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평문은 <<한국연극>>(2018.08)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거대 강입자 가속기의 음모>를 읽는 일곱 가지 방법
백승무_공이모 회원
석지윤이 작심했다. 단내 나도록 밀어붙이던 충돌 상황은 부조리를 넘어 드디어 텍스트의 폭발에 도달했다. 지구종말서사가 그것. “우주만물이 최소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최소한 텍스트 내부는 그렇다. 어처구니와 터무니가 동시에 실종된 돌발적 상상력은 비약과 도약을 양분삼아 널뛰기를 한다. 거대 강입자 가속기는 “깨지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불멸의 입자”를 찾기 위한 실험이자 “삶의 비밀을 풀기 위한 실험”이지만, 퍼즐판을 벗어난 파편들의 억지스런 조합을 따라가면 모든 것은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다. 이가 어긋난 퍼즐이고 뼈없는 농담이며 들통난 음모이다. 소시민적 삶의 비루함과 인류파괴의 음모 사이에 알레고리적 연관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해독 불가능한 퍼즐조각이다. 지구를 헌납하고 얻은 것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씨바.”처럼 유희적으로 소진되는 언어적 기만술뿐. 그렇다면 <거대 강입자 가속기의 음모>(이하 <거대음모>)는 지적 사기에 불과한가? 물론 아니다. 지구를 통째로 말아먹는 이 무모한 상상력을 넘어서는, 혹은 이런 암울한 전망을 만회하는 다른 독법은 없는가? 이 평문은 <거대음모>의 성공을 위해 실시된 기초체력검사의 결과보고서이다.
1. 장르학적 관점
언젠가부터 ‘주류’ 연극계는 웃음에 인색해졌다. 그 대신 웃기면 ‘상업극’이란 어처구니없는 꼬리표가 붙었다. 손쉽게 웃음을 파는 밉상 공연들에 ‘상업극’이라는 저주의 레테르를 붙인 것이다. 연극계의 침체를 둘러싼 불안·불만으로 인해 ‘상업극’을 악마화했고 그 내적 속성인 웃음을 경원시했다. 웃기고 풍자하고 비틀고 조롱하면, 한마디로 ‘놀면’, 싸구려 취급받는다. 놀이 대신 메시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 탓이다. 진정성이니 내면연기니 하는 심리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코미디의 기술적 측면을 무시·폄하한 것도 한 원인이다.
웃음을 비하하고 코미디의 존재 자체를 경시하는 경직된 엄숙주의는 위험하다. 자신에게 부족한 속성을 부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영양불균형 상태에 빠지고 마는 프레임 오류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코미디’ <거대음모>는 옳다. 내용에 대한 중압감 없이 오로지 형식미학을 논하는 공연이 반갑고 고맙다. 연극은 형식예술(메이예르홀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Comedy is greater than tragedy(Christopher Fry).
2. 양자역학적 관점
거대강입자가속기(Large Hardron Collider; LHC)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10조원을 들여 제작한 27km짜리 실험용 원형구조물이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에 자리한 LHC는 빛의 속도로 가속된 두 개의 양성자를 충돌·파괴시킨 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물질, 특히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Higgs)의 발견을 최대과제로 삼고 있다.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입자의 발견은 우주의 탄생순간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태초 상황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LHC의 실험은 최초의 완성상태를 복원하는 남편의 ‘퍼즐’과 일맥상통한다. 우주 질서의 추적과 근원자에 대한 탐색도 LHC와 퍼즐을 잇는 매개항이다. 남편에게 퍼즐은 안락한 중산층 삶의 도판인바, 문제는 실험과 퍼즐이 갖는 현실 재현력. 몇몇 양성자들의 충돌실험이 거대한 우주탄생의 순간과 동일시될 수 없듯이, 퍼즐 위에 구축된 질서와 조화가 삶의 그것과 동일시되진 않는다. 삶은 2천 피스 퍼즐보다 훨씬 더 많은 변수와 돌변항들의 난장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필요한 건 삶의 은유인 퍼즐을 뒤엎고 삶의 외부를 상상하기, “물질의 미혹에서 벗어난 존재의 근원”을 사유하기.
3. 음모론적 관점
LHC프로젝트가 시작되자 일부 기독교 단체는 잇달아 우려를 표한다. 소립자가 최초로 질량을 가지면서 하나의 ‘물질’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실험이다 보니, 창조론이 버틸 여지가 사라질 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태초에 힉스가 있었다’로 대체될 위기. 다윈의 진화론이 창조론을 상징신화로 격하시켰다면, 힉스의 발견은 창조론을 동화로 한 단계 더 추락시킬 것이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음모론이 득세할 수밖에. 666을 연상시키는 CERN의 로고는 음모론의 단골메뉴이고, CERN 건물 앞에 설치된 힌두신 시바의 동상은 주요 공격대상이다. 시바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수단계로서의 파괴, 혹은 파사현정을 위한 파괴를 담당하는 신인데, 음모론자들은 LHC이 적그리스도 시바를 호출하기 위한 스타게이트라고 주장한다. ‘태초의 말씀’을 폐기하려는 힉스주의자들이 신의 질서를 파괴하여 통제불가능한 상황을 유도, 그 혼란을 틈타 지옥문을 열고 적그리스도를 영접하려한다는 것이다.
<거대음모>는 LHC의 블랙홀이 빨아들이는 게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갑작스런 아내의 외도와 노망든 킬러의 수다도 영혼을 잠식한 LHC의 블랙홀 때문이다. 양성자 몇 개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들일 에너지가 있는지, 왜 남편의 영혼만은 멀쩡한지 등과 같은 지엽말단적 질문은 삼가자. 그보다 더 큰 의문들이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아니, 아내가 스스로 스포일러가 되어 폭로했듯이 어차피 <거대음모>든 삶이든 “거대한 농담”(밀란 쿤데라) 아닌가.
4. 페미니즘적 관점
아무리 ‘농담’이지만 따질 건 따지자. 고래로 남편의 불륜은 비극이 되고, 아내의 불륜은 코미디가 되어왔다. 남성관객 혹은 남성검열관에게 적합했기 때문이다. 불륜남편은 세상에 대한 환멸과 삶의 피로감에 지쳐 실존적 고뇌를 하는 인물이 되어 우주를 짊어진 척 똥폼을 잡지만, 불륜아내는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해 실수를 저지른 부도덕한 여자로 취급된다. ‘남편에겐 변명을, 아내에겐 조롱을’, 아침드라마의 구호이다.
<거대음모>의 아내 캐릭터는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우며 경박하고 불안정하다. 이런 (전형적) 해석은 희곡 탓이기도 하지만, 연출가와 배우가 택할 수 있는 손쉬운 대안이기 때문이다. 낯선 정답보다 친숙한 오답에 손이 가는 법이다. 두 남자의 삶을 망가뜨린 두 여자, 즉 킬러에게 화대를 받은 엄마와 녹차 때문에 살인을 결심한 아내는 캐릭터의 굴곡과는 달리 무대에서는 밋밋한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대 밖 인물인 엄마는 그렇다쳐도, 무대에 상주하는 아내의 캐릭터는 (극작가든 연출가든) 상대적으로 들인 공이 모자라다. 후반부로 갈수록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내의 연기가 그 증거. 그 속에는 불륜남에게 비소를 먹인 치밀함이나 “현대문명이 대량생산한 기계들”에게 복수를 하는 자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 자의 여한과 애탄 또한 읽히지 않는다. 오직 남편만 보여주면 되기 때문이다.
5. 수사학적 관점
<거대음모>는 남편이 권총을 손에 쥐고 인질극을 벌이는 지점을 전후로 해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불륜남과 킬러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 남편의 상황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출생의 비밀, 지구구원, 지구소멸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의 지지대가 약화되면서 수습불가상태로 내닫는 전형적인 전강후약 그래프를 그린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대음모>를 3분기 우수작 반열에 등극시킬 수 있는 결정적 힘은 개성 강한 캐릭터와 배꼽 잡는 상황설정 위에 올라탄 식감 좋은 쫄깃한 대사! 요절복통 대사가 장면을 열면, 잔뜩 고양된 그 장면은 다시 폭소유발 대사를 길러낸다. ‘약빤 대사빨’의 점층법 공식이다. 무엇보다 눈부신 건 번역극에서나 보던 유럽식 위트! 테마-레마(theme – rheme) 중심의 건조한 대사구성법을 탈피하고 문장 주변의 다양한 정보(콘텍스트)를 발판삼아 언표내적 효력을 뒤집거나 배반하는 석지윤 작가의 현란한 화술은 우리 극작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지이다. 예를 보라.
킬러 젊은 친구가 주둥이를 재간스럽게 놀리는구먼.
사내 보청기 밧데리는 아직 남으셨나봅니다.
킬러 자네, 방광에 총알이 박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사내 요실금으로 고생할 일은 없겠죠. 밤에 자주 깬다는데, 정말입니까?
킬러 정녕 기저귀에 피를 묻히며 살겠다는 건가.
사내 그렇게 되면 몇 개 빌려주시죠. 다 쓰지도 못하고 가실 거 같은데.
6. 서사학적 관점
<거대음모>는 정교하게 직조된 위트와 그에 걸맞은 적절한 템포와 타이밍의 묘기를 선보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오묘한 대사 신공조차 후반부의 서사적 패착을 이겨내지 못한다. 전반부, 즉 킬러와 불륜남이 남편 소유권을 놓고 한판승부를 겨루는 장면까지 대사의 성찬이 지나면, 급체와 현기증과 체력저하가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은 서사에서 비롯된다.
첫째, 전후 불균형. 한마디로 전반부는 20분이 허락된 공간에 40분을 투여했고, 40분이 필요한 후반부는 20분으로 찌부러뜨렸다. 전반부는 폭소가 점화된 대사 하나하나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지만, 후반부는 벼락치기 하듯 비약을 남발한다. 때 아닌 춤쇼, 불륜남의 엉뚱한 죽음과 소리 소문 없이 자연사 해주시는 고마운 킬러님, 주 52시간 준수에 앞장서는 경찰병력의 헛발질, 너무나 손쉬운 아버지와의 접속, 허무한 지구소멸 등 도망치듯 내빼는 서사적 폭주는 정교한 템포를 자랑하던 전반부의 섬세함을 무색케 한다.
둘째, 이야기 규모의 부조화. 소소한 가정사와 인류구원이라는 거대담론과의 결합은 심히 조화롭지 않다. 전반부의 서사 규모는 수세에 몰린 남편이 불륜남과 킬러를 제압하고 가정을 지키거나, 삶에 대한 새로운 각성으로 정신적 해방에 도달하는 정도의 기대지평을 제기한다. 하지만 남편을 둘러싼 기존의 갈등구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편 혼자 세계구원을 향해 원톱으로 질주한다. 아버지와 두 번의 통화 후 성사되는 남편의 영웅서사는 어떤 정신적 고난이나 통찰 없이 손쉽게 주어지는 것이라서 극적 재미가 일도 없다. 오히려 평범한 중산층 삶의 허약성을 유쾌하게 까발릴 절호의 기회는 우주적 음모에 압살, 실기되고 만다. 남편의 실패한 삶은 영웅신화에 가려져 은닉되고 만 것이다.
아내를 비롯해 엄마, 아버지의 행동을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은 그 모든 것이 LHC 탓이라는 음모론을 내세우지만, 그의 섣부른 이해와 판단은 아버지의 실수를 유발해 지구소멸을 야기하는 방아쇠가 된다. 퍼즐맞추기가 취미인 남편은 자신의 성마른 음모론에서 퍼즐조각처럼 완벽하게 이가 맞아떨어지는 인과관계를 발견하지만, 세상일은 그처럼 밋밋하게 여며지는 요철이 아니다. 퍼즐은 완성품의 파편을 조합하는 작업이지만, 삶에는 완성품도, 모형도 없다. 삶의 퍼즐은 유동적이고 무형이라서 복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저 주어진 파편들을 억지로 이어붙이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남편은 자신의 마지막 퍼즐조각을 잃어버린 영혼의 복원이라고 설정하지만, 결국 그 오지랖은 우주라는 퍼즐판을 뒤엎는 것으로 종결된다.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무효라는 어이상실 처방.
셋째, 서사적 장치의 부족. 하나의 소장면은 ‘사건 – 감정 – 행동’이라는 인과율 단위(causality unit)의 연속체로 구성되나, 후반부에선 이 단위가 극도로 짧아지거나 생략되면서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만다. 한발자국씩 정성스레 밟아가던 전반부의 스텝은 ‘빨리감기모드’가 되어 성큼성큼 관객을 앞질러버린다. 불륜남과 킬러가 소모품처럼 삭제된 후 이어지는 영혼적출, 지구구원, 우주소멸 사건 등은 적정한 인과율 단위를 밟지 않고 마구 ‘설명’된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와 규모로 비약하는 이야기를 주무르기 위해서는 남편의 추동행위에 인과율을 부여해주는 제3의 인물(이른바 impact character)이 필수적이다. 남편의 추가적 모험 시퀀스 없이 지구의 운명에 접근할 수는 없다. 전화 한 통화로 아버지를 설득하고 지구멸망을 막았다는 설정은 손 안대고 코푸는 안이함도 그렇거니와 서사적 도약대 없이 인과율을 월경하는 황당무계를 피할 길 없다.
넷째, 관통행위의 일탈. 사랑에 목매는 로맨틱 터프가이로 포지셔닝된 불륜남이 돈에 목숨 거는 양아치로 급변하거나, 남편의 생부임이 분명한 킬러가 응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혹은 일정한 행동선을 유지하던 아내가 불륜남 사망 이후 음독살해를 고백하고 현대문명 운운하는 걸크러시로 돌변하는 양상 등은 명백한 일관성의 파괴이다. 특히 고백 이후 아내의 욕망은 무엇인가? 남편도 죽일 텐가? 한 인간의 전체와 전 인생을 관통하는 내면적 본질이 ‘캐릭터’이고, 한 캐릭터가 관객의 호감을 사는 것은 상황을 타개하는 힘을 발휘할 때인데, 이런 과잉된, 혹은 결핍된 캐릭터 정체성은 서사적 동력을 침탈하는 독소이다.
7. 연출론적 관점
어려운 텍스트 맞다. 쉬운 게 있겠냐만, 큰 구멍들과 엇박자에, 잘 나가다 삐딱선 타는 이런 희곡을 요리하기란 쉽지 않다. 전반부에 보여준 연출의 정밀함만으로도 높은 평점이 아깝지 않지만, 한편으론 연출이 전반부의 눈부신 대사 드립에 도취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허리띠 졸라매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기보다는 전반부의 쾌속항진에 편승한 것. 소규모 변곡점들에서 인물의 심리와 행위가 충분히 섭양되었는지도 따질 만하다. 예를 들어, 불륜남의 양자 결심, 아내의 음독 실패, 킬러의 생부 확인, 아버지와의 화해 등 연출의 적극적 채색이 필요한 장면들을 절제해버린 건 아닌지 궁구해야할 것이다. 시바와의 알현은 일종의 쿠키컷(credit cookie)이라 할 수 있는데, 호사스런 고가 식재료로 라면을 끓인 듯한 아쉬움이 있다. 이런 아쉬움을 만회하는 길은 재공연 밖에 없다. 재공연이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