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처의 감각/ 유연주

*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누구의 ‘아내’이거나 ‘처’이거나

 

유연주(연극평론가)

 

 

 

2018년의 <처의 감각>은 초연이라고 해야 할까 재연이라고 해야 할까? 원작과 다른 해석을 한 까닭에 제목마저 바꾸어 공연되었던 <곰의 아내>(고선웅 각색‧연출, 남산예술센터, 2016.7.1.~7.17)가 고연옥 작가의 희곡 <처의 감각>의 초연이라면 초연이기 때문이다. 고연옥의 <처의 감각>은 작가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작품이 해석되고 해체‧재구성되는 부침을 겪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다른 연출을 만나 남산예술센터에서 두 번이나 공연되는 흔치않은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과연 행운이었을까? 원작의 비운이 이걸로 끝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포스트휴먼이 아닌 휴먼의 이야기

 

‘여자’는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곰이 구해줘 곰의 아이를 낳고 몇 년을 동굴에서 살았다. 곰도 인간도 아닌 아기를 사냥꾼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사냥꾼이 곰-아기를 죽이고 여자를 도로 집으로 데려다준다. 그 바람에 여자는 곰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어느 날 여자는 곰에게 가려고 집에서 도망쳤다가 죽으러 숲으로 온 ‘남자’를 구하게 된다. 여자와 남자는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갖게 되고 결국 둘은 인간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에게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남자는 첫사랑을 찾으러 떠나버린다. 그러자 여자도 인간-아기를 죽이고 곰을 찾아 떠난다.

 

여자는 그야말로 곰과 인간 사이를 ‘트랜스포지션(변위, transpositions)’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트랜스포지션을 ‘상호텍스트적이고, 경계를 가로지르며 횡단하는 전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음악과 유전학에서 통찰을 얻은 개념으로 음악에서는 ‘불연속적이지만 조화를 이루는 패턴을 지닌 변주곡들과 음조변환을 의미’하고 유전학에서는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면서도 무작위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은 과정인 유전자의 변이과정 혹은 유전정보의 전수과정을 지칭’한다.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개념을 ‘대안적인 앎의 다른 방식을 발생시키는 창의적 통찰의 경험을 강조하는 과학적 이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박미선‧이현재‧황주영 역, 트랜스포지션: 유목적 윤리학, 문화과학사, 2011, 33~35쪽.)

 

<처의 감각>의 여자는 인간과 인간 간의 유전자적인 전수에 변화를 가져오는 곰-아기를 낳고 아이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규정짓지 않은 채 그저 예뻐한다는 점에서, 인간-아기를 포기하고 곰을 찾아 떠나며 끝내 ‘동물되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포지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처의 감각>이라는 작품 자체는 여자의 트랜스포지션을 통해 인간중심적인 이 세상에 비판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를 내리기에 이 공연은 심하게 ‘인간/휴먼’에 기울어져 있다.

 

 

확장되지 않는 감각, 좁혀지지 않는 타자와의 거리

 

인상적이었던 첫 장면으로 가보자. 곰과 함께 살던 여자가 현실로 걸어들어오는 장면이다. 곰의 세계에 있던 여자가 객석을 지나 무대로 걸어 들어온다. 그가 무대 위에 서고 다른 배우들은 그를 에워싼다. 그렇게 서로를 감싸 안은 채 한 호흡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마치 한 인간의 탄생 장면이나 거대한 곰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은 환상을 선사한다. ‘곰-인간’인 여자는 혼자가 아니라 곰의 세계,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호흡, 에너지는 이 공연에서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인간 세계에 들어온 여자는 너무나 쉽게 그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그 힘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곰-인간일 때 그와 같이 호흡해주던 (배우들로 구성되었던) 세계는 이제 도리어 그의 숨을 옥죄어오는 존재들로 바뀐다. 나중에 여자가 다시 숲으로 돌아갈 때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그때에는 이만큼의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여자의 ‘감각’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첫 장면 이후에 연출의 힘이 느껴지는 장면은 오직 여자가 아닌 다른 인물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공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자의 것이 아니다. 또한 여자의 언어가 비록 짧더라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이들의 언어에 눌리고 밀린다. 감각은 상실하고 인간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인간 세계의 여자는 관객에게 전혀 인상적이지 않다.

 

여자가 곰에게 다시 돌아갈 때까지 그 감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데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자연에서 얻은 감각이 현실에서는 사라지고 없으니 돌아가서 회복할 때까지는 그 감각이 없을 게 아닌가. 하지만 공연에서 여자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극의 무게중심이 인간 남자에게 기울어지다 보니 극의 목표 자체가 흔들리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자는 무대에 존재하긴 하지만 그 어떤 인물보다 비중이 약하게 느껴지고 거기에 여자는 언어까지 갖고 있지 못하다.(배역도 그렇고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여자의 감각은 관객에게까지 확장되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잠시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라져 버렸다.

 

<처의 감각>의 여자는 <지하철 1호선>(김민기 번안‧연출, 학전 기획‧제작)의 ‘선녀’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선녀는 백두산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남자 ‘제비’를 찾아 연변에서 왔다. 그는 하루 동안 지하철 1호선과 그 주변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부딪친다. 이 작품은 이를 통해 1990년대 서울 풍경을 그려낸다. <처의 감각>과 <지하철 1호선>은 극 자체가 목표하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 사회를 혹은 현실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외부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존재로 여자와 선녀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여자와 선녀의 눈에 띄는 존재들은 냉혹한 현실 세계의 모습을 닮아 있지만 그들의 눈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모두 연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두 인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선녀와 만나는 존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여자는 그 누구와도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혼자 부유하다가 사라진다. 결국 여자가 다시 곰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했을 때 인간 세상의 누구도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오히려 그와 만났던 ‘역장(이후 역무원)’과 ‘여인숙 주인(이후 펜션 주인)’은 더 세속화된 존재가 되어 있다.

 

휴머니즘으로의 회귀, 휴머니즘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처의 감각>에서 아무리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했어도 무대 위에서 발화하고 행동하는 것은 보편적 인간들이다. 연극 <곰의 아내>가 대사까지 수정해가며 남자의 이야기를 여자의 이야기보다 더 비중 있게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원작을 그대로 공연화한 <처의 감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을 이질적인 존재로 다루려 기괴한 분장을 하고 이상한 옷을 입혔어도 말이다. 어쩌면 차라리 무대 위에 곰을 출현시킨 <곰의 아내>가 포스트휴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브라이도티는 ‘보편적 인간/휴먼(the human)으로서의 초월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성차화된 타자(여성), 인종화된 타자(토착인), 자연화된 타자(동물, 환경 즉 지구)를 표시해 구별하는, 차이 즉 타자성이 구성적 역할을 하는, 변증법적 사유 도식을 거부’하며 ‘휴머니즘’이나 ‘(페미니즘적) 반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을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다.(로지 브라이도티, 이경란 역,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39~42쪽.) 이를 통해 인간중심주의의 오만과 싸우고 ‘인간/휴먼(human)’이라는 말로 일컬어지지 않는 존재(‘인간-아님(the non-human), 비인간(the inhuman), 반(反)인간(the anti-human), 비인도적임(the inhumane)과 포스트휴먼(the posthuman)’(로지 브라이도티, 위의 책, 8쪽.)에 대한 사유를 하려는 것이다.

 

그럼 <처의 감각>에서 여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반휴머니즘마저 거부함으로써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 작품은 휴머니즘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인다.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이예은,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웹진 드라마인, 2018.4.21. (http://www.drama-in.kr/2018/04/wife.html))라는 점을 이 연극의 치명적 단점이라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 연극의 말미에 여자가 곰을 향해 “당신은 내 아내였지요.”라는 대사를 한다. 이 한 마디를 위해 연극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강지희가 분석한 것처럼 ‘여자는 가장 약한 존재의 자리에 선 채, 보다 더 약한 자인 ‘아내’를 발견’하고 그 순간 ‘처(妻)’는 ‘곰과 자연,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핍박 받아온 모든 존재들을 향해 넓어’지기 위해서는 공연에서 좀 더 여자의 감각이 살아났어야 한다.

 

여기에는 사실 원작의 한계도 있다. 앞서 언급한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들면 안 됐던 것일까? 제목에서 나타나는 인식적 한계를 지적하자면 ‘아내’의 사전적 정의는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이다. ‘처’는 이의 동의어로 의미가 같다. <곰의 ‘아내’>에서 비로소 <‘처’의 감각>으로 바뀌어 공연 되었지만 결국 누구의 아내, 누구의 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아내나 처나 누구인가가 소유하거나 누구인가에게 소속됨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아내나 처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 시작된 지금 <처의 감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김지우, 2016년 <곰의 아내>에서 2018년 <처의 감각>으로, <처의 감각> 프로그램, 2018, 33쪽.)왔으면 하고 공연을 보러 갔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느껴진 점은 결국 이 작품도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봤던 연극의 대사를 여기에 인용하면 좋을 것 같다. “북한, 근‧현대사, 노동문제, 최저임금, 세월호특별법, 장애인이동권, 노인부양제도 이런 걸 쓰면 시대를 이야기한다고 하고 여성의 서사가 담긴 페미니즘 희곡을 쓰겠다고 하면 시야를 좀 넓히라고 합니다. 보통 연극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아요.”(연극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어>(공동창작, 이오진 연출) 공연 대사 중에서.)

 

고연옥의 <처의 감각>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 이렇게 혹평했지만 또 한편으로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하게 하는 걸 보면 후자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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