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5/5)
S T A N I S L A W S K I – B R E C H T
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다섯 번에 나누어 ‘스타니슬라프스키–브레히트’를 실었다. 짧지 않은 글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를 한 곳에 묶으려는 욕심은 곳곳에 무리하게 엉키고 있음을 인정한다. 쉽지 않은 글이다. 그나마 이제 끝낸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관객
제자들에게 길을 밝혀 주는 스승을 산스크리트 어로 구루(GURU)라 한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에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나타나면 배우들은 마치 구루가 나타난 듯 숙연해졌다고 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들에게는 작품을 제대로 해석해서 인도해주고 무대 위에서 인간의 참된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이야기해주는 종교적인 지도자와 다름없었다. 배우들에게 극중 역할을 대하는 자세와 영역을 중요시했던 모스코바 연극의 구루는 우는 연기에 몰두하고 있는 배우에게 이렇게 묻고는 했다. “그런데 당신 왜 우는 거요? 그런 거야 관객에게 맡겨야지요!”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뜨거운 쟁점들을 통해 배우들에게 연극의 기능, 역할, 책임감 등을 일깨워주었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은 스탈린의 독재체제 속에서 대표적 예술매체가 아니었던가! 관객을 위해서, 연극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연극의 형식, 체제, 방법 등을 찾는 노력이 간절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섬세하고 완벽한 연기를 찾아 헤매는 예술열정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선구자적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무대는 성스런 실험실이었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형화된 연기법, 무대미술이나 연출에 남아있는 고루한 전통이나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투쟁했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은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을 돌며 순회공연 하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은 배우중심의, 연출가 중심의 연극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객을 위한 연극이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지금도 배우들에게, 우리들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관객을 잊지 마시게!”
Regietheater 혹은 기관총을 든 햄릿
연극이란 작품, 연출가, 배우의 조합이며 조화이다. 물론 음악과 미술이 포함되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출가가 중심이 되어 극중인물과 배우와의 완벽한 호흡을 이루는 무대를 최상의 연극으로 생각했다. 작가와 연출가와의 관계는 연극사적으로 보아도 매우 멀고 가깝다. 그리스 극작가들은 작품에 연출지시문을 써 넣지 않았다. 자신들이 직접 연출했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연극경연대회에서 경쟁이 점차 심해지자 Euripides에 와서는 경우에 따라 작가와 연출의 작업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19세기까지 희곡작품을 출판할 때는 초연의 공연상황을 상세하게 알렸다. 오늘날과 같은 연출의 역할이 없었기에 초연의 공연을 많이 참고했다. 본격적인 연출이란 직업은 사실상 20세기 초반에 비로소 생성되었다. 이때부터 연출지시문이란 기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의 경우처럼 다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자연주의연극 작가들은 지나치게 연출지시문에 목을 매달았다. 이는 연출의 영역을 지배하는 행위이다. 주인공의 이마에 파인 주름살의 개수가 몇 개있지 세기 시작했고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불길의 가닥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려 들었다. 극중 인물의 나이는 몇 살이 아니라 몇 살 몇 개월이 되었다.
우리나라 무대에서도 이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햄릿이 자동소총을 들고 무대에 등장한다. 연출가중심으로 연극이 흐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와서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연출가중심의 연극’(Regietheater)이 유행을 탔다. 1960년대 후반 젊은 세대들의 무정부적 저항이 일어났다.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운동이었다. 이후 연극무대 위에서도 변혁이 일어났다. 고전작가들의 작품이 새롭게 해석되고 색다르게 연출되었다. 햄릿이 진스바지를 입고 기관총을 들고 무대에 등장했다. 오셀로가 목 졸라 죽일 때 데스데모나는 야한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작가나 배우보다는 모든 무대중심의 축이 완전히 연출로 옮겨갔다. 연출의 폭이 넓어지고 연출중심의 연극으로 바뀌자 점차 작가들은 연출지시문에 관심을 버리기 시작했다. 애써 써넣어 봐야 연출의 손에서 뭉개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연출가무대’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참모습이 많이 훼손된다. 연출가는 작품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덧붙이기도 줄이는가 하면 사건의 전개를 다른 장소로 혹은 다른 시간으로 바꾸기도 한다. 때로는 폭력적인 장면이 첨가되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아주 야하게 표현된다. 이런 연출중심의 무대가 많아지면서 점차 독일연극의 수준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출가 페터 슈타인(Peter Stein. 1937 – )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제는 누구나가 자기 마음대로 무대를 주물럭거린다. 그러는 사이 전 세계 연극이 독일의 연출가중심의 연극을 조롱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 연출중심으로 변형된 무대를 이끄는 연출가들 중에는 그럴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지나간 시대의 작품을 새로이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작품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의 효과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연출의 횡포를 감수해야 된다고 이를 받아드린다. 다른 시기의, 혹은 다른 장소의 관객을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손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우중심의 스타니슬라프스키나 작가중심의 브레히트는 이런 연출가연극을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연극을 신성시한, 극장을 종교의 공간으로, 무대를 제단으로 높이 받든 스타니슬라프스키라면 받아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무대를 보지 않고 이미 떠났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수용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많은 희곡작품과 더불어 후세 연극계에 영향을 끼치며 계속 살아남고 있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은 오직 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다. 변형된 형태로지만 제자들을 통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론은 특히 미국연극계에 계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배우양성에 관한 지침서로 오늘날까지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무대는 그리스연극에서처럼 일종의 제단이었다. 배우를 가르치고 지도하던 스튜디오는 일종의 사교단이었고 연습실은 ‘스타니슬라프스키라는 종교’를 설파하는 교단이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극을 신성시하며 그런 성스러움 속에서 연기론을 구성했다. 브레히트는 그 반대로 연극의 세속화속에 자신의 서사극을 심었다. 브레히트에게 무대는 신성한 곳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실험대였다. 무대는 투쟁하는 싸움터였다. 배우란 브레히트에게 이런 자신의 제안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체역할을 하는 투사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에서는 기독교적인 겸손과 온유함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배우를 성직자로 취급한다.
종교단체들이 불당이나 교회를 방방곳곳에 세우고 싶어 하듯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러시아 전역에 작은 극장을 세우려는 꿈을 키웠다. 연극을 통해 시민을 교육하고 계몽하면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분열된 러시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믿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가 연극에 끼친 영향은 시기적으로나(20세기) 지역적으로(세계연극) 한계를 뛰어넘고 있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영미, 특히 미국 연극계의 대부격이다. 그에 비하면 연기법이나 연출상으로 브레히트의 연극전통을 이어받은 극단이 미국에는 없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론은 특히 Strasberg의 연기론을 통해 미국연극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배우양성에 관한 지침서로 오늘날까지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에 거리를 두고 의문을 갖도록 만드는 변증법적 연극을 내세웠다. 그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극의 흐름을 낯설게 하고 무대환상에서 관객을 끌어내리는 서사극을 주장했다. 현실과 무대상황과의 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배우는 배역을 의식적으로 접근해서 배역이 해냈을만한 행위를 보여준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이로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와 배역의 혼연일치를 요구하는 연극이론과 배치된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제자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1901-1982)의 “연기론”(Method Acting)에서도 가능하면 배우로 하여금 극중 인물의 역할 속으로 융해되도록 단련시켰다.
1923년 할리우드의 배우 Lee Strasberg는 모스코바 예술극장의 미국 순회공연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게 된다. 1947년 Strasberg는 Elia Kazan 등과 배우학교 Actors Studio를 건립하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론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Strasberg를 통해 연기론(Method Acting)으로 이어지고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죽은 후에 “연습과 훈련”(„Training und Drill“)으로 집약되었다. 배우가 자신의 체험에 얽힌 기억에 맞추어 배역을 소화하는 미국식 자연주의 연극론이다. 자연스러운(사실적인) 연기법과 배우와 극중 인물들과의 일체감이 되는 연기법은 배우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이 학교를 통해 수없이 많은 연극배우나 영화배우는 물론 극작가가 배출되었다. 연기법 “Method Acting”은 특히 1950년대 초 Marlon Brando의 “A Streetcar Named Desire”가 성공을 거둠으로서 세계적인 명성과 인정을 받게 된다. 마론 브란도 외에도 James Dean, Rod Steiger, Dustin Hoffman, Paul Newman, Harvey Keitel, Robert De Niro, Marcheline Bertrand, Dennis Hopper und Al Pacino. Marilyn Monroe 등이 배출되었다.
연기법이나 연출법에 있어 스칸디나 반도의 북유럽연극은 브레히트연극 아류의 연극보다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전통에 가깝다. 이는 극 이론 보다는 입센, 스트린트베르크와 같은 심리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극작가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 등 남부 라틴계통의 연극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영향을 보기 어렵다. 그곳에는 전통적으로 사실주의 연극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사실성을 담은 민중극이 있었지만 형식면으로는 반 자연주의적, 반 심리적 연극전통이 자리하고 있다. 독일어권에서도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페터 슈타인이 연출한 체호프의 [세 자매](1984), [벚꽃 동산](1989)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심리적 사실주의적 연극전통을 되살리는 듯 모스코바, 레닌그라드에서 굉장한 환영을 받았을 뿐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제자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자신의 연기법(‘System’)으로 배우들을 양성하는 제자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자신의 ‘시스템’에 맞추어 배우를 가르치는 제자가 있다면 자신이 직접 면허증과 같은 허가증을 발부하고 싶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심지어 가장 신임하는 최고의 제자에게도 거부감을 나타냈다. 재주가 뛰어난 제자일수록 그만큼 자신의 스승(시스템)을 망가트린다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Dantschenko의 밑에서 연극을 공부한 마이어홀트(Meyerhold.1874-1940)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모스코바 예술극장이 설립되자 창립단원이 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이후 부터 마이어홀트는 공산당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연극에도 관심을 가지고 극장을 설립하고 연극예숳을 통한 소비에트의 성장을 역설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자연주의 연극에서 벗어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연극을 지향했다. 자신의 배우양성기법을 생체역학(Biomechanics)이라고 이름 붙였다. 심리적, 신체적 과정을 혼합했다. 배우들은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동작과 몸짓을 사용하게 된다. 마이어홀트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는 달리 감정이 먼저가 아니라 동작이 먼저이다. 즉 감정은 신체적 흐름에 따라 뒤따르게 된다는 연기법이다. 신체가 어떤 일정한 자세를 취하게 되면 감정은 그에 맞추어 자연스레 뒤따른다는 생각이다. 이런 연기론으로 독일 파리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많은 공연으로 천재적 연출자로 이름을 남겼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1911년 안톤 체호프의 조카 Michael Tschechow(1891-1955)을 예술극장에 끌어들인다. 이곳에는 러시아의 실험연극을 대표하는 마이어홀트와 Wachtangow 등이 일하고 있었다. 미하엘 체호프는 스승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말하는 체험과 기억에 기조하는 연기술의 한계성을 느끼고, 배우의 개인적 삶과 현실을 넘어서는 창조적 원동력을 찾았다. 체호프는 배우란 무의식의 세계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보고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무의식과 영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자신의 연기론을 무의식을 기반으로 삼는 ‘심리적 연기’라고 불렀다. 할리우드에서 배우학원을 차려놓고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곳을 다녀간 배우 중 Ingrid Bergman, Gregory Peck, Marilyn Monroe, Anthony Quinn 등 세계적인 스타가 즐비하다.
정치적 매개체로서의 연극
실러는 1784년 ‘독일학회’에서 “연극의 기능과 역할”에 관해 강연을 한다. 연극무대는 국가와 종교에 이어 제3의 권력으로 실러는 생각했다. 연극무대란 시민들을 계몽하는 정치, 사회적 기관이다. 연극무대는 시민사회의 계급적 갈등은 물론 수없이 많이 갈라져 있는 독일을 하나의 문화적 통일체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매개체이다. 연극무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미학적 기관이다. 연극무대는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도덕적 규범을 구현한다. 국가행정 체제나 종교가 마비되어 법이 가동되지 않을 때는 연극이 도덕적 기관으로서 그런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등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실러의 이런 연극의 도덕적 기능은 계급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고 실러의 연극관을 비판했다. 실러가 대상으로 삼은 시민이란 경제적 문제에서 초연한 배부른 귀족이나 시민으로, 이상을 쫒는 일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로 브레히트는 보았다.
1954년 브레히트의 연출로 파리에서 공연한 [억척어멈]은 국제적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53년 베를린 노동자 봉기로 인해 생긴 오해로 서독에는 브레히트–보이콧 바람이 크게 일어났지만 실제로 브레히트 유행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증가추세였다. 10년 사이 독일무대에서의 공연횟수를 통해 브레히트의 수용추세를 살펴본다. (자료. Die Deutsche Bühne 1961-1971)
61/62 년도
Shakespeare 2550, Goethe 2020, Shaw 1550, Schiller 1350,
Molière 1170, Brecht 1080, Lessing 1050,
71/72 년도
Brecht 1400, Shakespeare 1300, Molière 950, Shaw 620,
Schiller 450, Goethe 400, Lessing 400,
많은 극단이 브레히트의 작품을 공연하는 이유는 바로 관객들이 찾아주기 때문이다. 즉 상업성 때문이다. 바로 작품성 때문이다. 관객은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 이념이나 서사극이란 극이론에 끌려서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니다. 물론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덤벼들었다. 무대를 통한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브레히트의 [어머니]나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보고 노동자의 권익을 외치며 길거리로 뛰어나간 시위꾼은 없을 것이다. [억척어멈]의 공연을 보고 반전시위에 나선 관객은 없으리라! 서사극에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바꾸어 보자는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 이상은 일부 젊은 연극인들에게는 물론 여전히 공감을 주고 있다. 일부 연출가나 배우들은 서사극을 만나면 불안해한다. 무대에서 감정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 연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서사극이란 작품을 손에 들게 되면 너무 힘이 들어간다. 페터 한트케가 주장한 것처럼 “브레히트는 죽었”는데 말이다.
새로운 브레히트 수용
브레히트의 작품에는 내용은 좀 있지만 성탄절 동화에 불과하다고 페터 한드케는 평가절하했다. 그러므로 작품그대로 무대에 올릴 수는 없고 새롭게 조명하며 연출 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1978년 브레히트 탄생 8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기저기서 브레히트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브레히트의 유행은 끝났다”, “브레히트는 죽었다”, “끝장난 작가“. 하지만 1998년 독일방송은 탄생 100주년을 맞는 브레히트를 크게 취급했다. “지금까지 브레히트의 작품이 3천만 권 이상이 판매되었고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금년 1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는 171 도시에서, 외국의 경우 69 곳 이상의 도시에서 공연할 것이다.” 1959년 실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할 때의 열기를 제외한다면 브레히트만큼 커다란 관심과 열기 속에서 100주년 기념을 축하받은 극작가는 없었다고 공영방송은 보도하였다. 우리도 그 열기에 작지 않게 동참하고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미권 작가들은 브레히트의 이념적인 서사극 이론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희곡론에는 즉 브레히트의 작품세계에는 관심을 보였다. 거의 모든 현대 영미, 프랑스 작가들은(OSBORNE, WESKER, BOND, BRENDON, HARE 등)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고 크고 작든 간에 영향을 받았다. 브레히트는 오히려 아시아나 남미에서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 편이다. 번역은 물론 공연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서는(인도, 방글라데시, 남미, 한국) 갖은 자와 착취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단순하고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브레히트 상속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리라!
70년대 중반 MARTIN SPERR, FRANZ XAVER KROETZ 등이 등장했다. 더불어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Ödön von Horváth나 Marieluise Fleißer 등도 끌어내었다. 이들 작가들은 브레히트를 대체할 수 있다고들 믿었다. 브레히트는 너무 단순하고 뻔해서 더 이상 새로운 맛이 없고 이제 고물단지로 전락해서 어느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이너 밀러는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를 문학적 자료로 받아드림으로서 고전작가의 배열에 올려놓는다. 괴테나 실러 같은 고전주의 작가들의 경우처럼 그 자료 속에서 때로는 현대적 의미를 찾고 역사화 시키고 그 과정에서 브레히트를 새롭게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레히트 상속자들도 점차 저작권을 내세워 부리던 횡포를 달리 생각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하이너 뮐러에게는 자료에 불과하다. 신이나 세상의 문제 또한 글을 쓸 수 있는 자료에 불과하다. 신의 문제를 삭제하거나 마르크스의 이념이나 서사극의 극이론을 벗겨버리면 브레히트에게 남는 것은 없는 것일까? 연극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는 예술매체이다. 고전주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형식과 내용이 필요하다. 브레히트는 지름길을 찾으려했다. 무섭게 치고, 밀고 들어오는 영화나 라디오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상주의와 사회주의적 이념을 섞어 서사극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 집어넣었다. 브레히트가 고전주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벽과 서사극이라는 틀에서 끌어내어 벗겨주어야 한다.
브레히트 상속자들
“브레히트를 비판 없이 받아드리면 그것이 오히려 그분에 대한 배신“이라고 하이너 뮐러는 말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브레히트의 새로운 수용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브레히트의 수용을 막고 있는 브레히트 상속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도 있다. 자유로운 수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떤 연출가도 브레히트 작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현대 이름 있는 연출가 중 브레히트의 추종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브레히트만큼 저작권을 소홀히 생각하고 함부로 손 댄 작가도 드물다고 존 퓨지(JOHN FUEGI. BRECHT & CO.)는 지적하고 있다. 브레히트만큼 다른 작가의 작품에 칼질을 많이 해댄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이유가 되었던지 어떤 작품이던 그대로 연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브레히트의 상속자들은 아비(!)의 작품을 글자그대로 지킴이 바로 자기들의 생명줄을 지킨다는 신념으로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브레히트의 딸 Barbara Brecht-Schall(1930-2015)이 저작권 총책(Berliner Firma “Bertolt Brecht Erben”)이고 영미권의 저작권만 브레히트의 아들 Stefan Brecht(1924-2009)에게 있다. 바르바라는 저작료에만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연출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러므로 애비가 쓴 글 중 한 줄도 함부로 잘라 내거나 바꿀 수 없다. 어떤 작가도 작품그대로 공연할 수는 없다. 이 점이 브레히트 현대수용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서울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 국제심포지엄에 KNOPF 칼스루에 대학교수는 표절문제를, DETLEF-MÜLLER 튀빙겐 대학교수는 ‘브레히트 새로운 수용’문제를 핵심안건으로 가지고 왔었다. 뮐러 교수는 이런 상속자들이 브레히트 수용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 분석비판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죽음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연극은 종교이고 자연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연극을 신성시 했다면 브레히트는 연극의 사회성을 내세웠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배우의 감성과 영혼을 중요시했다면 브레히트는 이성을 중시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자연을 높이 우러러보았다면 브레히트는 사회를 변화시킬 법과 지식을 갈구했다.
[스탈린 이후 러시아 연극]을 쓴 Smeliansky에 따르면 연극을 신성시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 때문에 오히려 “예술극장”의 몰락을 쓰라리게 경험하였다고 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나아가려는 연극의 길에 운도 나쁘게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맞닿게 된 것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시스템이 공산주의의 시스템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이들은 교회부터 때려 부쉈다. 그리고는 교회대신에 그 자리에 극장을 내세운 것이다. 문화청 장관은 연극이 러시아의 새로운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교회 대신에 연극이 소비에트 연방의 변화에 기여하는 매체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극장은 이제 세계변혁의 중심이 되었다.
30년대 스탈린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낸다. 1938년 75세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또 한 번 훈장을 받고는 스탈린에게 감사의 글을 보낸다. 하지만 소비에트의 생활상은 너무나 끔찍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공장은 이미 국유화된 지 오래되었고 예술가 극장도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였다. 1922년 베를린에 갔을 때 바지에는 동전 한 닢 들어있지 않았다. 마이어홀트가 그랬게 당한 것처럼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가족이나 친척은 거의 다 처형되거나 고문을 받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만년은 너무나 처참했다.
1938년 제 20회 소비에트 청년공산당(KOMSOMOL) 대회에 즈음하여 프라우다 지에 축하인사를 쓰고 자신의 연기론, “신체적 행동”(시스템)을 마무리한다. 형무소에 복역 중인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프라우다에 보낸 축하글로 고통의 막을 이제 내리겠노라고! 이제 진정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고! 3주 후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죽는다.
소비에트 정권은 물론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죽음을 한껏 이용하려 들었다. 뉴스에서 크게 취급했다. 운구가 시작되고 많은 연극인들이며 예술가들이 관 옆에 붙어 뒤따른다. 이들 가슴에는 모두 훈장이나 메달로 번쩍인다. 관에 누워있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가슴에도 레닌훈장이 붙어있다. 모두 다가와 손에 입을 맞추며 작별을 고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얼굴은 순교자의 그늘이 서려있다. 연극을 신성시하고 그 결과 커다란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역사의 장에서 물러났다.
브레히트의 죽음
브레히트는 겁쟁이였다.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총질당하기도 두려워했지만 총질하는 것도 무서워했다. 전선이 두려웠던지 뜬금없이 브레히트는 의과대학에 적을 둔다. 의병으로 징집되어 후방에서 다친 군인들의 다리에 옥도정기를 발라주려는 것이었을까? 좌우간 브레히트는 반전론자에 평화주의론자가 되었다. 브레히트 작품의 가장 흔히 등장하는 주제는 죽음이고 일생동안 쫓아다니며 괴롭힌 단어도 바로 죽음이었다. 코이너 씨(Herr Keuner)는 장례를 피하지 않았던가? Herbert Ihering은 1922년 “젊은 브레히트는 하룻밤 사이에 독일(희곡)문학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며 클라이스트 상을 추천해주었다. [한밤의 북소리]였다. 브레히트는 하지만 북소리를 싫어했다. 그 리듬은 브레히트에게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병원 창가의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의사들의 오진은 병약한 브레히트의 죽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20대 중반에 브레히트는 이미 묘비명을 짧게 써 둔적이 있었다(1). 이와 달리 30대에 쓴 묘비명은 제법 길다(2). 베를린 Dorthea 시립묘지에 있는 브레히트 묘비석에는 이름뿐 20여 년 전에 써두었던 그런 말은 들어있지 않다. 브레히트는 마지막 순간 조심스레 자신이 죽으면 나무로 된 관을 아연으로 입혀달라고 부탁했다. 관속으로 파고들어올 벌레들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죽은 후 심장에 긴 바늘을 찔러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혹시 덜 죽었는데(scheintod/apparent death) 땅속에 묻힐 수도 있으니!
1.
이곳에 BB 잠들다. 순박하고 까다롭고 독했다.
2.
묘비석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나를 위해 꼭 하나 세우고 싶어들 한다면
이렇게 그 위에 써 주면 좋겠구려.
그 친구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 그래서
우리가 그걸 받아드렸어.
이 정도의 묘비명이라면 우리 모두 흡족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