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자와 미생
– 이 양 숙
작: 김동식
연출: 정한룡
공연일시: 2015/01/09 ~ 2015/01/18
공연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최근 들어 공감대가 가장 높은 단어는‘미생’일 것이다. ‘완전하지 못한 생명체’라는 뜻의 ‘미생’을 제목으로 하는 웹툰과 드라마는 ‘하루하루 그저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직장인들 특히 비정규직 사원들의 자화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폭발적인 공감대를 이끌었고 여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었다. 극단 관악극회에서 극화시킨 <유민가>에도 난세가 만들어내는 불굴의 ‘영웅적 인물’은 없었고, 등장인물들 모두다 ‘미생들’ 뿐이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사실, 국권을 상실하고 시대적 상황에 떠밀려 낯선 타국 땅에서 집세와 하루 한 끼 해결을 고민하며 모진 삶을 연명해야 했던‘유민들’에게 ‘국권 회복’의 의지나 ‘일본에 저항’할 여력은 없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한숨만 늘어’에서처럼 그 흔한 그리움의 곡조나 서러움의 감수성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었다. 김주사가 했던 대사처럼 그야말로 체면이고 가문이고 현해탄을 건너올 때 죄다 조선에 버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생존 자체를 위한 몸부림, 그것이 전부였다.
만수의 큰 아들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둘째 아들이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간 것도, 만수가 아편중독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도, 옆집 사는 순희가 사랑하는 만수의 셋째 아들을 떠나 일본 앞잡이 노릇하는 서기관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것도, 결국 하루를 버티고 살아내기 위한 최선의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살아갈 삶의 터전을 잃고, 미래를 위한 그 어떤 의욕조차도 박탈당한 채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해 한다는 건 비참하고 비굴할지언정 그들이 할 수 있는 그 순간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대에 올려 진 작품에서는 그만큼의 비참함이나 비극감이 극적으로 제대로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처절한 몸부림을, 어쩌면 불편한 정도로 조금 더 비천한 모습의 전개를 기대했었기 때문일까? 특히, 마지막 윤재 김 주사의 죽음은 사실 극에서 비장감을 돋우어 주는 극적 장치일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극적인 긴장감을 살려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젊은 배우들의 설익은 연기력이 그 한 서린 내용을 충분히 살려내기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시대극이 무대 위에 올려 진 이상 관객은 무관심했든 무지했든 수치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역사의 순간과 대면해야 하고 인식상의 깨달음이든 변화든 관객들은 숙제를 안고 나와야 한다. 웹툰이나 드라마 ‘미생’이 그것을 읽고 보았던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미생’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미생들’특히 비정규직 사원들의 애환을 다루며 그들을 위로하고 응원해 주었기에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얻고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비정규직에 대한 여러 관심과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관악극회의 ‘유민가’는 75년 전 우리 역사의 가장 비통한 지점, 그리고 그 시대 선조들의 애환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어낼 수 있었던가? 마지막 이홍의 대사 “죽기는 왜 죽어, 살어야 된다. 살려고 나온 세상 살고 살고 또 살아야 한다”는 드라마 <미생>에서 오차장의 대사와 오버랩된다. “오늘 하루도 견디느라 수고했어. 내일도 버티고 모레도 버티고, 계속 계속 살아남으라고.”
그렇다. 그렇게 미생들처럼 버티고 살아준 ‘우리’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