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 생의 진실을 포획하는 이야기의 힘
윤진현
원작 : 마누엘 푸익
번역 : 문삼화
연출 : 문삼화
제작 : 악어컴퍼니
공연일시 : 2017/12/05~02/25
화,목,금 8시/수 4시,8시/토 3시,7시/일 2시,6시(월 공연없음)
공연장소 : 아트원시어터 2관
관극일시 : 2018/02/18 18:00
마누엘 푸익(Juan Manuel Puig Delledonne, 1932~1990)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얼핏 보기에 통속적이거나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구조와 사건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포획되지 않는 진실을 흩뿌리며 독자를 뒤흔들 수 있는가를 충격적으로 웅변한다. 이 작품은 소위 객관적 진리, 확고한 대의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견고한 이념과 사고가 발화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것으로 미끄러지고 얽혀드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아리도록 눈부시게 비춘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의 구조나 사건은 흔하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나 독재를 타도하고 인간다운 삶이 있는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회적 이상의 가치를 잠깐 괄호치고 중립적 관점에서 형식적 프레임으로 분석해보자. 혁명가와 같은 감방에 갇혀 있던 평범한 사람이 혁명의 이상에 동화되어 혁명가로 거듭난다는 서사는 실화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픽션으로는 더욱 낭만적일 수 있다. 여기에 다소 낯선 동성애라거나 고귀한 혁명적 헌신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형식적으로 보면 영리한 극적 조작에 불과하다.
공간적 배경은 감옥이다. 이 밀폐된 공간은 장진의 <허탕>이나 최근 방영된 인기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특별한 우정과 연대를 생산하기에 아주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그러나 긴장의 수준으로 보면 성적으로 단일하게 구성된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학적 변화는 한계가 있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새라 텐크레디는 남성 감옥 폭스리버에서 유일한 여성인물이다. 극적 역학으로 해석하면 마이클은 정의와 약자에 대한 헌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의존적인 새라를 유혹하여 자신의 탈출을 돕도록 조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새라 입장에서는 정상이라면 마이클과 링컨이 억울하게 함정에 빠져 감옥에 있고 사형이 임박했다고 해도 탈옥을 도울 수는 없다. 사랑에 빠지고서야 ‘사랑’의 힘으로 수인의 탈출을 돕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적으로 예측가능한 이성적 판단과 결정을 넘어서는 변수는 전통적으로 ‘사랑’의 영역에서 발생해왔다. 그리고 사건의 변화를 변수에 맡기는 것은 언제나 모험이고 위험이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행동범위를 확장하고 인간의 자율적 결정권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왔다. 인간의 행동을 정의나 도리와 같은 간단한 산술적 방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인간을 더욱 심오하고 불가해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수인과 교도소 의사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역시 개연성이 부족하다. 게다가 대부분 국가에서는 교도소 공의마저 동성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보면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동성 간의 사랑이 소환되는 것은 역학적으로 당연하다. 특히 정치범과 동성애자의 구도는 편견이라는 사회문제에 도전하는 목표와 효과를 동시에 제기하면서 작품의 내적 긴장도 배가할 수 있다.
감옥의 2인실, 혁명가와 동성애자가 마주하는 순간, 이 흥미진진한 마이너리티의 조합만으로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1975년 이 작품이 출판된 후 헥토르 바벤코 감독의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1985)가 아카데미와 깐느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은 후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191년에는 토니상을 수상하였으니 이 작품의 화제성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그럼에도 허다한 소설 원작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영화나 연극이 소설적 언어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소설이 소개될 즈음 변혁과 이에 헌신하는 인간이란 고귀한 희생의 코드가 있었다. 여기에 성적 소수자에 대한 지나친 편견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목표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2018년 현재 <거미여인의 키스>의 각색 이슈를 ‘동성애’로 잡는다는 것은 시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설 원작이나 영화에서처럼 몰리나가 석방된 후 어떻게 자기 신념이나, 혹은 사랑에 헌신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는 연극에서 어떻게 인간사에 능동적인 변수를 만들어내는 사랑이란 힘이 동성 간에도, 그것도 본래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발렌틴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연극 밖의 소설이나 영화까지 동시에 알고 있는 관객이 아니더라도 무대 위에서 이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념을 교환하면서 사랑에 도달해가는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기대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몰리나의 영화 얘기를 통해서 서사의 ‘상호텍스트성’, 소위 ‘중고언어(中古言語)’로 발화되는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가를 경험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들은 사실 둘 다 자신들의 언어,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거창한 맑스의 언어로 말하는 발렌틴이나 통속적인 영화의 언어로 말하는 몰리나 양자는 모두 거듭 책을 읽거나 영화를 되풀이 반추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방편으로서의 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이야기든 참조된 이야기든 이야기 그 자체로 중요하다.
하여 다 같이 빌라 데보토 감옥으로 옮겨가 나직나직하게 들려주는 몰리나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발렌틴과 마찬가지로 몰리나를 사랑하고 또 비정치적이었던 몰리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혁명의 이상을 품고 고통스러워하는 발렌틴을 돌보며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 하여 이들의 결합이 단순한 동성애적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지로 신뢰할 수 있기를 경험하고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이 함축미 넘치는 제목이 의미하는 스스로 포획할 수 있는 능력, 그들의 거미줄은 결국 이야기가 핵심이라는 사실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극적 주제로 동성애를 다룬다는 것,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무대 위에서 두 명의 남성 배우가 사랑을 연기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거칠게 말하면 동성애 연기를 한다고 해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몰리나는 마치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친절하였고 발렌틴은 정복자처럼 뻔뻔하였다. 사랑을 베풀었으니 심부름을 해야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중요한 작품을 레퍼토리화하는 악어컴퍼니의 작업방식은 환영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의미가 한정되어서는 무려 3번째 재공연의 위상이 무색하지 않을까. 반복이 아니라 진화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