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밥과 가자미와 시
–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최승연(뮤지컬평론가)
작·작사: 박해림
작곡·작사: 채한울
연출: 오세혁
단체: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공연일시: 2016/11/05-2017/01/22
공연장소: 드림아트센터 2관
관극일시: 2016/11/25 8pm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거대한 힘과 힘이 부딪히는 뮤지컬에 익숙해져있다. 왜일까. 아마도 뮤지컬은 드라마틱한 프로타고니트와 안타고니스트가 만드는 갈등이 어울리는 장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극적인 작품에 다소 지친 관객이라면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후 <나나흰>)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위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꿈을 잃은 그대에게 다시 꿈꿀 수 있는 힘을 선사하는 그런 종류도 아니다. 오히려 작품은 한 늙은 여인의 오랜 기다림을 느릿느릿 풀어 놓는다. 낡아빠진 책표지처럼 색이 바랜 과거를 품고 사는 늙은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애잔하다. 이로부터 오는 위로는 한결같은 모습이 주는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애잔한 아름다움에서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여전히 고귀하다는 진실을 엿본다. 상상 이상의 드라마가 매일 펼쳐지고 있는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한 조각의 평범한 진실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뮤지컬 <나나흰>은 우리에게 결코 적지 않은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다.
나타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은 후에 작가로도 활동했던 김영한의 관점으로 백석과 김영한, 즉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다룬다. 기생 시절 백석을 만나 짧고 뜨겁게 사랑하고 남북이 단절되면서 영영 헤어졌던 김영한은 평생 백석과의 기억 안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백석에게는 김영한 이외에도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만 그는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고 해방 이후 두 명의 부인을 더 두었다. 게다가 이 네 명의 부인 외에도 자야를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이 더 있었다. 뮤지컬에도 등장하는 통영 출신 박경련, 소설가 최정희, 그리고 자아갸 부인 외의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이중 실제로 백석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박경련이었다는 이야기가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의 근간이 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가 받은 시이기도 했지만, 최정희가 받은 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오리’ 역시 박경련과 자야가 모두 받았(다고 하는)던 사랑의 징표였다. 사정이 이렇기에, 누가 나타샤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타샤일 법한 누군가가 백석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된다. 작품은 자야를 이 자리에 놓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백석을 복원한다. 정확히 말해, 온전한 자야의 관점으로 백석의 시편들 안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 백석과의 관계를 풀어 놓는다. 자야가 쓴 책 <<내 사랑 백석>>의 관점은 그 근간에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자야의 판타지로 진행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판타지로 머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므로.
하얀 정원에서 그들은 노닌다
작품은 백석의 시집이 발간된 어느 날, 이제는 다 늙어 버린 자야가 백석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 함께 바다로 여행하는 구조를 취한다. 젊은 백석은 함흥, 정주, 경성, 만주를 유랑하며 자야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고, 자야는 백석이 찾아오면 ‘흰밥과 가자미 지짐’을 내 놓으며 그를 품는다. 자야는 그가 찾아오고 또 그와 헤어지는 환희와 고통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세월에 무뎌져간다. 다시 찾아온 백석을 원망하기보다, 가난한 시인이라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삶을 견딘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이 부재한 시간을 ‘견디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자야의 삶은 그와의 기억 속에서 박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불려나온 백석이 유랑을 멈추고 자야에게 ‘바다’로 가자고 제안하는 후반부의 장면은 따라서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된다. 그동안 ‘함께’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던 바다에 가서,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고’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은’, 그 둘에게만 온전한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그러자 자야는 이제 견딤을 멈추고 속내를 드러낸다. 이제 더 이상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이제 더 이상 보낼 힘도 없으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함께 살자고. 흰밥과 가자미 지짐을 해 줄 테니 더 이상 떠나지 말라고.
자야의 속내는 덤덤하지만 물기를 머금은 배우 정인지 특유의 톤 다운된 목소리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순간 유발되는 비애미는 과장되지 않은 먹먹한 정서로 전달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작품이 자야의 고통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흰 대나무로 둘러싸인 무대는 시공간을 옮겨 다니며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던 그들의 과거를 마치 정원 안에서 노니는 연인의 모습으로 추상화시켜, 슬픔을 표현하되 그것을 미학적으로 격상시킨다. 그들의 흰 대나무 정원 속에서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과 노래로 흡수된 백석의 시구(詩句)들은 과장되지 않은 슬픔을 완성시킨다. 시는 그대로 노래가 되고 노래는 고백이 되는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순환된다.
자야를 위로하다
이제 작품은 현실로 돌아온 자야를 어떻게 남겨둘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여전히 자야가 백석과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게 할 것인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를 상상해야 한다. 자야의 판타지가 어떻게 끝을 맺어야 미학적인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 작품은 여기서 자야를 위로하기로 결정한다. 백석이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 자야가 아니었다면, 자야에게 위로는 더 긴요할 수 있다.
백석과 함께 바다에 다녀 온 자야는 이제 백석을 놓아줄 준비를 마쳤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그의 시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노쇠한 여인으로 살아간다. 백석은 젊은 모습으로 이런 자야에게 다시 찾아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완성시키며 이를 자야에게 들려준다. 이로써, 백석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렸다는 비문법적인 낭만의 세계로 완성된 그의 대표작은 자야에게 헌정된다. 원래 시에서 상상의 대상이었던 나타샤는, 백석을 삶의 끝까지 추억하며 살아갔던 자야로 구체화된 셈이다. 변함없이 그에게 흰밥과 가자미를 대접하고 그의 시를 목숨처럼 여겼던 자야는 나타샤가 되어 백석과 함께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작품은 끝까지 자야의 판타지를 유지하고 그녀를 온전히 위로한다. 이와 함께 관객은 삶의 끝에 선물처럼 주어진 나타샤가 된 자야를 지켜보며, 변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먹먹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위로를 받는다. <나나흰>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물 흐르듯 흐르는 배우들의 연기의 합과 여백을 그리는 연출 스타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자연스러운 연기의 흐름을 가능하게 했던 시와 노래의 일체감은 특별한 드라마 없이도 정서와 이미지로 작품을 기억하게 만든다. 백석의 시 중에서 <여승>, <선우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구장로>, <바다> 등을 잘 엮어 붙여 노래와 드라마를 순환시킨 백해림과 채한울의 감각이 돋보인다. 2016년에 쏟아진 대극장 창작뮤지컬들의 틈바구니에서 유난히 반짝거렸던 중소극장 창작뮤지컬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과 서정으로 무장한 <나나흰>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관객이 있다면 이는 온전히 <나나흰>의 몫이다. 자야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특유의 서정성으로 자야의 판타지를 더 힘차게 끌고 나갈 묘안이 더 필요할 수 있다. 현실이 극악해질수록 그 때마다 관객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는 레퍼토리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트래디셔널과 마던. 그 중간 어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