. 그런데 한국공연예술센터에서 단지 ‘심사기준’에 미달됐다는 이유로 떨어뜨린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서울연극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제이기에 양질의 연극을 올려야 한다. 따라서 서울연극협회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협회도 마땅히 그것을 겸허히 수용해야하고, 한국공연예술센터와 발전적인 소통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
이 문제는 결코 정치논리나 경제논리로 가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연극이란 현시대에 얼마나 숭고하며 진정성 있는 예술인가 이다. 따라서 서울연극제를 이어가자는 것은 결코 서울연극협회라는 한 단체의 권리만을 지키자는 운동이 아니다.
‘연극은 이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대학로에서 가면 볼 수 있는 익숙한 문구이다. 현실을 사는 인간이기에 이 글을 읽으면 비참함과 환멸을 느낄 때가 있지만, 그래도 한 시대의 연극인으로서 자존을 지켜주는 문구라 생각한다.
이 사태가 결코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서로의 갈등과 오해가 있었다면 협력적 대화와 행동으로 풀자. 그리하여 한국연극이 더욱 깊고 단단해 질 수 있는 전환점으로 만들자.
어떠한 경우에도 서울연극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연극과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존중이다.
2014년 12월20일
극작가 최준호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25 / 서울연극협회 회장 박장렬
<12월 22일 대한민국 연극인의 밤-대한민국 연극대상 박장렬 회장의 연설문>
안녕하세요. 서울연극협회 회장 박장렬입니다.
대한민국 연극인들의 큰 잔치에서 선생님들과 지회장님들 그리고 후배님들을 뵙게 되어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해마다 이곳 극장에서 봄에는 서울연극제를, 겨울에는 대한민국연극대상과 함께 서로 박수치고 격려하는 우리들의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이 장소는 연극인회관과 문예회관대극장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아르코대극장으로 불리며 대학로의 중심부에 서서 연극인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삼십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왔습니다.
서울연극제는 지난 35회의 시간동안 855개의 작품과 21,000여명의 연극인들이 참여 했으며, 100만명이 넘는 관객과 함께 두텁고도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하며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서울연극제를 이 장소에서 하지 못하게 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한 사태입니다.
서울연극협회는 대관탈락이라는 날벼락을 맞고 넋이 나갔습니다.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달려와 뒤통수를 때리고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엄정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행정입니까? 날벼락을 맞고 몸과 마음이 혼절한 연극인을 먼저 위로하고 방문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나주지도 않고 서류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행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연극제를 사랑하고 아끼는 연극인과 국민은 이 사태에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문화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관람을 하는 국민이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연극인들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주인들 몰래 관리자들이 주인을 극장에서 쫓아냈습니다. 정말 묻고 싶습니다. 정말 잘한 일입니까?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안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서울연극제의 역사를 단절시킬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팩의 분리와 통합 그리고 새로운 극장의 오픈 등, 우리가 만들어 온 역사와 공간을 재단하고 디자인하는데 왜 주인인 현장연극인들의 목소리를 신중히 듣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낸 세금을 사용하는 일에 현장의 주인들을 공적으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참으로 잘 못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서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소통을 기본으로 여럿이 함께 연극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예술가입니다. 부디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센터의 행정가들은 가슴을 열고 우리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진정한 이 시대의 문화융성을 연극인과 함께 추진해야합니다!
가칭 ‘한국연극 지키기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될 예정입니다. 상업화되고 관주도형 대형연극을 예술지향적이고 민관이 함께 만드는 한국연극을 위해, 연극의 미래를 위해 함께 할, 범 연극인들의 단체인 ‘한국연극 지키기 공동대책위원회’는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어둠이 내리면 새벽이 오고 태양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압니다. 우리는 이번 서울연극제 사태가 새로운 새벽과 희망찬 태양을 맞이하는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석해주신 연극인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서울연극제를 지켜주세요’ 운동에 함께 해주시고 오늘도 추운 날 거리시위를 해주신 연극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많은 걸 깨닫고 느끼고 감사드리는 한 해였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서울연극협회의 정신을 전달 드리며 끝을 맺겠습니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감사합니다.
12월 22일
서울연극협회 회장 박장렬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26 / 드림시어터컴퍼니 대표 정형석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
엊그제 연극 한편을 무대에 올렸다.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
이 어려운 시기에 왜 또 연극을 만드느냐고.
연극 장사꾼들도 버티기 힘든 최악의 불황이라는데.
장사꾼이 아니라서 만든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라서 만든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에 힘든 사람들 위안 좀 되라고.
그게 연극이니까. 그게 내가 연극하는 이유니까.
오늘, 젊은 친구 하나가 극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면담을 했다.
물었다. 연극이 뭔지 아냐고. 연극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그 질문을 던지면서 문득 내 자신에게 되물었다.
연극이 뭔지. 난 연극을 왜 하는지.
잊고 있었던 이 질문의 답은 무엇인지.
그때 스마트폰에서 띵 하는 알림 음이 울렸다.
서울연극제 지키기 시민운동 밴드에서 울리는 알림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르코앞에서 열린 릴레이 시위.
공연 준비를 하느라 잠시 소홀했던 서울연극제 대관 사태…
잠시 접어두었던 생각을 떠올린다.
이 싸움…
난 애초부터 이 싸움은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라 판단했다.
허상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이비 천박한 자들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신과 신념을 지닌 연극인들의 싸움.
이건 누가 봐도 빤 한 싸움 아닌가.
연극인들이
아르코극장을 뺏긴다고, 전통을 잃어버린다고, 서울연극제가 흔들린다고
연극인들이 지는 것인가?
연극인들의 극장을 빼앗고, 전통을 끊고, 서울연극제를 흠집 낸다고
저들이 이기는 것인가?
따뜻한 실내에서 희희낙락하면서 연극인들을 조롱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승자인양 비열한 웃음을 뿜어대며 깔깔거리는 저자들이 승자인가?
순수함과 열정과 정신으로 무장하고 불의에 맞서 엄동설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연극인들이 패자인가?
묻고 싶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위원장.
문화가 뭔지, 예술이 뭔지.
예술위원장 자리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묻고 싶다.
한팩. 이곳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곳인지 궁금하다.
센터장. 이 사태를 일으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엄동설한, 아르코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저 순수한 열혈 청춘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심의 위원? 평론가?
신념이란 게 있는 분들인지 궁금하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다른 무엇을 평할 자격이 진정 있는지 궁금하다.
신념이 결여된, 신뢰를 잃은 평론이 평론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하다.
연극인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자들이 연극 평론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연극 평론가라 불리 울 수 있는지 궁금하다.
연극이 뭔지, 연극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연극의 본질이 무엇인지,
혹 알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연극을 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리는 젊은 청춘들에게 연극은 무엇이며 연극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연극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답해 줄지 궁금하다.
어느 세계에나 권력은 존재한다. 연극판에도 권력은 만들어지고 그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있다. 그 권력을 누리며 살아온 원로 선생님들. 어르신들께서는 무슨 정신으로 이 사태를외면하시는 지, 무슨 정신으로 저들의 편에 서는지,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신지 묻고 싶다. 그리고 감히 말씀 드리겠다.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존경을 잃으면 다 잃는 거라고.
역사는 항상 증명해왔다.
무엇이 승이고 무엇이 패인지.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
이번 싸움에서 지는 건, 잃는 건, 저자들일 뿐.
이번 사태로 민낯을 드러낸 저들의 천박함과 무지와 비열함과 거짓이
드러났으니 연극계 미래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연극인들은 잃을 것도 질 것도 없다.
애초에 가진 게 없고 이기려 연극하는 게 아니니까.
극장이야 새롭게 영혼과 정신을 불어넣어 전통을 다시 만들어 가면 되는 거고
연극제야 이 없으면 잇몸으로 열면 되는 거고.
연극이 위대한 건, 예술이 위대한 건,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권력으로 힘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정신을 움직이진 못한다.
세상을 움직이진 못한다.
권력에, 힘에 움직이는 마음이, 정신이, 세상이,
그것이 온전한 사람의 것이고 온전한 세상인가.
연극은 온전한 사람을 꿈꾸고 온전한 세상을 꿈꾼다.
불의에, 권력에 흔들리는 사람, 흔들리는 세상을
온전함으로 지키려는 게 연극이고 연극인의 사명이다.
당신들은 살아오는 동안 누구를 감동시켜 본 적이 있는가.
그 어떤 이의 삶을 감동으로 변화 시켜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우리는 있다.
한편의 연극, 하나의 연기, 하나의 대사로
많은 사람들을 그래본 적 있다.
나는 오늘도 그 것을 한다.
연극.
이것이 내가 연극을 하는 이유고
이것이 내가 연극을 하러 온 단원들에게 가르치는 연극이다.
당신들.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기 바란다.
사람이 되고 싶다면
오늘,
한편의 연극을 보기 바란다.
메리크리스마스~
2014년 12월 25일
– 오늘 생일 맞은 드림시어터컴퍼니 대표 정형석 –
서울연극제 지키기- 100인의 릴레이 글27 / 극작가 위기훈
<‘사태가 아닌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연극제의 터전을 앗아가는 것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의 만행과 같습니다.
독도를 두고 일본이 그들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매우 보잘것없습니다. 무인도인 독도에서 물개를 잡던 일본 시마네현 어부가 이 섬의 일본영토 편입원을 일본 정부에 제출, 자기한테 이 섬을 대부해달라 청원했는데, 이를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1905년, 일본 정부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결의한 것이 유일한 근거입니다. 일본의 이 같은 행위를 역사나 지리·문화를 묵살하고 연관 국가나 국제적인 양해 없이 행해진 일방적인 횡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서울연극협회를 ‘일개 단체’라 지칭하며 ‘심사 요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서울연극제 대관을 취소시킨 것은 앞서 얘기한 일본의 행위와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이는 명백하게 횡포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팩의 결정이 철회되어 서울연극제가 올바르게 진행되도록 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서울연극제라는 공연문화의 전통이 한국공연예술센터라는, 문화예술위원회 산하 단체로 인해, 그것도 소수의 심사위원 결정에 의해 존폐 위기에 놓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애초 ‘서울연극제’를 심사 대상으로 삼은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심사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심사 대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인습이 아닌 전통으로 계승, 발전 시켜야 할 서울연극제가 어떻게 심사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심사위원들도 아르코예술극장 앞으로 나와 피켓을 들어주길 부탁합니다. 심사위원들이 먼저 잘못을 인식하고 태도를 바꾸어 이번 사태를 바로 잡는데 동참한다면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의 시선은 비난이 아니라 존경으로 바뀔 것입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결코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깐의 오판이 이렇게 큰 잘못이었구나 인식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스스로 아르코예술극장 앞에 나온다면 우리 모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로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번 사태가 진정한 계기가 되어 무궁한 연극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해주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2014년 12월 26일
극작가 위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