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을 목소리의 하모니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

 

이유영(연극평론가)

 

 

연출: 박경식

제작: 핸드스피크

협력: 공연창작소 공간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일시: 2020428일 오후 3시 무관중 공연 실황 생중계

(51일부터 31일까지 공연 영상 세종문화회관 네이버TV로 무료공개)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사라진 사람들, 피어난 이기심

 

<사라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서사로 이루어졌다. 1장이 ‘주인 없음’이며, 2장이 ‘달빛 도망’이다. 1장은 묶은 머리 나라(아하 묶머나)의 공주와 풀은 머리 나라(이하 풀머나) 왕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두 나라 간의 땅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을 보여준다. 50년간 이 싸움에서 결국 남은 것은 인간들의 죽음이며, 그 땅을 소유하게 된 흰나비뿐이다. 2장은 누군가에 쫓겨 도망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함께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기도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들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게 된다.

두 서사는 모두 이 공연의 부제로 보이는 ‘삶과 죽음의 순간. 두려움에 가득 찬 인간들’을 구현한다. 1장과 2장 사이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이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극을 관통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두려움이다. 1장에서 50년을 이어온 싸움이 묶머나의 사람들과 풀머나의 사람들 모두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2장 역시 등장인물들이 모닥불 앞에 모여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지만, 생사가 걸린 순간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소녀를 두고 각자 살길을 떠나는 것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두려움의 이면에는 극한의 상황에서 나오게 되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는 인간의 이기심이다. 1장에서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면에는 묶머나와 풀머나 사이에 존재하는 땅에 대한 욕심이 있다. 이 욕심은 결국 서로를 죽이는 싸움으로 변질하여 자기 나라 사람들의 안위만을 혹은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면서 이기심으로 탈바꿈해버렸다. 2장에서는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걷기 힘든 소녀를 두고 떠나는 남자의 심리 변화로 이 점이 잘 표현된다. 함께 도망가던 사람들이 다리를 다친 소녀와 함께 가는 것을 꺼리지만, 남자는 그 소녀를 업고 동행한다. 하지만 그는 병사의 죽음으로 직접적인 죽음의 실체를 느끼게 되자 소녀를 버리고 홀로 떠나는 선택을 한다. 홀로 남게 된 소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그가 그런 애원을 들어주지 않게 된 이면에도 죽음 앞에서 이타적일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이 보인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사라지는 사람들>은 제목 그대로 죽음 때문에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사람들이 사라지는 자리에 두려움의 포장을 쓴 이기심이 남았다. 그런 이기심이 부질없다는 것을 1장은 흰나비가 묶머나와 풀머나가 소유하려고 했던 땅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2장은 홀로 남아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녀로 두려움과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나버린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나게 될 때 초래할 수 있는 비극적이면서도 무서운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홀로 남은 소녀에게 남은 것은 총소리 말고는 없었다. 이 장면을 통해 <사라지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반문한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라고 보는가.’

연극의 서사는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단순한 서사에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적인 질문이 더해지면서 서사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무대의 빈틈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물론 이는 영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의 빈틈을 느낄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수어와 음성어가 동시에 조화를 이룬 목소리의 형태들로 서사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경계 없이 공존하는 수어와 음성어

 

<사라지는 사람들>의 백미는 목소리를 형태로 전달하는 점이다. 이는 서로 다른 목소리의 조화로 수어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인 연출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점이기도 했다. 연극은 시작부터 음성어와 수어가 공존했다. 1장의 해설자로 두 배우가 등장하는데, 강다형 배우가 음성어로 상황을 설명하고 그 옆에서 박지영 배우가 수어로 목소리를 전달한다. 각기 다른 목소리가 한자리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공존한다. 그러면서 관객은 경계가 무너진 음성어와 수어를 동시에 듣고 본다.

이렇게 두 언어를 동시에 전달받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연극의 핵심이면서도 흥미를 유발한다. 이것이 가장 잘 표현된 부분은 각 장에서 한 장면씩 찾을 수 있다. 1장은 50년 동안 싸움이 이어졌다는 해설자의 설명 이후, 묶머나의 왕과 딸이 대화하고, 뒤이어 풀머나의 왕과 아들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무대에는 다리가 소도구로 세워져 있는데, 다리 위와 아래에 각각 두 쌍의 묶머나의 왕과 딸, 풀머나의 왕과 아들이 등장한다. 이때 묶머나는 수어를 하는 두 배우가 다리 위에 있고, 무대 메인에는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이 있다. 풀머나는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이 다리 위에 있으며, 무대 메인에는 수어를 하는 배우들이 있다. 수어를 하는 배우들과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이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음성어와 수어로 연기한다. 마치 이원생중계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이 순간, 서로 다른 목소리는 하나인 듯 하모니를 이루면서 두 목소리가 청각적이면서도 시각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2장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다. 무대 센터에 도망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청인‧농인 배우들이다. 그리고 무대 양쪽 사이드에는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이 앉아 있다. 청인‧농인 배우들이 수어로 연기하면, 사이드에서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이 음성으로 동시에 연기한다. 이 장면에서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은 행동 없이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기 때문에, 1장보다는 언어가 공존한다는 느낌이 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두 목소리가 동시에 전달되면서 하나의 목소리 같은 효과는 있었다. 다만, 이러한 강점은 실제 극장에서 관극할 때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라지는 사람들>이 영상으로 관객들이 만났기 때문에, 이러한 강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이러한 아쉬움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려고 한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이미지로 전달되는 목소리의 형태

 

두 목소리를 동시에 전달하다 보면, 자연히 서사는 복잡해질 수 없을 것이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서사를 단순하게 구성한 대신, 시청각적인 이미지를 다양하면서도 강하게 전달한다. 먼저, 음성어 익숙한 우리에게는 수어 역시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음성어와 수어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청각의 시각화, 시각의 청각화로 두 목소리 자체가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이렇게 목소리를 형태화시켜 이미지로 보고 들을 수 있게 하려는 시도는 연극 전체에 존재한다. 시각적으로인 효과로는 색깔 있는 부채(1장)와 우산(2장)이라 할 수 있다. 1장은 두 나라의 대립을 표현하듯, 대비되는 두 가지 색의 부채가 주를 이루었다. 2장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듯, 다양하면서도 강렬한 색의 우산을 사용했다. 부채와 우산이 각각 음악 또는 노래를 만나 청각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시청각의 복합적인 이미지성은 한층 강해진다. 1장에서 음악과 함께 부채를 들고 군무하는 장면이 그러했으며, 2장에서 쫓기던 사람들이 모두 불 앞에 모여서 노래를 부를 때 우산을 들고 군무하는 장면이 그러했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두 장을 비교해보면, 2장이 이미지 효과가 더 강했다. 불의 형태가 그려진 우산을 펼치면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노래가 나온다. 이때 주요 인물들이 모두 청인‧농인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노랫말─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내용─을 수어로 전하면서 무대 전체는 이미지화된 목소리가 지배한다. 무대 양 사이드에 앉아 있던 음성어를 하는 배우들도 무대 중앙으로 모여 수어로 노래하는 배우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실제로 두 목소리를 내는 배우들이 같이 노래하는 것으로 가시화되면서 감동적인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때 형형색색의 우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두 목소리가 만나 시청각적인 이미지가 분명하게 전해진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방구석 1열로 전해지는 의미

 

<사라지는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자체가 무관중으로 세종문화회관 네이버TV로 생중계되었다. 방구석 1열에서 볼 수 있는 연극이었다. 이 연극은 방구석1열에서 보는 장점이 잘 드러났다. 즉 극장 1열에서 관극을 해도 자세하게 볼 수 없을 디테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어로 말하는 배우들의 표정과 손끝에서 미묘하게 전해지는 감정까지도 모두 볼 수 있었다. 아마 실제 공연장에서 봤더라면, 그들의 표정 연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기록한 화면만을 보기 때문에, 연극과 달리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제한된 시야로 인해 1장과 2장, 그중에서도 1장에 나오는 두 목소리가 공존하는 장면─앞에서 언급했던 장면─의 의미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카메라는 무대 메인에 있는 두 쌍의 인물들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이 연극의 재미와 의의를 놓치게 되었다는 점은 아쉬울 따름이다. 실제 무대를 통해서 봤다면, 두 목소리가 공존하는 장면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영상은 이것을 담아 주지 못했다.

 

(출처:’공연창작소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영상으로만 관극할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의의가 있다. 현재 우리는 유례없는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다. 바이러스라는 보이지 않았던 실체가 코로나19로 가시화되어 두려움과 공포를 매순간 느낀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가 커지자 이기적인 행동─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행동 등─들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라지는 사람들>이 코로나19 시대의 시의성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커지면서 이기심을 품게 되는 무대 위 인물들은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제의식으로 보이는 2장 노래의 가사를 생각해본다면, 연극은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 이기적인 마음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함께 이겨나가자는 의미가 아닐까. 이러한 메시지가 무대 위 목소리들의 하모니로 전해지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는 삶, 서로 다름 혹은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는 삶의 의미가 더 강해진다. 물론 방구석 1열에서만 이 연극을 관극한다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때에 이 연극을 방구석 1열에서라도 볼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의미 있는 관극 경험이지 않았을까.

여전히 무대 위에, 아니 꺼진 화면에 두 목소리의 하모니는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영상을 본 관객들에게도 두 목소리의 하모니는 오래도록 남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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