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백승무

***이 글은 <<한국희곡>> 2017년 가을호 권두언에 게재되었습니다.

(TTIS 한담만문)

 

극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백승무(TTIS 편집주간 대행)

 

글 제목은 뭔가 근사한 존재론을 들먹거릴 기세이나 사실 묻고자 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이다. 극작가는 창작활동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가? 기고나 강연, 창작교실 등 부업 수단이 다양한 시인·소설가와 달리 극작가는 고독한 외벌이 직종이다. 게다가 무대화라는 2차 창작과정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공연 수익감소의 직격탄을 맞다보니 극작가의 자활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이 시대 극작가로 사는 것은 모든 자본주의적 욕망과 담을 쌓고 이슬만으로 연명하는 초식요정이 되거나 자판에 구멍 나도록 괴물 같은 생산력을 발휘하는 집필요괴가 되는 길밖에 없다. 죽느냐 사느냐, 양자택일 밖에 없는 것이 문제로다!

 

다작은 폭력이다

 

낮은 저작권료와 열악한 흥행여건 속에서 극작가가 생존할 방도는 많지 않다. 가장 손쉬운 대안이 다작이다. 많이 써서 저작권료 회전율을 높이는 것. 전문용어로 박리다매 되겠다. 많은 공력이 필요한 주제나 스타일 대신 시간적으로 짧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규모의 작품을 많이 쓰면 된다. 이렇게 해서 ‘일회용’ 작품이 탄생한다. 어차피 재공연 여부도 복불복이라서 ‘일생의 명작’이든 일회용 작품이든 처할 운명은 엇비슷하다. 극작가에게 가해지는 다작의 압력은 명백히 폭력이다. 우리가 즐기는 일부 프랜차이즈 커피가 에티오피아 아동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물이듯, 대학로 공연 한 편에는 극작가를 다작으로 내모는 폭력적 생산구조가 내재해있다. 후진 희곡은 후진 공연을 낳고, 후진 공연은 연극시장을 후지게 만든다. 이 악순환의 책임은 딴 데 있는지 몰라도, 그 고리의 시작은 극작가부터다. 말인즉슨, 극작가가 살아야 연극이 산다.

 

창작극 신화

 

‘창작초연’ 작품 위주로 진행되던 서울연극제가 창작극 제한을 철폐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창작극 위축을 걱정하는 이도 있으나 기우에 불과(함을 증명해야)할 것이다. 한국 극작가들이 기존에 써놓은 작품들은 연극제를 10년 해도 남을 만큼 풍부하다. 창작극 기근에 시달리거나, 번역극과 수준차가 크던 수십 년 전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대학에서 수많은 극작가가 양산되는 오늘날, 순수창작극 육성에 목맬 필요는 없다. 메시아를 대하듯 부풀려진 창작극에 대한 기대감은 신화에 불과하다. 오히려 지금은 양적 팽창보다는 질적 향상에 역점을 두어야 할 때이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도서관에 영면하는 작품들도 살려야 한다. 지원금 요건에 ‘창작극’이란 용어는 모두 삭제되어야 한다.

 

만들어진 고전

 

창작극 신화의 최대 피해자는 연출가들이다. 한번 공연된 희곡은 상연후보목록에서 일단 제외시킨다. 손 탄 희곡으로 지원금을 받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초연의 부담도 없고 어느 정도 연구성과가 있는데도 거들떠볼 수가 없다.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펼쳐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나라의 고전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희곡도 고전의 자격증을 갖고 탄생하는 건 아니다. 많은 연출가들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다루면 어느새 고전이 되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는 연출가들의 반복적 시도로 만들어진다. 숨은 의미를 드러내고 해석의 다양성을 부여하면 희곡은 예술작품 특유의 아우라를 획득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도 그랬고 체호프도 그랬다. 탄생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 급에 맞는 한국 희곡이 있냐고? 허약하고 부족하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품새를 갖춘 희곡은 충분하다.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보시라. 안목이 모자라면 연구자들에게 물어보라. 받아 적기 힘든 희곡목록이 쏟아질 것이다.

 

극작가 회생 프로젝트

 

연극이 살려면 극단이 살아야 하고, 극단이 살려면 공연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공연이 살려면 극작가가 살아나야 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살리는 선순환 구조의 초입에 극작가가 있다. 생존을 위해 대리운전을 해야 하고, 극단을 만들어 연출까지 겸업해야 하는 환경에서 고전명작이 탄생할 수는 없다. 극작가들이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창작환경을 바꿔야 한다. 최우선 과제는 (고정)레퍼토리시스템 시행이다. 다작 관행을 대작 창작으로 전환하는 길은 상연날짜를 늘이고 공연 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급감하고 있는 희곡공모제를 부활시키는 노력은 한국극작가협회의 몫이다. 협회는 유관기관·단체에 지속적으로 제안서를 발송하고 책임자 면담요청을 해야 하며, 각종 아이디어로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 계륵이 되어버린 신춘문예 희곡부문도 실용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작품이 아니라 당장 무대화 할 수 있도록 5막극 공모로 바꾸자고 제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희곡 발전의 청사진과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협회를 만든 이유이기 때문이다.

One thought on “극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백승무

  1. 어느 극작가가 힘들여 쓴 자기 희곡이 사장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처음에 곤혹스럽게 나선 게 작, 연출을 시도한 극작가들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작, 연출을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역설적으로 극작가가 필요이상으로 우대받는 풍토가 만들어낸 기현상이다. 결과적으로 이게 한국연극을 죽이고, 결과적으로 극작가를 죽이고,한국연출가를 죽였다. 왜? 신작을 양산하니, 사전정보가 없어 내용도 모르고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들이 자연히 연극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여기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 한국의 평론가들이다. 그들은 신작이 나오지 않으면 할일(평론)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렇다. 이런 풍토가 조성되니 자연히 모든 지원이 극작가, 즉 작,연출가에게 쏠리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심사를 담당하는 평론가들은 외친다, 신작창작극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글을 남기는 그들의 목소리는 항상 클 수밖에 없고, 그들은 모든 지원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래서 연출을 꿈꾸는 신진연출가들은 모두가 극작가로 데뷰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러니 극작은 물론이고 연출가의 역량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왜? 세상에 가장 쓰기 힘들고 어려운게 문학중에서도 극작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도 배출 못하는 한국에서 변변한 수입도 없는 극작가를 양산하려들고, 이를 실천하려드는 연극이야말로 정말 가여운 존재들의 집합체다.
    이제는 연출가를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왜? 이들이 한국에서는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정말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극작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창작신극이 관객을 모으고, 장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열성과 신중을 기해서 무대화를 해야 한다.
    정말 많은 궁리를 해서 무대에 올려야 한다. 내용도 모르는, 그것도 작, 연출이어서 자기 희곡의 단점도 모른 채 무대에 올려, 평론가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말 한국의 평론가들은 극작가에게 병주고 약주는 사람들이다. 우리 한번 진지한 토론회를 개최해 보자. 백교수 혼자 외칠 일이 아니다. 보통 심각한 현상이 아니다. 왜 우리는 지원금 몇푼을 얻고자 두려움을 모른 채 무대화를 시도하는지 모르겠다.
    * 이런 글을 검열해 또다시 묵살하면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겠다. 정말 각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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