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사진결혼’ 그 잊힌 역사 속의 여인
‘운명’, 무엇을 위한 ‘운명’인가?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작: 윤백남
연출: 김낙형
단체: 국립극단
공연일시: 2018/09/07-09/29
공연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2018/09/29
흙바닥에 형태의 틀만 갖춰진 탁자와 의자, 그리고 주전자와 컵이 보인다. 막힌 면이 없으니 모든 것이 그 틀 안으로 여과 없이 통과된다. 마치 투명한 무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유령 같은 무대. 국립극단의 근현대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중 아홉 번째 작품 《운명》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수탈을 피해 미국 하와이로 이민노동을 떠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던 우리 초기이주동포들의 삶의 이면을 삽화적으로 그린다. 신문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가십기사처럼, 《운명》은 당시 시대가 지녔던 아픔의 무게를 덜어내고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그려냄으로써 오래된 낡은 신문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작은 역사의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담백하게 읽어내게 한다. 실제 공연소개 전단도 신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와이이주노동자들은 고국의 여인들과 결혼하기위해 사진만 보고 혹은 그마저도 못보고 소위 ‘사진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실재했으나 잊힌 그 슬픈 역사가 유령처럼 투명한 상처를 안고 현재 앞에 섰다. 과연 그 상처는 이 시대에 와서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이루었을까?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의 척박한 삶을 기록한 기사와 사진 영상들이 무대 뒷면에 투영되고, ‘사진결혼’으로 가정을 이룬 세 여인이 쥐꼬리를 핑계로 푸짐하게 한 판 수다를 벌인다.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하와이 이주노동자동포들의 어려운 삶의 자락들을 빠르게 습득하게 된다. 남편 얼굴도 못보고 ‘사진결혼’을 한 여인들. 그래도 돈 좀 손에 쥘 수 있다는, 그걸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다는, 혹은 그런 생각들에 강제로 선택을 강요당해 덜컥 그런 혼인을 하고 낯 선 땅에 낯 선 남자들과 가정을 이룬 여인들. 노예처럼 노동하는 그들의 남편, 사내들은 서러움과 고난으로 술과 도박에 빠져있고, 여인들은 가난, 출산과 육아 더하여 노동까지 해내야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 사내들의 폭력과 가부장적 권위의 강요에 복종해야하는 출구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세 여인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원치 않는 ‘사진결혼’의 폐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역시 빠르게 학습한다. 그네들의 이웃의 부인이 강요된 결혼생활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려 밀항을 하다, 남편에게 들켜 그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여인들의 그 많은 평범한 수다들의 한 부분인 듯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 이야기가 이 작품 《운명》의 골자임을, 들으면서 당장 눈치 채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고단한 삶이지만 해학과 풍자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려 애쓰는 여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가려져서이다. 속된 흔한 말로 ‘참을 만 했으니 참고 살았다’는 그 부당한 평가 속에 가려져서란 말이다. 그게 ‘운명’이라면서.
참으로 그 잔인한 ‘운명’처럼 주인공 메리는 조선에 사랑하는 남자 수옥을 두고 아비의 강요로 길삼과 ‘사진결혼’해 하와이로 이주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내 가슴에 참을 수 없는 의문을 안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마침 하와이에 와서 그녀를 만나러온 수옥을 보자, 부당하게 숙명으로 여기며 참아왔던 모든 인내가 수옥을 향한 애정으로 폭발하고 만다. 이를 알게 된 길삼은 수옥과 함께 있는 메리를 향해 칼을 겨누고 한판의 실랑이 끝에 메리는 길삼을 죽이고 만다. 그렇다. 이런 이야기라면 현재의 시각에서 《운명》은 그저 불행한 역사 속에 놓인 한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멜로드라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2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한 무고한 여인이 처한 당대의 부당한 처우와 불행한 비극적 운명을 고발하는 사회적인 계몽극인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하늘이 주신 ‘운명’이며 그 여인의 운명처럼 그 여인과 끝까지 그 ‘운명’을 함께 하겠다 선언하듯 하늘을 향해 외치는 처절한 수옥의 외침이 뜨거운 사랑이자 사회적 정의로 비춰졌을 것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시대다. 지금의 우리에게 메리와 수옥은 어찌 보이는가. 메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은 개선이 되었을지는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지금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인식되는 가운데, ‘모든 것이 하늘이 주신 운명’이라는 수옥의 외침은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외치는 계몽의 선언이 아닌, 사랑이라는 낭만의 굴레에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두어 두려는 또 다른 공허한 사회적 위선으로 변질되어 들린다.
의미로서만 당대의 고전작품을 이해하고 가치를 매기는 작업이 과연 얼마큼 실효가 있는 것일까?
연출은 이 희곡이 가지는 구성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역사적 기록영상을 적절히 배치, 사용하고, 여인 역할들의 장면을 새로 구성하여 덧붙여 해학과 풍자로 연극적 재미를 풍성하게 하였으며, 길삼이 메리와 수옥의 연서를 읽어내는 장면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두 연인의 듀엣 춤으로 설정하는 것은 물론, 당대에는 아주 진한 신파적이었을 어투를 담백하게 풀어냄으로써, 당대의 신파적 어투는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어투의 세련됨을 갖추도록 조율함으로써 시대적 메시지에 갇혀 고립된 희곡을 현대의 즐겨 볼만한 공연으로 성공적으로 재생해 내었다. 앞서 언급했던 무대와 소품디자인,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통시적인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한 희곡의 담론이 여전히 이 공연이 풀어내지 못한 족쇄임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래서 당대 초기 하와이이주노동자 동포들의 잊힌 비극적 삶의 역사는 흙 속에 묻힌 유령에서 다시 재생되었으나, 여인의 삶은 여전히 그 흙 속에 묻혀 살아나오지 못하고 다시 실체 없는 유령이 되어 한동안 떠돌 것만 같다. 《운명》은 결코 ‘운명’으로 끝내서는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