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과 개입, 욕망과 창작 사이
–연극 <맨 끝줄 소년>
신영미
작: 후안 마요르가
연출: 김동현
번역: 김재선
드라마터그: 손원정
주최/제작: 예술의 전당
공연일시: 2015.11.10 – 2015.12.3
공연장소: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관극일시: 2015.11.19
맨 끝줄의 자리에선 보는 행위를 들키지 않고 남을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위적 위치에서 타인을 보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관음증적 응시가 연극 <맨 끝줄 소년>을 관통한다.
<맨 끝줄 소년>은 가르치는 일에 지친 문학 교사 헤르만(박윤희 분)과 작문에 재능을 가진 클라우디오(전박찬 분)와의 은밀한 글쓰기 수업에 관한 이야기다. 헤르만은 수준 미달의 글을 써 낸 학생들 틈에서 클라우디오의 세밀한 묘사와 금기를 오가는 자극적인 표현에 매료됐다. 같은 반 친구 라파(유승락 분)의 가족을 훔쳐보고 써낸 클라우디오의 작문은 항상 결말 대신 ‘다음 시간에 계속’이라는 말로 중단된다. 비상한 작문 실력은 소설가의 꿈을 접은 헤르만의 욕망을 부채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헤르만은 방과 후 비밀 수업을 진행하며 클라우디오가 더 매력적인 소설을 창작하도록 채근한다. 이 과정에서 윤리의 선을 넘나들고 관찰의 대상이 전복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서사다.
연극은 헤르만이 작문을 채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0점, 2점 선에 머무는 최악의 상황을 두고 학생들에게 ‘관점’을 설명하느니 침팬지에게 양자 역할을 설명하는 게 나을거라 자조하던 때 클라우디오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글을 미술관 큐레이터인 아내 후아나(염혜란 분)에게 읽어주는 순간 무대 상수에 클라우디오가 등장하고 헤르만과 동일한 대사를 읊는다.
클라우디오가 쓴 작문을 듣고 그의 시선을 쫓을 수밖에 없는 관객은 원치 않아도 라파의 가족을 관음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다.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 허구와 사실을 혼동하는 위험성에 동화되는 것이다. 후아나는 친구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은 듯한 클라우디오가 불쾌한 아이라 단정하면서도 다음 글을 기다린다. 즉 클라우디오가 쓴 글의 유일한 독자인 헤르만과 후아나는 이미 그의 작문에 매혹된 것이다. 문체가 바뀌거나 지루해지면 쥘베른, 디킨스, 체홉, 세르반테스 등 다양한 대문호의 작품을 빌려주고 기술적인 부분에서 영향 받기를 권면한다.
클라우디오는 대상을 선택해 훔쳐보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한다. 현실을 반영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본인이 쓴 소설 속 갈등의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클라우디오가 관음적인 시선으로 라파의 가족을 훔쳐 본 결과 가족 내의 균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만 우선시 하는 라파 아버지(백익남 분)의 발언들이 에스테르를 지치게 할 거라 예감했고 그녀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또 불온한 엿보기로 에스테르의 척추가 좋지 않아 춤을 출 수 없다고 판단해 ‘비 조차도 저렇게 맨발로 춤추지 않는다’는 연시를 보낸다. 초반에는 단순히 라파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싶은 듯 행동했지만 주인공의 갈등은 자신 안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문학 교사 헤르만의 조언대로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한 것이다. 라파 부모는 라파의 수학 성적을 오르게 한 클라우디오가 자신들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 중에 중산층 밑바닥의 허영과 가식을 노출한다.
클라우디오가 라파의 집을 관찰하고 글로 쓰게 된 원인에는 결핍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9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병든 아버지와 사는 클라우디오는 자신과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라파의 가족을 공원에서 꾸준히 염탐했다. 이상적일 것 같은 가족에게서 균열을 발견한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라파 아버지의 향수를 몰래 뿌린다거나 에스테르에게 고백하고 키스하는 행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질서를 전복시키고 대타자의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불온한 상상의 역치가 높아진 것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연극의 초반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의 조언을 낱낱이 반영하는 듯 보이나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 창작을 할 때 가까이에서 편견 없이 보라고 제안한 헤르만은 클라우디오가 쓴 글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한 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초반 헤르만은 흥미로운 소설의 진행을 위해 금기를 어기는 클라우디오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시험지를 훔쳐 주는 등 비 윤리적인 처신을 했다. 이는 본인이 실현하지 못한 글쓰기의 욕망을 제자 클라우디오를 통해 대리 만족 하려는 의도가 깃든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클라우디오의 작문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불편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진다. 또한 클라우디오의 관음 대상이 헤르만 자신을 향한 것임을 인식했을 때 과거에 했던 발언들과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이제 헤르만이 강조했던 관점의 문제, 부인과 대화한 예술의 기능, 클라우디오가 지닌 창작에 대한 욕망 등을 간과할 수 없다.
헤르만과 클라우디오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분리된다. 진정한 예술은 세상에 빛을 비춰야 하지 헷갈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문학 교사 헤르만의 예술론은 칸트의 미학과 직결된다. “네가 쓴 작품을 교장선생님이 읽으면 어떨까? 라파가 읽으면? 라파 아버지가 읽으면?” 헤르만은 이렇게 예술을 끝없이 수용자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헤르만이 강조했던 ‘작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누구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가’란 발언도 위의 맥락과 연계되어 있다.
반면 도덕 위에서 줄타기 하며 놀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던 니체의 개방적 태도는 클라우디오의 예술관에 좀 더 가깝다. 그 어느 것과 대면해서 자신의 힘을 전개시킬 수 있는 모험을 클라우디오는 글쓰는 행위로 치환한 것이다. 의지를 넘어선 욕망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다는 클라우디오의 글쓰기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도취의 실현으로도 해석된다.
클라우디오는 자신이 쓴 작품의 제목을 ‘허수(虛數)’로 정했다.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수. 정해진 답이 있는 수학처럼 소설 창작에서 공식적인 기술론을 주입하던 헤르만과 달리, 상상력을 접목한 클라우디오의 창작에 대한 관점이 ‘허수’라는 메타포로 드러났다.
이 공연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많다. 그 연극적 장면성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와 소도구, 조명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무대 양 옆으로 투명한 벽이 세워져 있고 정면은 반투명한 샤막을 설치했다. 글쓰기가 장면화 되는 순간, 즉 시공간이 중첩되는 장면에서 클라우디오는 샤막 안에서 나누는 가족의 은밀한 대화를 들을 수 있고, 관객 역시 클라우디오의 불온한 행동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경험을 한다. 설치된 오브제들도 사실적인 공간이나 특정한 장소를 상징하지 않고 미니멀한 기능성을 추구했다. 테이블 4개와 몇 권의 책, 의자가 전부인데 테이블 위의 녹색 스탠드에 주목해야 한다. 스탠드는 장면이 전환되거나 글에 대한 첨삭이 진행될 때 배우가 직접 키고 끄며 모호한 경계를 나누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객석의 중앙 통로에서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구성과 맞물린 무대 활용은 공간감이 깊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었기에 더 적합하게 실현됐다. 함축적인 의미를 부여하진 않으나 갈등이 고조되는 감정을 구음으로 만들어 극적 분위기에 일조한 코러스의 역할도 적절했다. 밀도 있는 대사를 탄력 있게 표현한 배우들의 역량도 극의 완성도에 기여했기에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작품이다.
맨 앞줄 관객은 중앙 통로에서 대사하는 배우를 관찰할 수 없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나아가 헤르만, 클라우디오에게 관찰 당하는 대상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클라우디오의 시각으로 관극을 할 수 있게 마련된 맨 끝줄 좌석 역시 2. 3층 자유석 관객에겐 관찰 대상이 된다. ‘어디에나 cctv가 있다’는 대사대로 의도한 거라면 관음의 대상과 관찰자, 실재와 허구를 완벽히 분리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걸로도 해석된다. 빠르게 진행되는 극의 흐름을 놓치지만 않으면 무대 위에 투영된 자신을 발견하고 예술이나 욕망, 관점에 대해 스스로 사유할 질문을 가득 얻고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