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아비
마음에 품은 칼, 저항
2016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작: 공동창작
연출: 이성열
단체: 극단 백수광부
공연일시: 2016/04/08-04/17
공연장소: 대학로 SH아트홀
관극일시: 2016/04/13
눈을 떠라
나는 봐야겠다.
입을 열어라
나는 말해야겠다.
길을 닦아라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굳게 닫힌 저 문을 열어라
나는 밖으로 나아가야겠다.
1980년대 말 386세대들은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한껏 고무된 승리감과 뿌듯함 그리고 깊은 안도감을 안고, 이젠 이념을 위한 저항을 끝내고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념을 위해 투쟁했듯 최선을 다해 생업에 집중했다. 너무 집중해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가슴이 뜨거웠었는지 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부모가 되어서는 그들이 가치 있다 믿고 뛰어들었던 청춘의 유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식들의 성공신화에만 몰입했다. 그렇게 꼰대가 되었다.
정의, 선, 도덕, 사랑, 낭만, 진실, 인권, 공감, 책임, 권리, 공정, 평등, 박애, 나눔, 희생, 자유, 예술, 정화, 정신, 존엄, 저항, 용기, 인내, 투쟁. 아…그리고 또 뭐가 더 있을까…잃어버린 것들이…잊어버린 것들이…사라져버린 것들이…죽어버린 것들이…! 극단 백수광부의 20주년 기념작품 <햄릿아비>는 극단 백수광부만의 20년 전 초심을 돌이켜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마음에 품은 칼로 스스로 박제가 된 지도 모르고 살기 바빠 혼이 나간 관객꼰대들의 양심의 폐부도 푹 찔러 깨웠다.
작품 <햄릿아비>는 생활에 지친 상조회사 직원(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햄릿이라 불리는 어떤 남자)이 자신이 탄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한 지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가 햄릿의 아비, 선왕의 요구로 죽음의 한을 풀어주는 거꾸로 시간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여행은 햄릿아비의 죽음이 아닌 한국, 우리의 역사 속에서 결코 잊어선 안 되는 죽음,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맺혀있는 진실로부터 버려진 죽음을 기억하는 여행이 된다. 군부독재시절의 죽음, 윤봉길과 안중근 의사의 죽음, 복직을 외치다 공장 굴뚝에서 추락한 노동자의 죽음, 일제강점기 강제납치 되었던 위안부 소녀들의 죽음, 그리고 세월호… 꽃다운 아이들의 죽음. 아직도 차가운 물속에 잠겨있는 아이들. 작품은 이 죽음들을 기억하는 여행을 통해 역사가 확실한 진실규명으로 매듭지어지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며 결국 현실의 삶이 버려진 죽음들의 무덤이 되어버린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수년전 <자객열전>을 통해 접한 극단 백수광부의 인상을 잊을 수 없다. 한참 체첸의 독립을 위한 테러리스트들의 과격행동이 연일 뉴스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체첸의 상황을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가 활동하던 상해임시정부시절과 대비시키며 한 줄의 잊히지 않는 한마디를 가슴과 뇌리에 박아 넣었다. ‘우리도 한때 누군가에겐 테러리스트였다’ 작품은 매우 역동적이고 유쾌하고 빠른 진행 속에서도 순간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때의 백수광부. <햄릿아비>를 통해 나만 극단 백수광부는 여전히 2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유쾌하고 역동적이고 빠른 진행 속에서도 노련하게 진지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색을 하며 관객에게 묻는다. ‘이래도 돼? 우리? 이대로 이렇게 놔둬도 돼? 정말? 진짜?’라고.
작품<햄릿아비>는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단순 명료한 주제의식, 다양한 양식의 노련한 결합 그리고 빠른 진행과 유쾌한 분위기다.
<자객열전>와 같이 작품<햄릿아비>도 햄릿아비, 선왕의 억울한 죽음에 빗대어 우리 역사 속의 억울한 죽음들의 진실과 그 의미들을 돌이켜본다. 버거워서 혹은 너무 무거워서 외면해 버리고 싶은 역사의 진실들을 우리는 참 많이도 그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는 왜 그다지도 천연덕스럽게 잊고 마는지…참 민족의 특성이라 하기에는 너무 심하다. 촌철살인! 작품<햄릿아비>는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색을 하며 말한다. ‘더 이상 그러지 말자! 이러다간 안돼! 큰일 나겠어!’
이 단순한 한마디 외침은 다양한 스타일로 재미를 더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처음의 빈 무대는 세 개의 스크린과 두 개의 검은 철제 벤치만이 놓여있다. 스크린에는 지하철 차창 밖 무미건조한 도시야경이 흑백으로 흘러가듯 비춰진다. 이어진 햄릿아비의 등장은 인형극 형식으로, 귀에 착착 감기는 현대적인 대사와 귀여운 인형들은 동화 같은 친근함을 준다. 영문도 모르고 햄릿이라 불리며 상조회사 직원은 붉은 드레스의 검은 선글라스를 낀 거트루드를 만나고 자살한 오필리어를 만난다. 전철은 터널 속으로 계속 움직이고, 역사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진실을 왜곡하여 기록하는 큰 붓을 든 사이비 사관이 등장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의 역사 속에 진실은 왜곡되고 북을 울리며 무속적인 구음이 구슬피 울리는 가운데 하얀 옷의 여인은 바닥에 드러누워 외친다. ‘추워. 아파. 잊혀진다. 버려졌다. 더럽다. 맞는 기억을 찾지 못하면 나는 사라진다.’ 느닷없이 현재 어느 고등학생의 공부방이 그려진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학생은 과학실험도구를 가지고 종북 빨갱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도시락폭탄을 제조한다. ‘보수야 일어나 싸워라. 엄마는 홍어다. 썩었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그리고 인증샷! 현 야당정치인들의 실명이 거론되는 순간은 ‘헉!’하고 긴장되기도 하면서 어느 한구석은 시원하다. 다시 기차는 움직이고 장면은 바뀐다. 늘어진 재즈음악이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노동자의 자녀들이 등장하여 복직을 외치며 아버지가 공장 굴뚝에서 떨어졌다 노래한다. 붉은 깃발을 들고 율동하는 모습은 80년대 말 노동의 현장을 그린 노래극이 떠오른다. 사회적 타살. 노동자의 자식들은 이렇게 노래 부른다. ‘우리 아빠 돌려줘. 지금 당장. 보라색 아빠가 내 앞에 서 있네.’ 멜로디는 그렇지 않은데 가사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하얀색 의자들이 무대에 놓이더니 배우들이 극을 멈추고 일련에 연극계에 있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상검열 문제를 거론한다. 극단 백수광부의 20주년 기념작이 왜 <햄릿아비>이며 배우들과의 공동창작으로 기획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정확히 드러내는 순간이다. 몇몇의 관객들은 동조했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긴장하고 뭐라 반응도 못한 채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두려움. 그것은 진실이 까발려지며 뱉어진 순간에 드러나는 두려움, 바로 그것이었다.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극은 다시 진행된다. 비가 오는 광화문 수요집회. 동아시아전쟁 때 일본군이었던 한 일본노인이 위안부를 두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이 사람들에게 단짝 들려 치워진다. 등 뒤로는 일본 정부와 한국정부의 은밀한 협약이 비춰진다. 소녀상이 치워진 의자에 앉은 햄릿이라 불리는 사나이. 그의 시간여행은 점점 그의 역사인식을 깨운다. 비에 흠뻑 젖는 사나이. 비를 흠뻑 가슴에 맞는 사나이. 내리 퍼붓는 비를 느끼며 말한다. ‘잠들 것인가 깨어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부러워 하던 포틴브라스. 현대인의 자괴감. 반볷되는 죽음 앞에서 여전히 돈만 세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안중근과 그의 어머니. 인형대신 인형처럼 움직이는 배우들. 안중근의 수의를 입은 사나이. 수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이 옷은 너무 커. 내 스타일 아냐. 나 집으로 돌려줘’ 이어지는 파도소리. 진도 팽묵항. 수의를 입은 햄릿은 그곳에서 아직 자식의 시신을 건지지 못한 세월호 미수습자 부모들(은주엄마, 순교엄마)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형식적인 관광객들의 값없는 동정이 그려진다. 죽은 한 학생의 생일. 진도 씻김굿으로 그들의 죽음을 위로한다. 삽을 든 진도사람 둘. <햄릿>에 나오는 무덤지기를 연상시킨다. ‘누가 그런 겨? 누가 그랬재. 누가? 몰러. 이 땅은 텄다. 안파진다.’ ‘저기 기울어진 땅이 있다. 여기에 아직 사람이 있다. 여기에 아직 사람이 있다. 아직도 화가 나 있다’ ‘선생님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상조회사 직원은 유골함의 급으로 죽음을 환산한다. 30만원, 50만원, 100만원. 문득 시간여행에서 깨어난 상조회사 직원은 자신이 만원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걸 인식한다. 그리고 주변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시간여행 속에서 만났던 그 등장인물들인 것도 인식한다. 그 순간 그 속에서 세월호 은주엄마를 만난 사나이. 은주엄마는 그에게 서류봉투를 건네고 그 안에는 햄릿아비가 복수를 다짐하며 건넨 칼이!!! 그는 칼을 손에 쥔다. 마음에 품은 칼!! 그것은 불의에 진실을 요구하는 저항!! 저항의 칼이다.
이 많은 이야기들이 이 무거운 역사들이 시종일관 유쾌하고 빠른 진행으로 한편의 버라이어티한 광대극을 관람한 인상을 준다. 이 넉살좋은 친근함이 극단 백수광부의 주된 특색이 아닐까. 다양한 소품과 소도구, 때로는 군무로 때로는 잘 훈련된 움직임으로 배우들 스스로가 등장인물이기도 무대의 한 미장센(mise-en-scene)으로 존재하기도 하면서, 인물로서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감정에서 문득 빠져나와 이성적인 기능의 역할로 전이되는 연기의 control이 매우 흥미롭고 훌륭하다. 이 점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기법도 연상된다. 연출과 배우가 한 목소리로 만들어낸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상념의 여행. 부러웠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미학,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잘 어우러진 한 편의 넉살 좋은 진지한 정치의식을 지닌 작품. <햄릿아비>는 극단 백수광부를 새로 시작하며 관객의 가슴도 20년 전 불의에 항거하던 그 시간으로 새로 시작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본인에겐 그렇게 들렸다. 눈을 뜨라고, 입을 열라고, 걸음을 옮기라고, 그리고 진실을 향해 밖으로 나가라고!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