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호 편집인의 글)
역사 국정화와 예술 검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연일 뒤숭숭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 금방 욕먹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게 밀어붙인다. 방송은 연일 찬성과 반대가 양립하는 모양을 실어 나른다. 양립이란 참으로 묘한 단어이다. 양쪽 다 나름의 타당성이 있거나 양쪽 다 일정한 문제를 지닌 상태, 즉, 양시론과 양비론으로 인식되곤 한다.
역사학자의 90%가 좌편향이라는 현 정부의 진단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정화에 대한 일반의 지지는 대단한 셈이다. 전문가는 90대 10인데 비전문가들은 찬반 양립이니 말이다. 물론 소수가 크게 보이는 착시현상은 늘 있다. 또 언론도 그런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상대적으로 크게 다뤄주는 건 때로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 상황 전달과 분석을 전제로 가능한 일이다. 역사학이라는 전문 분야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치권력이 역사를 진단하여 방향을 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국정화에 대한 전 세계의 추세와 우리의 교과서 발간 변천사를 정확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교육과정은 어떻게 정해지고 그에 근거한 교과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친절하게 소개해야 한다. 과거 우연히라도 북한 방송을 들으면 처벌받고 북한 국기가 들어간 영상은 결코 볼 수 없던 시절로부터 어떻게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나 개성공단 같은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배경을 설명해야 한다.
역사 기술에 있어 자만과 자기비하는 금물이다. 툭하면 민족성 운운하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동시에 우리 민족이 최고라는 식으로 우쭐한다. 우리는 소위 국정 교과서 시절 이러한 심각한 자기분열적 교육을 자주 경험했다. 자기비하적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자존을 회복해야 한다. 또 비전문적 자가당착과 자만을 떨쳐버리고 성숙한 자기반성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역사 교육이 가야할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가(史家)들은 자주 권력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한 긴장 관계야 말로 나라를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그것을 못 견뎌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 하는 순간 권력은 독재가 되고 나라를 망치는 원흉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사회를 지켜보며 그것에 대해 말한다. 때로는 구체적이고 때로는 추상적인 그 발언들은 세상에 대한 건강한 감시이다. 그 감시가 불편해서 예술을 길들이려고 할 때 사회와 국가의 건강성은 크게 훼손되고 만다.
1980년대 말까지도 우리는 브레히트의 희곡을 공연할 수 없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불과 30년 전까지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 와서 브레히트는 공산권 작가이니 그의 작품을 금지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공산주의 사상의 실현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니 위험천만이고 따라서 절대 공연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한민국은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 일, 즉,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예술에 대한 검열이 브레히트 금지로 되돌아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설마 사실일까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이고 논란 자체가 낭비적인 일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귀찮아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엉터리 일은 당장 막아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엄중하게 책임도 물어야 한다.
단언컨대 역사는 학자와 교육자의 판단에 맡기고 예술의 표현은 예술가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 그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결코 국가 운영의 자격이 없다. 정치권력은 역사나 예술로부터 철저한 거리 유지를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을 지키고 안 지키고에 따라 그 권력의 정당성 여부가 판가름난다. 이에 있어 우리 국민들은 정당하지 않은 정치권력은 결코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퇴출시켰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이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2015년 11월 2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