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시대, 카뮈에게 길을 묻다.
《페스트》
글_고수진(연극평론가)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고 했던가? 온 세계가 전염병의 공포로 떨고 있다. 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치료법과 예방법은 무엇인지? 대유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 채로 국경은 폐쇄되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상황이 심각한 나라에서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고 있다. 불안에 떨며 집안에 스스로를 가둬야 하는 지금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책이 있다. 바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다.
1947년 출간된 소설 《페스트》는 알제리의 평범한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한다. 쥐들의 죽음을 통해 역병의 징후가 곳곳에 나타나지만 시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다. 그러나 사망자가 하나 둘 늘어가면서 전염병은 도시를 잠식한다. 결국 도시는 봉쇄되고 시민들은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고립의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소설은 재앙에 맞닥뜨린 인간들의 모습을 화자인 의사 리유의 냉철한 기록으로 보여준다.
사실 카뮈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이다. 작품 속에는 전쟁 통에 연락이 끊긴 아내와의 이별, 지병인 폐렴으로 요양원에 고립 되었던 경험 등이 녹아있다. 이런 창작배경 때문에, 도시를 덮친 페스트는 전쟁의, 그에 맞서 싸우는 보건대는 레지스탕스의 은유로 해석되기도 한다.
소설 《페스트》는 국내에서도 연극과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며 사회상을 반영해 왔다. 2015년 산울림 고전극장에서 극단 걸판의 오세혁이 연출한 <페스트>는 극중극으로 카뮈의 희곡 <계엄령>을 삽입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의 모습을 한국사회의 그것으로 치환하고, 그들의 이기심과 무능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저항을 극단 특유의 활력 넘치는 무대로 구현해 내어 호평을 받았다.
한편 2016년에는 <페스트>가 서태지의 음악을 입힌 주크박스 뮤지컬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시대상의 반영에 중점을 둔 연극에 비해 뮤지컬 <페스트>는 배경을 미래로 옮기고 배역의 성별과 나이 등을 바꾸어 의사 리유와 조력자 타루의 러브라인을 만드는 등 뮤지컬 장르에 맞는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한 변형을 거쳤다. 그러나 원작이 가진 주제의식을 담아내면서 대중적인 관객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거기에 음악적 완성도까지 담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지라 음악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은 반면, 주제와 극 구성의 유기적 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음표를 남겼다.
2018년 국립극단은 박근형 각색, 연출로 <페스트>를 공연했다. 박근형 연출은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세운 벽에 철조망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켜 분단으로 고립된 한반도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원작의 설정에 동시대성을 녹여냈다. 또 주인공 리유를 2인 1역으로 설정하여 카뮈가 의도했던 객관적 시선을 제시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현실의 모순을 한 발 떨어져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2020년 봄, 카뮈의 《페스트》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스란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 엄청난 기세의 병과 싸우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의사 리유, 외지인이지만 자발적으로 보건대 조직에 앞장서는 타루, 재난은 결코 회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기자 랑베르, 규범이나 신앙이 아닌 인간을 위한 투쟁에 합류한 오통 판사와 파늘루 신부, 보건대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말단공무원 그랑까지. 서술자는 이 중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보잘 것 없고 존재도 없는’ 그랑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이야기가 결코 영웅주의 서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영웅주의에는 부차적이라는 본래의 지위, 즉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그 앞에 놓일 수 없는 그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범한 일상이 이토록 소중하고 그리울 줄 몰랐다고. 감염의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 마주앉아 밥 먹으며 이야기하고, 맞잡은 손의 온기로 인사를 전하는 그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하는 우리. 우리들의 그런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이 시련을 끝내는 방법임을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가난한 작가지망생 그랑이 공들여 써내려간 글귀가 귓가에 맴돈다.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떤 날씬한 여인이 눈부신 밤색 암말에 몸을 싣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
그랑은 페스트를 이기고 살아났다.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잘 읽고 갑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고 일상의 삶이 빨리 다시 오기를 바래봅니다.
폐쇄,봉쇄..지금상황과도 맞는 작품 페스트네요
질병에 대한 공포, 사람과의 만남이 두렵고 서로 불신하는..딱 고립의 시대입니다 이 상황이 현재만 있었던것이 아니라 인류역사 대대로 직면한 문제이고 우리 후손들도 겪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숙제 같네요..각 시대별로 잘 정리한 연극평론..감명깊게 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