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IS 한담만문
레퍼토리만이 살길이다
백승무(TTIS 편집주간 대행)
레퍼토리 바람이 분다
“우리 현실 속에서 레퍼토리 극장을 논한다면 너무나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꿈으로 낙담하고 포기해버리기에는 그나마라도 꾸려온 우리의 현대연극사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1972년 오현주 연출가의 글이다. 그로부터 40년 후 서연호 선생은 <공연과리뷰> 여름호(2012년)에 “공연예술이 자립하는 길은 무엇인가. 레퍼토리가 대안이다.”라고 썼다. 그의 충언은 짧지만 강렬하고 분명하다.
2017년 정동극장은 레퍼토리극장화 선언을 했다. 다양한 작품들로 연간 프로그램을 돌리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검증된 콘텐츠를 극장 레퍼토리로 안착시키는 걸 당면과제로 설정했다. 2012년부터 시즌제를 시작한 국립극장도 최종적으로 레퍼토리극장화가 목표이다. 시즌을 채울 1년치 공연목록을 짜는 게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전 국립극장 기획위원인 이주영 선생은 아예 레퍼토리 구축이란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레퍼토리 극장은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양산할 수 있으며, 숙련된 배우는 작품 이해가 높아져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하지만 이들 극장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레퍼토리 극장이 아니다. 법인화된 국립극단도 마찬가지다. 레퍼토리는 연간 공연계획표를 뜻하는 게 아니다. 핵심은 반복성이다. 여러 작품을 순차적으로 반복해서 상연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른바 고정레퍼토리가 존재해야 레퍼토리 극장이라 부를 수 있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말리드라마극장을 예로 들어보자. 레프 도진이 이끄는 이 극장의 올 시즌 레퍼토리는 총 40편(대공연장 28편, 소공연장 12편). 이 레퍼토리가 거의 매일 순번대로 상연된다. 대공연장은 400석 규모, 소공연장은 56석 규모이다. 올 시즌 새로운 공연은 겨우 네 작품에 불과하다. 9월 7일 <햄릿>, 9월 11일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브레히트 작), 9월 14일 <푸른 빛>(미엔코 아우치 작), 9월 15일 <주점 ‘불멸’>(모하메드 카시미 작)만이 새로이 레퍼토리에 포함된다. 배우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연습과 공연을 반복한다. 이것이 레퍼토리 극장이다.
우리 실정은 어떤가? 2~3개월 연습에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4주 공연이 다이다. 배역을 내면화시킬 충분한 연습은 언감생심, 초연 후 재공연은 기대난망이다. 연출가 메이예르홀트는 100회차 공연 이후에 지인과 평론가를 초대하라고 권한다. 그 정도 무르익어야 볼만하다는 것이다. 말리드라마극장 배우들은 대부분 20년 넘게 한솥밥을 먹은 지기들이다. 이들도 최소 1년 연습은 기본이다. 4년을 연습해서 올린 작품도 있다. 그리고 몇몇 레퍼토리는 10년 넘게 공연 중이다. 30년 동안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았던 <형제자매들>은 2015년엔 새로운 버전으로 재창작을 해서 올리고 있다. 수치 몇 개만 비교해도 우리 연극이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극단이 부실하고 레퍼토리시스템이 없는 까닭이다.
레퍼토리 극장은 몽상이 아니다
한 해에 대학로에서는 500편 이상의 연극이 올라간다. 대부분 3주를 넘지 않고 막을 내린다. 그걸로 끝이다. 입소문 날 시간도 없다. 입소문 나도 빛 좋은 개살구다. 소극장을 가득 채워봤자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 높은 대관료와 낮은 관람료는 19세기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말이 안 되는 구조다. 이런 전근대적 구조를 놔두고 예술성을 논하는 것은 위선이거나 사치다.
이런 비예술적 구조를 혁파할 유일한 대안이 레퍼토리제도이다. 상상해보자. 그 극장에 가면 365일 좋은 공연이 올라간다. 어제는 그리스비극, 오늘은 셰익스피어, 내일은 체호프! 5년 전 봤던 <안티고네>의 주연이 바뀌었다는 기사가 뜨면 작심한 관객들이 몰려온다.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20년째 리어왕 배역을 하던 배우가 은퇴하는 날은 손수건 한 장쯤 준비해야한다. 눈물바다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배우들 연기 깊이가 해마다 달라지는 <세 자매>는 연극과 신입생들의 필수 관람작. 새로이 레퍼토리에 들어온 <고도를 기다리며>는 파격적 실험으로 인기 급상승…
협동조합 모델
문제는 극장이다. 매표수익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여야 한다. 300석 중형극장이 적절하다. 다행히 최근 민간 중형극장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곧 중형극장 시대가 도래한다. 선점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레퍼토리를 채울 공연은? 당장은 협동조합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 5~6개 극단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각자 최고작 3편씩, 총 15편정도로 1년 레퍼토리를 구성해보자. 협동조합 구성은 ‘극장나무 협동조합’의 실험을 참조할 수 있다. 팬덤이 있는 유명극단들이 뭉쳐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집단적 도전에는 서울연극협회의 전폭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이런 거 하라고 만든 조직이기 때문이다. 협회는 레퍼토리 극장의 성공을 위해 이론적, 행정적 도움을 주는 실무조직으로 변화해야 하고, 기존 극단들의 자활을 돕는 전문도우미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제도에 걸맞은 새로운 지원제도를 연구하여 문예위와 각종 문화재단의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문체부뿐만 아니라, 고용노동부, 중소기업청, 여성부, 보건복지부 등의 다양한 지원체계도 끌어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협회는 한국연극의 ‘정상화’에 대해 어떤 비전과 로드맵을 갖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현상유지나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면, 협회는 한국연극의 미래에 대해 답해야 한다.
방울전사양성 프로젝트
얼마 전 한 간담회에서 레퍼토리 얘기를 꺼냈더니 연극인들은 하나 같이 손사래를 쳤다. 경제적으로 적합하지 않고 이미 오래전 논의가 끝난 주제라는 것이다. 명백한 패배주의다. 언제부터인가 연극인들은 꿈꾸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블랙리스트는 꿈과 노력을 짓밟는 조직적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퍼토리 외에는 답이 없다. 레퍼토리가 만병통치 만사는 아니지만, 유일한 능사임은 분명하다.
앞의 글에서 서연호 선생은 “이미 길을 잘못 들어선 공연계에서 레퍼토리를 정립하는 작업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만큼이나 어려운 과제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서둘러 방울을 달아야 한다. 흥행작을 가진 극단들이 궁리를 시작하고, 협회가 전폭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대안을 제시하고 필요한 지원체계를 요구해야 한다. 새로운 연극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방울전사들이 필요한 때이다.
너무 좋은 지적이다. 한국연극에서 레파토리시스템은 이런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오픈런’이라고. 이런 상업극은 한 레파토리로 죽어라고 막을 올린다. 몇년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손님’을 받는다. 그렇게 오래하다 보니 ‘뒤틀려’ 저질극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실험극’으로 불리기도 하는 주류연극은 어떠한가? 이건 공연평을 쓰는 평론가와 지원금 심사위원을 위해서 공연한다. 애당초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는 집단이다. 그렇게 해서 이를 위해 일하는 예술가(?)는 결국 ‘교수직’으로 안착해 (그나마 성공한 경우) 말년까지 ‘원로연극인’으로 ‘예술원 회원’으로 활약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풍토니, 이런 연극인들은 젊은 시절부터 ‘손님 =관객’에 대한 개념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손님들’이 보기 어려운 수준높은 연극으로 자신들의 ‘지적수준’을 자랑하면서 이론가와 공생하며 한 평생을 보낸다.
이것이 한국연극의 현실이고, 절대로 변하기 힘든 한국연극의 운명이다. 내가 보기에 ‘패배주의’가 아니라 극히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평생을 보내고 보낼 연극인들과 백날 논의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민간극단에서 레퍼토리 공연이 과연 가능할까요?
저는 극단 ‘드림시어터컴퍼니’의 대표 정형석입니다.
저희 극단은 올해 서울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단체입니다.
저희 극단에는 수년 전, 소위 말하는 흥행이 됐던 ‘그놈을 잡아라’라는 레퍼토리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작품은 제가 쓰고 연출해서 2010년에 초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작품입니다.
2012년에 서울연극제에 출품됐고 관객반응이 좋아서 연장을 하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소위 말하는 오픈런 공연이 됐습니다.
그 작품으로 저희 극단 단원들은 4대보험까지 들어가면서 월급을 받았고
그 공연에 출연한 배우들은 출연료로 생활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초연때 10명이 출연했던 역할을 8명으로 줄였고 그 중 절반 이상은 40대 이상
중견배우들이었습니다.
그 작품의 흥행으로 극장까지 만들었고 서협에서 주최했던 우수경영 단체 사례로
발표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잘 되고있던 공연을 2년전 접었습니다.
이유는 소위 말하는 연극계에서 권력(?)을 가진 부류들이 그 공연이 장기공연이고
흥행이 된다는 이유로 상업극이라는 굴레를 씌웠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저희 극단을 상업단체로 규정했구요.
서울연극제에 출품됐던 작품이고 거창국제연극제에서 상까지 받았던 작품이
흥행이 되고 장기 공연이 되자 대학로의 그저 그런 상업극들과 같은 선상에 놓였습니다.
그 작품의 제작 극단은 역시 그저 그건 상업제작사가 되버렸구요.
저희 극단은 그 작품 말고도 매년 한작품 이상씩 꾸준히 창작 신작을 개발했고
한해 평균 5편 내외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 어떤 작품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만큼 돈을 벌어준 작품은 ‘그놈을 잡아라’ 한편이 유일했습니다.
당연히 나머지 모두는 적자였고 그 적자는 돈을 벌어준 그 작품이 메꿔주거나
제 사재를 털거나 빚을 내거나 다른 방법들로 메꿔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기에 지원사업에 몇번 신청을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번번히 탈락이 되더군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 지원사업의 심사위원이었던 모 평론가께서 했던 발언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단체가 상업단체라 탈락시켰다구요.
그리고 또 다른 사업에서 탈락되고 납득이 되질않아 당시 문화예술위원회
실무담당이었던 직원에게 문의를 했더니 장기공연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흥행이 되고 있는 작품 하나 때문에 저희 단체가 상업단체로 규정되어지고
그로 인해 다른 제작되는 작품들까지 같은 시각으로 덧씌워져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
그 잘되고 있던 공연을 무대에서 내렸습니다.
물론 그 선택은 결국 나름 성공(?)은 했습니다.
지난 2년간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연극제에서 대상도 수상하고 이젠 상업단체라는
오명(?)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듯 하니까요.
하지만 명예는 얻은거 같은데 반대급부로 극단 살림은 쪼그라들어서 이젠 지원금 없이는
공연을 올리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혹시나 싶어 잘됐던 그 공연을 다시 무대에 올려봤지만 이젠 적자가 나더군요.
대관보다는 저희 극단 공연들을 올리기 위해 만들었던 극장도 내 놓은 상태입니다.
극장을 팔아야 그동안 쌓인 빚을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셰익스피어나 체홉의 작품을 장기 흥행 시켰다면 위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저희 단체는 로얄티를 주는 해외작품은 하지 않겠다는 게 창단 당시 가졌던 목표였습니다.
창작극을 만들어 반대로 로열티를 받는 공연을 만들자는 목표였습니다.
저희 단체가 창단한지 9년이 됐는데 그동안 제작한 많은 작품 중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원작으로 각색한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수 창작극입니다.
위의 ‘그놈을 잡아라’라는 작품은 일본의 단체에서 로열티를 지불하고
공연키로 했다가 지금은 중단 된 상태입니다.
그 이유가 한일 양국에서 동시 공연키로 기획을 잡고 저희쪽에서 제작 지원을
해주기로 했었는데 저희 단체가 공연을 멈추는 바람에 진행이 스톱된 상태입니다.
저희 단체는 정말 열심히 뛰어 온 단체입니다.
올해만해도 저희 단체가 제작하는 공연이 7~8편입니다.
극단 창단 목표에 ‘모든 공연의 레퍼토리화를 이루어 자생력을 갖는 단체가 되자’
라고 명시를 했을만큼 레퍼토리 공연을 만드는 것에 노력해왔습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서너편은 2주 안에 제작할 수있을만큼 시스템이 갖춰져 있습니다.
내년 10주년을 맞아 한달간 저희 극단 작품 4~5편을 연달아 기념공연으로 무대에
올릴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뿐입니다.
지금의 판에서 계속 공연을 제작해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니까요.
현실에서 굴러 본 제 경험에 의하면
레퍼토리가 살길이다라는 건 현재의 공연계 풍토에선 아직은 먼 이상이라고 봅니다.
국립이나 지원이 가능한 그런 시스템에선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건 그저 기획일뿐, 진정한 의미의 레퍼토리는 아닐 것입니다.
레퍼토리의 목적은 단체의 생존을 위함입니다.
공연계의 시선, 특히 주류의 시선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의 연극계에선 레퍼토리는 요원하다고 판단되어집니다.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정형석대표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이야기(목소리)가 실려 너무나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연에 너무나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왜 우리의 젊은 연극인들은 그동안 ‘정치’에만 목소리를 높였던 것일까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한번쯤 되돌아봅시다. 이제는 젊은 연극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정권교체’도 이루었으니, 제발, 이제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세월을 보냅시다.
‘권리장전’을 외쳐서 우리의 이런 난제들을 풀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제는 정신을 가다듬고 ‘정권교체’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게 무엇인가를 한번쯤 직시하고 관찰해봅시다. 젊은 연극인들이여, 이제 ‘정치’의 관심을 우리의 문제로 돌릴 때입니다. 정대표의 글이 우리에게 이런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