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
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박태원
각색 : 성기웅
연출 : 성기웅
드라마터그 : 김옥란
단체 : 두산아트센터
공연일시 : 2012/11/27~12/30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극일시 2012/12/05 7:30 pm
드디어 쓴다, 이제라도 쓴다는 말조차 얼굴이 뜨뜻하다. 2010년 초연되고 동아연극상 ‘무대미술기술가상’을 수상했던 두산아트센터의 기획 공연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2012년 다시 공연되었다. 이 유쾌한 작품은 그야말로 보는 순간, 첫 장면에서 한눈에 반했었다. 공연평, 아니다, 논문을 쓰고 싶었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을 쓰고 싶다, 써 봐라, 쓰겠노라 약속도 하고 격려도 받았었다. 그러나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1930년대를 다룰 때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성기웅의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유혹적인 자태로 다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욕망에 불을 당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은근하다. 이런 경우, 작품을 향해 나오는 말을 막을 길은 없다. 얼른 글자를 입혀 내보내는 것이 수다.
폭포수 같은 콤마의 향연
1988년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되고 나서 그해 11월 삼성출판사에서 18권짜리 <<한국해금문학전집>>이 출간되었고 발간되자마자 한 달 만에 2쇄를 찍었다. 첫 번째 작가가 이태준, 두 번째 작가가 박태원이었다. 아직 작가의 꿈이 오롯하던 그 시절, 박태원은 수십년 시간을 지나 완전히 새로운 존경과 탄식을 자아내며 나의 꿈을 재고하게 만든 작가였다. 그리고 그 시초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었다.
작가의 스타일, 문체는 작가의 철학에 기반한 것이라고 배웠다. 문장에 어떤 철학을 집어넣으란 말이던가? 소설쓰기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럴 만한 필연성이 없다면 모두 쓸데없는 치기라고 하였다.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럴 만한 필연성이 있는 실험의 실례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그냥 문장규범을 잘 지켜 글을 쓰란 말인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쉼표의 소설이었다. 쓸데없는 문장부호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배운 나에게 이 소설은 신천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떼어 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 앞까지 나간 아들은, 혹은, 자기의 한 말을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들의 대답 소리가 자기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중문 밖에까지 들릴 목소리를 내었다.
“일쯔거니 들어오니라.”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이 소리를 내어 열리고, 또 소리를 내어 닫혔다. 어머니는 얇은 실망을 느끼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려 한다. 중문 소리만 크게 나지 않았더면, 아들의 ‘네―’ 소리를, 혹은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다시 바느질을 하며, 대체, 그 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여 본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다. 우선, 낮에 한번 집을 나서면, 아들은 밤늦게나 되어 돌아왔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첫 부분
딱 이렇게 생겨먹은 도입부를 두고 ‘영화적 기법’ 또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라면 아마도 이 장면은 아마도 얌전한 서울 중인의 가옥, 인서트해서 ‘어머니’를 잡고 다시 화면전환, 구보가 방에서 나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구보의 움직임을 따라갈 것이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나레이션으로 처리할 것이고. 물론 어머니를 중심으로 구보의 움직임을 음향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화면을 분할하거나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데 저 쉼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아니, 애초에 저 많은 쉼표를, 박태원은, 왜, 문장 안에 넣은 것이던가? 나중에 보니 박태원은 워낙 쉼표를 자주, 많이 사용하는 작가이기는 했다. 그러나 쉼표를 저렇듯 폭포수처럼 쓴 것은 오로지 이 장면뿐이니 이렇게 썼을 때는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이 장면은 어머니의 행동을 상상하면서 비로소 이해되었다. 어머니는 바느질 중이었다. 이 쉼표는 바느질의 호흡이었던 것이다. ‘대체, 그 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하고 바늘을 찌르며 이에 맞춰 이어진 어머니의 생각을 시각화한 결과가 바로 이 폭포수 같은 쉼표였던 것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비로소 납득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각화에는 문제가 있었다. 영상으로 이 장면을 형상화한다고 해도 그래봤자, 바늘로 옷감을 힘주어 찌르는 순간을 클로즈업하며 나레이션에 강약을 주는 것 이외에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마치 저 혜성처럼 꼬리를 단, 끝난 것도 이어진 것도 아닌, 저 쉼표의 잔치를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 결국이 이 작품은 도저한 현대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소설적인 소설이었던 게다…….
그런데 성기웅은 아주 쉽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호홋! 아예 쉼표를, 문장부호는 독서의 지시일 뿐, 읽지 않는 관습을 간단히 뛰어넘어 대사 안에 넣어 읽어버렸다.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콤마)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콤마)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끄내 들고 (콤마) 그리고 문깐으로 향하야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피리오드)”
어떻게 표현했을까 의구심을 품은 독자를 첫 대사로 매료시켰으니 그 다음은 착하고 자발적인 관객이 되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그토록 착해지지 않았다면 “꺄아아악~~” 비명이라도 지르며 열광할 뻔했다.
구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그런데 한 가지 더 궁금했다. ‘구보’의 이야기인데 왜 첫 장면이 ‘어머니’일까? 심지어 이 소설의 마지막도 ‘어머니’이다. 구보는 오전 두시의 종로 네거리에서 벗과 헤어지며 글을 쓰리라, 한 개의 생활을 가지리라 다짐한다. 마지막 문장이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로 끝맺는 이 결말을 흔한 영화적 순환구조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어머니’일까?
박태원의 벗, 이상에게는 금홍이거나 퀴퀴한 뒷방이었다. 생산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불모의 자궁 같은 협착한 골방으로 표현되는 회귀점이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들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것 아니었을까? 식민지 시대였으니까 다만 ‘모국’을 상징하는 것일까? 월북과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리얼리스트 박태원의 행보에 미루어 그가 다만 도시적 감수성에 머문 모더니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이 세련된 도시청년,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26살의 청년이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며 어머니의 내면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닥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이 모자에게서 태어나자마자 일찌감치 아버지를 보내버리고 오손도손 의지하는 오이디푸스의 동양적 원형, 그러니까 박태원이 어려서부터 탐독했다는 옛 소설의 하나, <구운몽>의 양소유 모자랄까, 아니 유배지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는 서포 김만중이 떠오르기는 했다. 어쨌거나 어머니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엄숙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말문을 막는 아들, 치마 두 감의 가격을 묻고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고 돈을 내 놓는 아들은, 아들은 아들이지만, 여인의 말에 엄숙한 표정으로 답하는 남자의 풍모로, 저 잔인한 자본의 숲으로 노동을 팔러다녀와 먹이를 내놓는 원시의 가장의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한 것은 이들의 시작이 분리라는 것이다. 구보는 어머니 눈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노래자(老萊子)는 아니다. 구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는 것으로 행동을 시작한다. 더욱이 집을 나서면서 ‘일찍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3명의 발랄한 여학생들에게 눈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머니 대신 젊은 여성에게 눈을 돌릴 정도라면 가망이 있다.
공교롭게 활짝 열린 대문 앞을, 때마침 세 명의 여학생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이어 구보는 두통을 느끼면서 병원의 젊은 간호부를 생각한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 근대 부르주아 가정의 주부는 가정 내에서 근대의 기초를 이루는 교육과 법과 의료이성의 역할을 1차적으로 수행하기 마련이다. 한낮의 거리에서 문득 두통을 느끼면서, 이것을 격렬한 두통이라고 과장하는 구보의 욕망이 드디어 실체를 갖는다. 아직 공부하는 여학생에게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는 아직 미숙하다. 구보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집안의 안녕을 보전하는 자기 가정의 주부, ‘아내’를 갖고 싶은 것이다. 어머니를 떠난 구보는 그러니까 ‘아내’를 구하러 나선 참이었다.
그가 ‘가족’을 처음 만난 것은 ‘화신백화점’ 안에서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현대인의 수직상승의 욕망을 대변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온전한 가족 또한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것이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못하여 이들에게서 멀어진 구보는 수직 대신 수평이동의 수단, 전차에 탑승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 ‘색시’를 만난다. 이 여성이야말로 구보가 찾던 바로 그 ‘아내’감 아닌가. 그러나 구보는 결국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한다.
카페에서도 서울역에서도 남들의 연애를 질투하거나 그보다 더 마음 아프게 변화한 벗과 지인의 몰락을 만나고 또 해야만 하는 소설 연재와 근대의 가장이 찾아야 하는 황금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구보는 지쳐간다. 결국 이상의 제비다방으로 밀려와 유학시절 만났던 과거의 여성이나 되짚으면서 회상에 젖을 뿐이다. 해가 지고 저녁을 먹고 나서 구보의 아내 찾기는 내적으로 포기 상태에 다다른다. 카페의 여급들과 술을 매개로 나누는 농담으로 대화를 대신할 뿐이다. 그나마 마지막 시도. 구보와 박태원은 카페의 여급에게 종일 들고 다니며 기록한 경성 고현학의 결과가 담긴 ‘수첩’과 ‘만년필’을 넘긴다.
“가(可)면 ○를, 부(否)면 ×를”
소설에서 구보가 받은 것은 물론 ‘×’표였다. 표를 확인하기 전부터 그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 2시의 종로 네거리에서 구보는 내일은 거리에 나서 벗을 만나기보다 집에서 창작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표였다고 해도 구보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니 하루 종일 구보가 배회한 경성의 거리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것은 가정을 이루기엔 황금도, 일자리도, 글쓰기도 원만하기 어려운 현실이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랄 것 없이 똑같이 후줄근해진 연극 속의 구보와 박태원의 모습은 이 같은 소설 속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아내’를 찾는 구보가 모든 시도에서 실패하고 결국은 어머니의 아들로 귀가하는 것은 근대의 ‘성숙한 남성’이 식민지의 청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미적 차원임을 증명함에 다름 아니다. 모던한 고현학 속에 감춰진 신화적 원형의 미적 고심이 특별하려니와 식민지 근대의 복판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통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던 ‘구인회’의 고투로 연속되는 바이기도 하다. 요컨대 독립이 허용되지 않는 미숙한 주체가 곧 식민지 주체임을 비극적으로 적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식민지고 그것이 1930년대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회의 낭독으로 뒤집힐 것임에도, 연출 성기웅은 ‘○’표로 결론짓는다. 그 무렵 ‘김정애’와 결혼했던 박태원의 실제 이력에 의지했지만 1934년과는 달리 2012년에는 구보의 아내 찾기를 가능한 것으로 보고 싶은 연출의 희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더욱이나 ‘○’표로 각색하면서 비로소 ‘아내’를 찾으러 나선 구보의 욕망과 목표가 명백해지니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지닌 내적 동력이 연극으로 확실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표가 가능할까? 삼포, 오포, 칠포…. 포기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2016년의 젊은이들에게 ‘○’표가 가능하다고 정말 말할 수 있을까? 2016년에서 1934년을 발견하게 되는 나는 그렇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찾기’는 옳다!
식민지 시기를 돌아보면 국권을 잃고 처음 10년은 국권을 잃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얼마간은 어리둥절한, 그러면서 곧 나라를 찾겠다 절치부심하는 조선인들이 느껴진다. 1919년 3‧1운동에서는 곧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만세운동으로도 결국 바뀐 것은 없는 1920년대, 조선인들은 비로소 님이 떠난 세상, 님이 침묵하는 세상, <난파>해 버린 세상을 처절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면서 조선인들은 드디어 ‘기다림’을 시작하였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고 <토막>으로 돌아올 상서로운 서기(瑞氣)와 같은 ‘명수’를 기다렸다. 물론 이들은 ‘모란’이 핀 상태, ‘명수’가 돌아온 다음을 상세하게 상상하고 그려낼 수는 없는 식민지 현실을 살고 있었지만 상실과 부재를 인정하고도 좌절하지 않았다. ‘기다림’이란 도저한 희망의 행동을 시작한 것은 식민지 현실에서는 당연히 진전이었고 격렬한 삶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때, 구보는 기다림을 넘어, 심지어 바다 건너 산 너머, 멀리 어디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경성의 거리를 누비며 ‘아내’를, ‘희망’을 찾아 나섰다. 이것은 또 한 발, 명백한 진전이었다.
지금 당장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실패하고 돌아올지라도 26살의 청년이 해야 할 일, 1934년은 물론이요 2016년의 청년이 해야 할 액션 또한 분명하다.
서울의 모습, 서울 시민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 연극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소설이 연극으로 만들어졌다니…이걸 꼭 아카이빙하고 싶습니다.
모든걸…할 수 있습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
서울기록화사업단 유영산 seoularchiving2023@gmail.com 010-3312-4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