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초혼>,
우주 크기의 슬픔을 한 점으로 응축하다.
오세곤(순천향대 교수)
작: 안민수
연출: 김지욱
단체: 삼류극단
공연일시: 2016/07/09-10
공연장소: 고양시 아람누리 새라새 극장
관극일시: 2016년 7월 10일 오후 6시
자코메티의 조각은 가느다란 철사 몇 줄 엮어 놓은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 작품이 국제 경매에서 1억 달러 이상에 팔린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가치 부여가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철사 몇 가닥이 아니다. 거대한 쇳덩이를 깎고 깎아 그런 모양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치 블랙홀이 그렇듯 그 가느다란 형상은 온 우주의 부피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안민수 작, 김지욱 연출의 <초혼(招魂)>은 특별한 연극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구사하는 대사가 거의 “아이고”뿐이다. “아이고”는 장례 때 하는 곡(哭) 소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하나로 집약한 추상(抽象)의 전형이다. 이렇게 응축된 표현을 갖고 80여분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바로 <초혼>이다.
본래 죽음은 연극과 통한다. 프랑스의 장 주네는 현실의 건너편에 있는 허구(연극)와 삶의 반대편에 있는 죽음은 같은 것이고 따라서 공동묘지에 극장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의 죽음의 의식인 장례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특히 치밀한 계획과 절제된 표현은 제의와 연극을 같은 뿌리로 보는 학설에 힘을 실어 준다. 그 장례를 마치 자코메티가 한 것처럼 깎고 또 깎고 압축하고 또 압축했을 때 나오는 게 아마 “아이고”일 것이다.
초혼(招魂)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윗옷을 갖고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 부분을 잡은 뒤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름”으로써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려고 시도하는 이 절차가 끝나야 비로소 죽음이 공식화된다.
원래 1980년 <동랑레포토리극단>이 공연했던 <초혼>의 대본은 그냥 “노인”을 초혼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김지욱이 연출한 <초혼>에서는 초혼의 대상이 어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이다. 아마도 이 시대 가장 위로받아야 할 대상으로 그 분들을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사실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도 제대로 된 사과도 위로도 못 받은 채 계속 마음의 상처만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라새 극장은 돌출무대이다. 돌출무대는 무대와 객석이 대립형이 아니라 무대를 객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무대 위의 장례 의식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치르는 셈이 된다. 그래선지 극 중간 쯤 관객 일부를 무대에 올려 죽은 이에게 예를 표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아마 김지욱 연출은 극장을 선택할 때부터 이런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무대는 철저히 절제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장방형 천 7개를 천정부터 바닥까지 늘어뜨려 놓은 것뿐이다. 그것은 때로 위안소가 되기도 하고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지붕이 되기도 하며, 또 때로 죽은 이를 모시는 상여가 되기도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영정과 위폐를 투사하는 막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거의 빈 무대를 배우들의 소리와 동작만으로 너끈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단 3음절의 대사 “아이고”로 과연 연극이 성립할 수 있을까? 확인 결과 그것은 가능했다. 원래 아주 작은 것에도 집중하고 집중하면 그것이 어느새 거대한 우주로 확산되는 법이다. 꼭 나노(nano)예술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 일상에서도 그런 경험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아마 길 옆에 우연히 난 잡초 한 줄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난생 처음 보는 오묘한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관객들은 더 이상 복잡한 의미 해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배우들로부터 출발하는 슬픔을 받아 같이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을 절제하고 절제하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슬픔이 응축된 표현 “아이고”는 바로 시와 노래가 되고 슬픔을 표출하는 몸짓은 바로 무용이 된다. 그래서 결국 일상의 말보다 수백수천만 배 강렬하고 밀도 높은 슬픔의 블랙홀이 된다.
“아이고”가 어찌 죽은 이들만 위로하겠는가? 망자를 애도하며 산 자들은 슬픔을 토해 놓는다. 그렇게 위로받은 망자의 혼은 편하게 이승을 떠난다 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장례란 죽은 이보다 산 자들을 위한 절차일 수도 있다. 짙은 슬픔을 토하고 나면 정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도 죽음과 연극은 통하는 것 같다.
공연단체의 이름이 ‘삼류극단’이다. 영문명을 보니 ‘The Creative Minority’이다. ‘창조적 소수’ 쯤으로 번역되는 그 말에는 역시 겸손함과 절제가 담겨 있다. 특히 우리말 ‘삼류’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삼류’를 칭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로지 “아이고”만 외치는 연극을 만들었다.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에 천착하는 작품을 올렸다. 참으로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된다.
예술은 일반의 경제 원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이다. 정말 작은 것 하나를 이루려 목숨까지도 바친다. 그래서 예술을 미친 짓이라고도 한다. 삼류극단과 김지욱 연출은 그야말로 미친 세밀함과 절제를 보여 주었다. 극장 선택부터 배우의 소리와 움직임, 또 음악, 영상, 조명 등 세세한 부분까지 작품의 결을 따라 끝까지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애초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안민수 작가도 훌륭하지만 36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것을 무대에 올린 김지욱 연출도 평가받아야 한다. 모두가 크고 화려한 것은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덜어내고 줄이고 비우는 쪽을 선택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