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장전權利長戰2016-검열각하
광장의 왕
우리는 동지인가?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원작: 알렉산드르 블로크
각색/연출: 김 정
단체: 프로젝트 내친김에
공연일시: 2016/07/28-07/31
공연장소: 연우소극장
관극일시: 2016/07/28
연출로서 작품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지닌 희곡을 만나고 무대화시키는 작업을 하면서도 선뜻 자신 있게 덤비지 못하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현재 당면한 노골적인 정치적 과제 혹은 이슈를 다루는 작품이다. 그것은 아무리 입장을 규정짓고 싶지 않아도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고, 목적을 분명히 하는 과정 속에서 그 정치적 이슈에 관한 자신의 열정 및 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기 검열로 인해 스스로 흔들릴 수도 있으며, 목적달성의 수위나 농도, 그에 따른 예술로서의 작품의 미학적 표현욕구는 어느 정도에 맞춰야하는지, 그 가운데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결정은 관객의 입장을 어디에 둘 것이며, 그 목적에 부합되게 관객이 반응할 것인지, 또한 이에 따른 결과에 얼마큼 책임 있는 후속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인지, 등등의 무게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배우들은 어떤 가! 이러한 작품에 참여한 배우는 단지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만이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드러내고, 이를 관객과 공유하며, 자신들의 진정성을 확인받고 주장하고 설득하는 적극성을 보여야한다. 즉, 단순한 직업인으로서의 배우만이 아닌 행동적 사회실천가로서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하는 까닭은 관객이 배우들이 단순히 역할연기를 수행하는 것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이에 관한 정확한 배우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주장하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그 의사에 동의하고 있지 않느냐?’ 혹은 ‘방관하고 있지 않으냐?’ 혹은 ‘동참하고 같이 행동하지 않겠느냐?’ 혹은 아주 소극적으로는 ‘이러한 이슈, 이러한 논쟁에 대해 알고 있느냐?’하고 대답을 원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붓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체적인 정치적 당면이슈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고 참여하는 것은 정말 숙고와 믿음, 용기와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질문과 입장을 정리한 노력의 결과물이 관객에게 약간은 애매하고, 약간은 모호하며, 분명히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한 주장과 요구는 있는 것 같은데, 그 주장과 설득이 드러나고 빛을 발해야하는 순간에 슬쩍 시(詩)적 정서적 감상으로 에둘러 빠져버려 단순이 그저 정치적 이슈를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만 남는 경우이다. 정치연극, 다시 말해 정치색을 목적으로 드러낸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루는 그 이슈를 한 단어나 문장으로 완전히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게 하거나, ‘찬성이냐, 반대이냐’와 같이 정확한 요구를 통해 정확한 입장을 결정하게 하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동참하라고 설득하고 호소해야한다. 그래야 그 작품의 탄생의 동기가 무대에서 힘을 가지게 된다.
2015년 한국예술계에 벌어진 제도적 정치적 검열에 대한 젊은 예술가들의 응답, 그 릴레이, 권리장전權利長戰2016-검열각하의 7월 마지막 작품, ‘프로젝트 내친김에’의 <광장의 왕>은 아름다웠다. 5명의 배우들이 검은 빈 공간에서 뿜어내는 몸짓과 소리, 모이고 흩어지는 움직임과 관객들을 향한 진정 가득한 눈빛과 뱉어지는 대사 구절만으로도 절망의 해변에서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희망의 배를 기다리는 인간들의 갈망이 시적 공간감과 정서를 가지고 충분히 그려지고 상상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들 머리 위에 존재하며 천체를 지배하는 왕. 그 지배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5명의 배우들로 대표되는 군중. 다양한 사투리와 각계의 군중표집을 대표하는 개별 의상). 작품 안에 그려지는 정서, 갈망과 허무함마저 아름답다. ‘더러운 물에서 진실을 낚으려고’, ‘얼마나 행복한 가, 죽는다는 것은.’, ‘왕은 위에서 졸고 있다. 그 노쇠한 손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 가’, ‘의식이 살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지상은 공포와 고통으로 숨 쉬고 있다.’ 동화적이고 환상적이고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는 배우들이 최고의 앙상블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시각적, 청각적 리듬과 더불어 설득력 있게 관객의 가슴 속에 사색의 순간을 가져온다. 동기의 논리, 리듬과 충돌의 논리, 파장, 파동의 논리, 에너지의 시각화, 청각화, 공간화,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연극적 reaction이 이루는 앙상블이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렇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 문제다. 극의 종반부까지 반복되는 이러한 파편적 시적 이미지의 몽타쥬는 관객이 이를 어느 정도 예상가능하고 공허해지며 힘을 잃는다. 극의 초반, 관객의 가슴 속에 심어졌던 인식의 순간은 싹트지 못하고 씨앗만 품은 채, 이제는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고 싶은 관객의 마음에 답답한 허기를 느끼게 한다. 공감의 단계, 동조의 단계, 동참한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단계, 같이 행동하고 일체를 느끼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단계. 인식의 단계 이후에 기대되는 그 다음, 다음의 가고자하는 그 많은 단계를 시도도 못하고 묵묵히 방관하다가, 드러난 정치적 이슈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배우들이 그려내고 있는 시적 정서적 그 아름다운 리듬만 감상하며 머물게 한다. 그러면서 마침내 가슴 속에 이런 외침이 생겨나 입가를 맴돈다. ‘아…! 희망만을 품으면 배는 오는가?’, ‘행동은 어디로 갔나.’ 감상적 태도에만 머물던 자신이 살짝 지루해질 때쯤 배우들이 말한다. ‘그대들의 손으로 보복하라. 저 위로!!’ 그런데 움직여지지 않는다. 엉덩이가 붙은 의자에서 떨쳐 일어나 배우들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휘둘러지지 않는다. 그러기엔 발동이 충분히 걸리지 않았다.
꼭 모든 게 그럴 필요가 있냐고 한다면 그것도 맞는 얘기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그친다면, 머문다면, 우리의 진지한 인식과 뜨거운 권리 주장과 정당한 요구는 힘을 잃는다. 우리는 이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지겹게 목격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런 작품이 어렵다.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