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가> 유민을 공감하는 우울한 시대
박연숙(숭실대 교수/예술철학자)
작: 김동식
연출: 정한룡
공연일시: 2015/01/09 ~ 2015/01/18
공연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관극일시: 2015년 1월 9일- 18일
1945년 좌익계 잡지 <희곡문학>에 실린 김동식의 <유민가>가 66년의 세월이 지나 오늘의 관객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작품성에 대한 찬사이자 동시에 ‘유민’의 고단함을 겪는 시대적 우울감 때문이다. <유민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고단한 삶을 배경으로 이웃하며 사는 세 가구의 이야기이다. 아들 셋과 큰며느리를 거느리는 이수찬 가족과 외동딸 분조와 단출하게 사는 김주사, 전부인의 아들 수길, 재혼한 부인과 사이에 낳은 딸 순희와 사는 서만복 가족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 인물 중에 가장 비극적인 인물을 꼽자면 필자는 이수찬을 첫째로 꼽겠다. 비극적 인물의 특징이 파멸에 이르는 것이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주사가 마땅하지만 고통의 크기에서 서만복이 앞선다고 생각한다. 서만복은 큰아들 일홍이 절도로 감옥에 가게된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볼 때 도덕적 절개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막내아들 삼홍이 일본인의 양자가 되겠다고 찾아와 호적 정리를 해 준 후 그 분노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김주사의 유혹에 넘어가 마약장이로 전락하는 비극의 크기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유민가>의 결말은 파국으로 끝맺지 않는다. 이수찬이 중독을 극복하고 언젠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의 실마리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으로 돌아온다고 유민의 처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유민 생활의 고단한 시작이겠지만 그러한 희망마저 없이 현재의 처지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상실하는 파국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필자가 <유민가>에서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세 부류의 여성상이다. 이수찬의 큰며느리 남이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모습이다. 시아버지 공양 잘 하고 남편 말에 순종하며 시동생들까지 잘 돌보는 모습이 비록 자식은 없지만 전형적인 어머니상에 해당한다. 서만복이 재혼하여 낳은 딸 순희는 삼홍을 사모하였음에도 부모님의 강요로 일본인의 꼭두각시 서기에게 시집가게 되는데, 시집가기 전까지는 죽어도 싫다고 했지만 정작 결혼 후에는 비싼 코트를 걸치고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는 것으로 볼 때 자기 정체성 없이 이익과 안일함을 쫒는 여성이다. 서만복이 순희와의 결혼 조건으로 서기로부터 돈을 받기로 했지만 결혼 후 그 돈을 받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데도 순희는 오히려 남편과 합세하여 부모를 홀대한다는 점에서 속물적인 인물이다. 가장 현대적인 여성인물로는 분조가 돋보인다. 분조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마약중독자 아버지 김주사를 잘 돌뿐만 아니라 아들과 어머니를 잃은 가족의 비극을 이해하고 감당하는 인물이다. 분조는 이홍이를 사모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결혼을 단념할 정도이다. 이 작품에서 결정적인 한 장면은 분조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자 자살한 김주사의 유서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잃고 조국을 잃고 유민자가 되어 약에 의지하면 살던 한 남자의 불가피한 마지막 선택에서조차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스스로의 참회가 깊이 배어있어 더욱 감동적이었다.
관악극회의 특수성 때문인지 배우들의 연기수준이 고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특히 장년층과 청년층의 연기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대는 2층 구조였으나 특별히 2층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고, 작품의 초반부에서 배경이 일본이라는 분위기를 주지 못해 유민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간이 걸렸다. 인물의 성격 구축에 있어서 이수찬의 아들 이홍이 매우 약했던 점 또한 아쉽다. 이홍은 일홍이나 삼홍에 비해 연기 비중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지 못한 인물이다. 이수찬 가족을 지탱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에서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유민가>는 나라 없이 지내던 고달픈 시절의 희곡이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풍요의 오늘날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또 다른 유민의 심정이 되어 깊이 공감하며 보고 있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취업의 불안정성, 따라 잡을 수 없는 주택시장, 인정사정없는 갑의 횡포 등이 자기나라에 살면서도 유민의 처지이기에 오늘의 젊은 관객과 공감의 깊이가 맞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