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fine)하지 않은 삶에 대해 – <아이 엠 파인 투>
김태희
작 : 공동창작
연출 : 부새롬
단체 : 달나라동백꽃
공연일시 : 2015.12.03.-20
공연장소 : 게릴라씨어터
관극일시 : 2015.12.10
2015년은 버티기 힘든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메르스, 역사 교과서, 흙수저, 헬조선. 연말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2015년의 키워드들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전 발표된 ‘혼용무도’라는 사자성어가 적절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삶은 각박해지고 그럴수록 대상을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가 차오른다. <아이 엠 파인 투>는 그런 증오와 분노를, 나아가 그 위에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 우리의 삶을 직시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작품은 2,30대 배우들의 사례 수집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학원생, 권고휴직자, 상경한 처녀, 가정불화를 겪은 청년, 취업 준비생, 기자가 되고 싶은 지망생의 역할을 부여 받고 그들의 입장에서 분노와 증오를 풀어내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삶에서 마주하는 분노와 증오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밝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물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증오는 청년세대의 것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제법 세밀한 시선을 보여준다. 취준생의 분노, 가정 불화의 트라우마, 대학원생의 고된 일상은 이미 전형적인 그것에 그치지만, 비둘기를 보듯 경멸의 시선으로 노인 세대를 본 경험, 데모에 나간 자신을 영웅시하는 친구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도취의 경험과 같이 세밀한 시선의 결들은 이 작품의 구현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사실 우리 연극계에서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다루는 작품이 새롭지는 않다. 그들의 분노 역시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이 작품의 미덕은 이 분노와 증오를 마주하는 배우들의 존재가 한 겹을 더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각자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장면 사이사이 배우들이 인터뷰를 하는 장면들이 삽입된다. 이들은 이 작품을 위해 분노, 증오와 관련된 키워드를 제시받았고 이에 대해 고민하면서 인물들을 구축해나갔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배우들에게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처음 분노와 증오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배우들은 그 정체를 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렵고 심지어 일부는 한 번도 그 정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노라 고백한다. 비단 이는 배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무기력한 청년 세대 대부분에 해당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이를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투쟁과 저항이란, 먼 이야기에 불과하다.
관객은 배우들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 인물을 무대 위에 구축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기회를 갖는다. 나는 언제 분노하는가. 나는 무엇을 증오하는가. 이런 감정은 표출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무대 위 인물들의 감정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이내 절규에 가까운 난장이 펼쳐진다. 물론 정리되지 않은 장면들도 있었고 마지막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에 늘어지는 감도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날것으로 투척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갖는 흡입력은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분노와 증오의 감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애초에 이 극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비록 두루뭉술한 해원으로 극이 마무리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존재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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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파인 투>는 청년 세대의 대표적인 표상들을 무대 위로 소환하고 이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분노와 증오에 대해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그 감정들을 무대 위에 펼쳐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조차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청년 세대의 모습들을 투영한다. 타인을 향한, 자신을 향한 혹은 세상을 향한 다각적인 감정들이 한바탕 무대 위에 펼쳐질 때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삶을 직시할 수 있다. 파인(fine)한 삶을 위해,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작업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