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연과 이론> 64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김수정이 왔다, 영접하라!: <파란나라>라는 징후
백승무(연극평론가, 공이모 회원)
공연명: <파란나라>
작·연출: 김수정
극단: 신세계
상연일시: 2016.11.16.-2016.11.27
상연장소: 남산예술센터
관극일시: 2016.11.22. 20:00
꿈을 향해 달려가, dream girls!
시간은 충분해. 조급해 하지마.
Trust yourself, 너 포기하지마. <…>
신경 쓰지마, 조금 늦더라도.
Over and over follow your fever like that. <…>
괜찮아, 잘 될 거야, 주저하지 말고 일어나!
한걸음 또 한걸음!아이오아이(I.O.I)의 <Dream Girls> 중
1. 세대교체의 시간이다
아이돌그룹, Pro et Contra
전성기를 넘어 가히 아이돌그룹 지배시대이다. 수많은 아이돌그룹들이 방송채널과 행사장을 점령하고 있다. 한류의 산업적 흥행까지 등에 업고 대중문화를 석권한 상태이다. 예능, 드라마,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아이돌그룹은 스타 제조공장이자 문화산업 포식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최고의 상품형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또래(혹은 또래였던 이)가 아이돌그룹을 바라보는 태도와 4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필자의 자의적 관점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세대 분류의 기준과 근거가 박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란나라>의 요란과 소란에 깔깔하고 텁텁한 불편함을 느꼈다면 이런 누추한 도식에 귀를 솔깃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술과 기술 사이
기성세대는 음악성을 통한 정서적 흡인력을 중시하는바, 기획사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제작·생산된 아이돌그룹을 뮤지션이라기보다 문화상품에 가깝다고 여긴다. 기성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풍부한 음악적 감성과 호소력 짙은 전달력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돌그룹은 대중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출시된 아이템 상품으로 간주한다. 어른들은 이윤 극대화를 노린 기획사의 상업적 욕망과도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선정적 의상, 부담스러운 윙크짓, 알고 하나 싶은 성적 동작, 속임수 같은 가벼운 훅(hook) 등 상품미학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노골적인 유인장치에도 빗뜬 눈을 한다. 한 사람의 진정어린 서정이 외화된 기품이 음악성일진대, 한 소절씩 나눠서 부르는 분업형태나 잊을만하면 불거지는 가창력 논란, 표절 논란, 립싱크 논란도 마뜩찮다. 개성보다 ‘멤버’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아이돌그룹은 기획사 사장님이 부여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꼭두각시 유닛이나 음악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전문기술직에 가깝다.
뭣이 중한디?
하지만 또래세대들은 다른 것을 본다. 청(소)년들에게 아이돌그룹은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공감과 감정이입의 대상이다. 사회를 보라. 부정과 편법이 난무하고, 갑의 횡포와 금수저들의 전횡이 춤을 춘다. 하지만 아이돌그룹은 그렇지 않다. 오랜 연습생 생활에 치열한 경쟁과 눈물 나는 훈련을 통과한 아이들이다. 요행이나 ‘빽’ 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선택된 존재들이다. 혹독한 예비자 과정을 뚫더라도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데뷔 후에도 언제 해체될지 모를 불안정 상태가 지속된다. 온갖 악플과 비난에 멘탈갑이 되어야 하고,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무시무시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며, 팀원끼리의 불화와 갈등 속에서도 인내와 침착성으로 군자연 해야 한다. 아이돌그룹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사장님’이 짜준 살인적인 스케줄에 따라 한겨울에도 핫팬티 입고 춤을 춰야 하는 3D 노동자들이다.
그렇다, 동시대 또래들은 아이돌그룹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본다. 한편으론 노력과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다른 한편으론 극심한 취업난과 고달픈 비정규직 생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성과제 등 무서운 사회현실에 대한 불안! 조그만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잔인한 경쟁사회이고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하도록 짓밟는 야만 사회이지만 성실성과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과 긍정, 그것이 또래세대가 아이돌그룹의 공연에서 확인하는 메시지이다. 그러한 공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진입해야할 사회,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상기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에 가깝다. 혹시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음이탈은 없을까, 서로 부딪히지는 않을까, 못했다고 욕먹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안절부절못한다. 그리고 무사히 끝마치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각박한 경쟁체제 속에 살고 있다는 자연발생적 동질의식이다. 기성세대들이 올림픽 때나 느끼는 간절함과 비슷하다.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는 평가자가 아니라 실수 없이 최선을 다하길 바라는 격려자의 태도이다. 아이돌그룹의 가창력을 옹호하기 위해 또래들이 배포한 ‘MR제거영상’을 보라. 저게 음악이냐며 손가락질하는 부모들을 향한 저항의 외침! 필자는 그 영상 속에서 또래세대의 분노와 비애를 읽는다.
어른은 청(소)년의 미래가 아니다
또래세대는 아이돌그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성장서사를 자신의 모험인 것처럼 일체화한다. 그런 현상은 기성세대의 차가운 시선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세대별로 호불호가 선명하니 각자의 취향대로 가려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런 편협한 세대문화론은 무책임하다. 세대 차이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방치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한국사회가 세대문화 자체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특히 20-30대가 압도적 유료관객층인 연극계에서 세대문화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세대별 연극문화의 분류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장해서 말해보자: 40대 이상을 위한 연극문화는 부재한다. 그렇다면 연극제작진은 20-30대 관객층의 취향과 기호에 의존하고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일부(?) 상업극은 20-30대 소비자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작품을 생산하지만, 많은 연극예술가들은 그렇지 않다(옳고 그름은 논외다). 결정적 수익이 매표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지원금에서 오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식의 지원을 결정하는 자는 40대 이상의 심사자들이다. 20-30대 관객층이 어떤 공연을 봐야할지 정해주는 자는 엉뚱하게도 아재뻘의 ‘노땅’들이다. 여기서 취향의 식민주의가 발생한다. 소극장을 망하도록 방치하고 공립극장이 독주하도록 부추긴 아재들이 20-30대 관객층의 취향까지 점령하려드는 것이다. 지원심사를 맡는 기성세대가 20-30대 관객들에게 자신의 취향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구조이다. 매표수익에 의한 극단의 자활이 선행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지원 매개 없이 관객과의 순수한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연출세계를 교정·구축해나가는 전통이 안착되지 않으면 그러한 취향 왜곡구조는 지속될 것이다. 이런 구조가 젊은 세대의 연극 혁신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다. 기득권·제도권에 길들지 않으면 굶는 구조! 하지만 인류예술사는 어른들을 거역하라고 말한다. 예술의 혁신은 친부살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파란나라>라는 징후
그래서 연극사회학이 필요하다. 연극의 수요와 공급을 들여다보고 창작자와 관객의 만남을 분석하며 연극문화의 횡적 구도를 점검하는 학적 체계 말이다. 관객 선호도가 아니라 평론가 취향에 의해 세대문화가 왜곡되는 현상을 막고, 전통적 연극미학과 신세대 감성이 건강한 경쟁구도를 형성하려면 연극문화의 생산·소비 전과정을 진단할 과학적 도구가 필요하다. 김수정 연출의 <파란나라>는 세대문화론에 기반한 연극사회학적 접근을 요한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서투르고 어색하다. 세련되지도 않고 적당하지도 않다. 뭔가 독특하고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걸 ‘예술적’이라고 수긍하긴 싫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또래세대의 정서와 기질을 대변하는 진솔한 통찰을 담고 있다. 기성세대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대문화적 특징을 진하게 내장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 연극도 바뀌게 마련이다. 김수정의 ‘독특하고 다른 점’은 세대교체가 임박했음을 고지하는 신호이고 새로운 물결이 일렁임을 보여주는 부표이다.
2. 샤우팅 파이팅
추락하는 것은 소리를 지른다
김수정은 거칠고 과격하다. 언어는 활화산 같고 움직임은 성난 파도 같다. 절제와 타협은 없다. 권투로 따지면 저돌적인 인파이터이고 축구로 말하자면 ‘닥공‘(닥치고 공격) 전술가이다. 발성의 데시벨을 높이고 배우 몸의 RPM을 마구 올린다. 연극의 매체적 속성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리고 그 매체(미디어)는 메시지가 된다(마샬 맥루한). 콘텐츠를 전달하는 표현 형식 속에 내용의 가시가 돋아나는 것이다. 자극적 표현 형식 중 가장 우세한 것은 절규하듯 토해내는 샤우팅 발화법이다.
이글거리는 눈빛, 적나라한 욕설, 젊은 세대 특유의 은어, 반경이 큰 제스처, 폭력적·위압적 장면에 대한 클로즈업, 선명하고 강렬한 감정선 등 김수정 공연을 장식하는 고유한 표현 형식은 다양하다. 그 중 핏대를 세우며 질러대는 샤우팅은 상식과 정의가 사라진 현실에 대한 분노이자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기성세대를 향한 질타이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 형식이자 정서를 분출하는 장치이며, 그 자체로 특정감정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죽은 감각을 자극하여 공감지대를 활성화시키는 김수정만의 인장(印章) 행위이다. 자신의 구상을 어떻게 하면 예쁘고 친절하게 전달할까 고민했던 세대, 그리고 삶의 인상들을 사실적으로 긁어올 수 있는 기법과 양식을 소유했던 세대, 그래서 절제와 탐미의 원리를 미학이고 예술이라 생각했던 이전 세대들을 떠올려보라. 그에 반해 김수정의 샤우팅은 미학적으로 조야하고 기법적으로 과도하다. 그것은 분노의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자신의 구상을 배우 몸에 이식시켜야 하는 자의 조급함 때문이고, 그 열기가 식지 않도록 배우들의 몸을 지속적으로 가열시켜야 하는 자의 답답함 때문이다. 또한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기회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시대의 징후이고 세대의 증상이다.
성대결절 세대
80년대 학번은 말할 것도 없고 90년대 초반 학번까지도 집이든 거리든 소리칠 자유와 의무는 있었다. 92년 대학에 들어온 필자는 신세대 담론의 세례 속에 방종의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하지만 97년 IMF 이후 청년들은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시대적 폭력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폭력은 함성과 구호로 저항하던 군사독재시절의 폭력과는 다른 것인데, 저항할 수도, 저항할 데도 없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자괴감과 절망감을 내면화시킨다는 점에서 졸렬하고 악질적이다. 분노 감각이 마비된 세대, 희망 고문이 상설화된 세대, 저항권이 절삭된 세대에게 김수정의 샤우팅은 생물학적 ‘쾌감’이자 사회적인 ‘해소’, 예술적인 ‘정화’이다. 샤우팅은 기록되지도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저 강렬한 인상을 생성시킨 후 여운처럼 메아리칠 뿐이다. 김수정의 매력은 작품의 줄거리와 사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서적 잔상에 있다. 플롯을 얘기할 때는 등장하지 않는 소소한 울림들, 작품의 사상을 해석할 때는 언급되지 않는 형식적 장식물들, 이글거리는 눈빛과 울분을 토해내는 고함, 우아함이나 절제와는 거리가 먼 성긴 동선과 억센 동작들! 공연의 주요행위와 핵갈등에 기여하는 그 자잘한 주변부 이미지들과 기저 효과들! 이런 것들이 김수정 공연에 녹아있는 ‘독특하고 다른’ 매력이다.
3. 거부할 수 없는 역설
환상적인 역설
<파란나라>는 미국의 고교 역사교사 론 존스(Ron Jones)의 실험(유튜브 검색어: ‘지식채널e 환상적인 실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실험보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토드 스트라서(Todd Strasser)의 소설 <파도>(The Wave), 데니스 간젤(Dennis Gansel) 감독의 영화 <디벨레>(Die Welle), 데이비드 제퍼리(David Jeffery) 감독의 다큐 <강의계획서>(Lesson Plan) 등이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서운 실험에 대한 김수정 연출의 접근법은 사뭇 색다르다. 관객들은 극 초반부터 이 위험한 실험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두 눈을 부릅떠야 마땅하다. 교육계에선 익히 알려진 이 저주스러운 실험은 그 우려스러운 결과로 인해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바, 우리가 할 일은 추상같은 단호함으로 전체주의의 구동과정을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겉으로는 ‘환상적인 실험’에 대한 연극적 모델링임을 내세우지만, 영화반에서 벌어지는 일은 실험의 본래 의미인 전체주의의 위험성과는 다른 맥락을 띠고 있다. 되레 방황하는 청춘들이 어서 올바른 길을 찾아 교화되기를 은근히 바란다. 선생님의 실험이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양 학생들의 변화를 (어느 지점까지는) 수긍한다. <파란나라>는 ‘환상적인 실험’을 무대 위에서 체현하는 공연, 즉 건전한 학생들이 전체주의의 마수에 빠져드는 사례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그 속에는 흙수저로 낙인찍혀 패배자로 길러지는 아이들이 삶의 가치와 의미에 눈뜨는 모티프가 혼재되어 있다. 전체주의 발생 메커니즘 속에 교육제도의 모순과 사회체제의 결함이 교묘하게 몸을 섞고 있다. 역설과 반어의 깊은 골이 육중한 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파란나라는 없다
먼저 실험의 주동자인 이종민 선생. 그는 “교장한테 까이고, 선생들한테 따 당하”는 “좆나 호구”다. 지역적으로 지방 출신(경상도)에 대학 또한 ‘병신 같은 학교’(아마도 지방대)를 나온 인물이자 담당과목도 기타 과목(세계사)이고 게다가 기간제 교사이다. 교장이 지시한 학교 홍보영상도 찍지 않고 성과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기간제 비정규직 새끼!” 상관에게 일상적인 굴욕을 당하고 동료에게도 따돌림을 당하는 비정규직 교사가, 권위도 없고 안정성도 없는 기간제 이종민 선생이 과연 정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이종민 선생이 처한 사회적 조건 자체가 비교육적이고 비인격적이고 비민주적인데 과연 그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열악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정신승리법? input 없이 output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고 요행이다. 그런 건 없다. 애초부터 이종민 선생에게 ‘파란나라’는 없다. 아이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세계 최악의 교육 현장. 무대의 모습은 2016년 한국 고등학교 평균치이다. 일부 과장이 있지만 오차범위 안이다. 아이들의 미래 또한 이종민 선생 같은 비정규직이다. 그들에게도 ‘파란나라’는 없다.
다큐와 드라마의 경쟁
‘좆나 호구’ 선생이 곧 ‘좆나 호구’가 될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교권과 학생인권이 바닥에 꼬꾸라진 이 지옥 같은 현장에서 게임이 시작된다. 배움의 기쁨과 자람의 즐거움이 사라진 교실에서 은밀하고 위험한 모험이 펼쳐진다. 욕설이 줄어들고 차별과 폭력이 사라진다. 무의미한 학교생활이 의미를 찾고, 따분하고 지루한 교실이 기대와 흥분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건 전체주의 실험이 아니라 패배자로 낙인찍힌 학생들의 자신감 회복 프로젝트다. 김수정의 <파란나라>가 기묘한 것은 한 왕따 교사가 교장의 부당한 지시사항을 어기고 아이들과 진지한 체험학습을 전개하는 휴먼드라마의 외관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인간적 교실에서 그 어떤 변화가 ‘휴먼’하지 않겠는가! <파란나라>(의 전반부)는 선량한 학생들이 극단적 사상에 경도되는 과정을 그리는 폭로극이 아니라, 문제아들의 재활 드라마이자 약자들의 승리 서사이다. 입시에만 혈안이던 학생들이 친구와 집단에 관심을 돌리는 과정이고 호구 교사와 소외 학생들이 강한 신뢰와 결속력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억눌려 살던 주영은 불의에 저항하고, 부끄럼 많던 수빈과 투명인간 선기는 자신감을 찾고, 왕따 당하던 창현은 고개를 들고, 공부만 알던 이기주의자 진태가 타인을 생각하고, 성추행의 상처가 있던 정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줏대 없는 따라쟁이 박미르는 주체성을 얻는다. 기적이다. 불행했던 삶이 활력을 찾고, 고통스러웠던 현실이 순식간에 개조된다. 개과천선이고 상전벽해다. 이 정도면 감옥 같던 교실에 햇살이 든 게 아닐까? 수능에 목숨 걸던 학생들이 사회의 문제에 몰입할 기회를 얻고 ‘사이성’과 ‘더불어’를 고민한다면, 이를 어찌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파란나라>가 소설이나 영화와 분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관객들은 ‘환상적인 실험’이 예고하는 전체주의의 위악성에 대비하기 전에 수렁에서 기어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의 절규를 먼저 듣게 된다. 학생들이 처할 악몽이 ‘언제 시작될지’보다, 지금 학생들이 처한 악몽이 ‘언제 끝날지’가 더 관심을 끈다. 이종민 선생과 아이들이 처한 야만적 현실에 대한 다큐와 전체주의 마수에 빠지는 드라마가 경쟁한다. 그리고 박세인에 대한 척력이 폭력으로 악화되는 순간, 전체주의 드라마가 급부상한다. 다큐에서 드라마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변곡점이자 잘됐으면 하는 기대감이 ‘이건 아닌데’ 하는 불안감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한별단의 하드코어 버전?
만약 <파란나라>가 소설 <파도>나 영화 <디벨레>처럼 악화일로를 보여주는 서사를 선택했다면, 아마 현실과 동떨어진 맹탕 설교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체주의의 공포는 사실 가소롭다. 특수부대 군복 입은 사람들의 가스통 시위와 어버이연합 같은 극우조직의 광기어린 선동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우리에겐 그 정도의 공포는 우습다. 국가와 재벌들이 뒷돈을 내고 선동을 지원·조장·두둔하고, 사찰과 블랙리스트, 검열이 매일같이 뉴스가 되는 우리에겐 그 정도의 위협은 유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서구에서 사유하는 전체주의와 동양의 그것은 엄연히 다르다. 독일의 전체주의 파시즘과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 간의 차이와 비슷하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우리에게는 다른 전략의 서사가 필요하다. 한별단의 하드코어 버전으로는 자극이 되지 않는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전체주의를 만만하게 보냐고? 전체주의의 위험성은 민주주의와의 이항대립 속에서만 체감될 수 있다. 전체주의가 나쁜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교실에 민주주의가 있는가? 수호하지 않으면 훼손될 민주주의가 있는가? 왕따, 차별, 인권침해, 주입식 교육, 타율성, 재단비리, 하방식 의사결정 등 미시적 전체주의와 일상적 독재 속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소설 <파도>나 영화 <디벨레>는 남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물렁물렁한 서사에 우리 교실의 현실을 예각화시킨 <파란나라>의 전략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철저한 취재를 통해 교실의 살풍경을 ‘다큐’적으로 활물화시킨 점이나 비민주적, 비인격적 교육의 울분을 전체주의적 광기와 병치시킨 점도 성공적이다. 이종민 선생의 심리적 입체성 부족, 세인의 진실 폭로 동기의 모호함, 다큐와 드라마의 불균형 등 명확한 결함이 존재하지만, 분노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억압과 폭발의 메커니즘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파란나라>의 경고
바로 이 지점에서 <파란나라>는 시대와 현실을 관통하고 있다. <파란나라>는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 즉 누구나 잠재적 전체주의자라는 무서운 진실보다 우리 내부에 현존하는 전체주의적 기제와 기질을 우선 직시하라고 명령한다. 야만적인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을 당장 철폐하지 않으면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파국이 도래한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실험이란 동일한 조건 속에서 같은 결과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과학적 추론 장치이다. 한국에서의 전체주의 실험은 메타현실이 아니라 이미 현실 자체이다. 일베, 여혐, 종북 타령, 동성애혐오 등 (미시적) 전체주의적 발상과 폭력이 별다른 제재나 장애 없이 마구 표출되고 있다. 전체주의의 대립항인 민주주의에 대한 감성이 숙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민주적 시민의식과 사회적 자존감을 키워야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이기적 욕망과 결합된 집단적 맹목성에 길들여졌다. 민주주의를 외우기만 했지 익히지는 못했다. 대학에서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유약한 자아를 강화하는 전통이나 해방과 방황의 약효를 공유하는 호기어린 낭만도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는 복수를 당할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념적으로 역사상 가장 연약한 세대, 그래서 전체주의 위험성에 가장 유약한 세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들은 패배감의 내면화와 굴복감의 상시화에 시달리고 있다. 폭력적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일상화되면 현실감을 상실하고 백치에 가까운 상태로 추락하게 된다.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 방관의 원흉이 자본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지 못하고 좀 더 손쉽고 만만한 상대를 찾아 분풀이를 한다. 강자에 비굴하고 약자에 포악하다. 포퓰리즘에 휩쓸리고 전체주의적 선동에 솔깃한다. 정치적으로 허약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이 숙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란나라>의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라. 누구 하나 예외가 없다. 이런 사태에 대한 복수는 처절할 것이다.
5. 김수정이 왔다
연극판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워낙 쪼그라들다보니 이슈가 생겨도 거창하지 않고 거사가 생겨도 보잘 것 없다. 아무도 봐주지 않으니 우리끼리도 흥이 없고 호들갑이 없다. 예술은 공인된 광기이고 허용된 숭배이건만, 연극은 그런 가장 강력한 존재형식을 상실했다. 누가 뭐라든 김수정의 출현은 북 치고 장구 칠 일이다. 김수정은 저돌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구현하는 하나의 정신이다. 경건한 탐미주의와 엄숙한 심리주의를 종결하는 마침표이자 나약하고 순종적인 내용미학을 마감하는 파성추이다. 김수정이라는 보통명사의 시대가 왔다. 이제 김수정 현상을 논해야 한다. 연극에 할당된 열광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소진하면 안 된다. 환호가 사라진 시대, 열광이 식어버린 시대, 김수정은 우리의 죽은 감각을 건드리고 있다. 날 것 같은 생생함이 무대로 진입한다. 삶이 이름표도 떼지 않은 상태로 예술로 육박한다. 무서워할 필요도,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고상함과 우아함의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샤우팅과 격분의 시대이다.
미래세대를 예견하지 않고 자신의 청춘을 즐겨버린 어른들은 이제 젊은이들에게 꾀꼬리의 노랫소리를 기대하지마라! 이제 젊은이들에게 심리주의의 섬세함을 요구하지마라! 이제 젊은이들에게 ‘선 굵은 연기’ 따위를 강요하지마라! 젊은이들에게 어른과 닮아지기를, 그래서 어른이 성숙의 지표임을 인정하라고 떠밀지 마라! 젊은이는 어른을 배신할 때 젊고, 기성예술을 무시할 때 예술적이며, 관습을 짓밟을 때 찬란하다. 일어서서 김수정을 영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