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 정윤희

존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의 몸짓

<백조의 호수 Swan Lake>

정윤희

극본: Michael Keegan-Dolan

연출: Michael Keegan-Dolan

출연: Mikel Murfi, Alex Leonhartsberger, Bernadette Iglich, Rachel Poirier 외

공연일시: 2018.3.29 – 3.31

공연장소: LG아트센터

관극일시: 2018.3.19.

 

저주 받은 백조들이 머물고 있는 저 까만 호수와도 같이, 존재의 아픔에도 그와 같은 시린 감각이 서려있다면, 어쩌면 그 아픔이 존재를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무겁다 할지라도 어딘가에는 청량감으로 통하는 길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니 오랜 억압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민족과 인종들은 그토록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조와 예술 형식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슬펐지만 후련했고, 또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무대에서는 시종일관 아일랜드 풍의 3중주가 흘렀고, 음악에 맞추어 배우들은 몸짓을 구사했다. 팔다리를 휙휙 저으며, 성큼성큼 뛰면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췄다. 시원시원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은 음악과 몸짓 속에 아픔은 조금씩 씻겨 나갔다. 몸짓이 단순히 아픔에 매여 있었더라면 관객들에게 그러한 청량감은 선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픔을 뛰어넘어 넓은 창공을 가로지르는 몸짓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불현듯 슬픈 울림이 들려온다. 아일랜드 음악이 주는 신비와 매력이라면, 이미 많은 이들에게 매우 친숙해진 터이다.

 

극은 아일랜드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전설과, 발레 <백조의 호수>의 원작인 러시아의 전설, 그리고 몇 해 전 아일랜드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사건이 중첩되면서 구성된다. 이로써 오랜 전설 속 인물이 겪는 아픔과 현대인이 겪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만 전설 속 계모의 계략과 마법으로 백조가 되어버린 인물 대신에 극중에서는 카톨릭 신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소녀와 이를 목격한 그의 자매들이 신부의 저주로 백조로 변해서 등장한다.

 

한편 지미라는 캐릭터는 2000년 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주인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새로 발표된 주택계획으로 인해 할아버지,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그의 뼈와 살과도 같은 집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미는 큰 상실감에 빠진다. 그의 어머니와 친척들은 모두 새집에서 사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지미가 겪는 불안은 그를 점점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장총을 들고 자살을 하려는 지미에게 느닷없이 백조 여인이 나타났고 그 둘은 천천히 서로에게 이끌리며 황홀한 음악과 춤으로써 서로를 위로한다. 작품에서 음악과 몸짓이 가장 빛을 발했던 장면 중 하나이다.

 

극에서 자세히 소개되진 않았지만 지미는 아버지에게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어머니 무자비함과 몰이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던 장총을 선물하면서,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어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빨리 장가를 들어 독립을 하라고 종용한다. 급기야는 며칠 뒤, 억지중매를 목적으로 그의 생일파티에 온 동네 처녀들을 초대했고, 이들은 춤판을 벌인다. 이날 술과 흥에 취한 아가씨들로부터 지미가 느꼈던 수치심과 모욕감은 신부에게 짓밟힌 소녀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의 배경에서 음악이 흘렀고, 배우들은 음악에 몸을 맡기곤 했다. 상처받은 지미와 백조 여인도 마음을 열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 모든 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극과 음악과 몸짓의 합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무대에서는 깜짝 묘미도 있었다. 눈가루를 뒤집어쓰며 춤을 추는 클로징 장면에서 배우들이 관객들에게도 가루를 뿌린 것이다. 배우들은 변화무쌍하게 상황에 몰입하다가도 너스레를 떨며 개그로 신들을 마감하곤 했었는데, 이때에도 갑작스러운 눈가루 세례에 객석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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