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2-국·공립 극단
글_오세곤(연극평론가)
우리나라에는 국립극단이 단 하나이다. 그게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너무 오래 그래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 제정된 국립극장 설치법 제2조를 보면 “국립극장은 공보부장관이 직할하고 서울특별시와 각 도에 설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1950년 당시 “각 도”라 하면 지금의 광역지자체, 즉 전국 17개 광역시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법은 1950년 최초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타법에 흡수되면서 폐지되었지만 그 내용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또 이 법 제1조를 보면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립극장을 경영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국립극장에 국립극단이 있었던 것이다. “연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국립극장에는 국립극단이 없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0년 법인으로 독립한 국립극단에는 정규 단원이 없이 일종의 계약직인 시즌별 단원만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정규 단원이 있던 시절에도 그 수는 30명 미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조차 정원을 다 채운 예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안다. 또 정규 단원은 대부분 배우들뿐이었다. 거기에 국립극장 또는 국립극단 소속으로 소수의 기술 스태프와 기획 스태프가 있었을 텐데 정확한 소속과 신분은 잘 모르겠다. 다만 연출이나 작가, 드라마투르그 등의 인력이 정규직으로 소속된 적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2010년 국립극단을 국립극장에서 분리할 때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이유 말고 암암리에 오가는 것으로 국립극단 단원들이 노조를 만든다든가 하면서 너무 이기적인 태도로 과한 요구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사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단원들이 예술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오디션을 거부한다든가 국립극단 작품은 의무 편수만 채우고 외부 활동에 더 몰두한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연극계에 꾸준히 흘러 다녔다. 결국 정규 단원들이 무사안일과 이기주의에 빠져 국립극단이 국립극장에서 쫓겨나는 사태를 자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단 후 60년, 그러니까 2010년이 되기까지 단 30명의 정원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해 온 것이나, 단원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순환보직으로 내려오는 공무원들 앞에서 예술가인 단원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는지, 국립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적은 예산밖에는 책정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즉 국가가 저지른 원초적인 잘못과 부실은 슬그머니 제쳐놓고, 오히려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이유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예술가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지자체가 문예회관을 지었다. 그래서 그 문예회관들의 모임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생겼다. 그리곤 문예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미 제작된 공연 작품을 뽑아 무대에 올린다. 매년 공모가 뜨면 수많은 공연 단체들이 작품을 내놓는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후보로 선정되면 다음에는 각 문예회관 기획자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렇게 두 번의 관문을 거친 작품들이 각 지역 문예회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문예회관의 관객은 우리 국민들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관람할 공연 작품을 일종의 외주로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얼핏 향유자인 국민의 입장을 살펴 양질의 작품을 고르기 위해 그런 경쟁적 선정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뽑힌 작품들에 책정되는 금액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정 정도 이상의 공연 횟수를 보장받지 못 하면 참여 예술인들에게 최저 임금은커녕 최저생계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액수를 지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그 문제 많다는 건설 현장처럼 무자비한 경쟁과 착취적 하청 구조가 횡행하는 것이 바로 문예회관 공연을 통해 드러나는 참담한 현실이다.
더욱이 최종 선정된 목록을 보면 대부분 유명인이 출연하거나 이미 많이 공연되어 지명도를 확립한 특별한 단체의 특별한 작품들뿐이다. 그러니 자본도 없고 힘도 없는 수많은 보통 공연단체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 셈이다. 이렇듯 우리의 공연 현장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 외에는 모두 탈락자가 되어 스스로 능력과 실력의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는, 한마디로 부익부빈익빈, 야만적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술의 중심 동력을 경쟁에서 얻겠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수많은 보통 예술가들을 실패자로 만드는 것 역시 완전히 그릇된 방향이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민들이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세금으로 문예회관을 지었다. 국립극장에 국립극단을 두는 게 당연하듯이 그 문예회관에도 공연단체들을 두어야 한다. 그것을 외주로 채우는 방식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방금 살폈다. 이제 그 야만을 멈춰야 한다.
앞서 국립극장 설치법 제2조에서 보았듯 광역지자체별로 국립극장을 둘 수 있다. 그러니 국립극단도 하나가 아니라 각 시도에 설립할 수 있다. 법으로 명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시도를 안 한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또 그런 요구를 전혀 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공연계 전반의 인식 부족을 탓하기에 앞서, 특히 협회장이나 교수, 평론가 등 공연계 발언 주도층의 책임을 크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전국 광역시도에 하나 이상의 국립대학이 있다. 국립극단도 그래야 한다. 또 광역 단위의 도립이나 시립 극단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당연히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기초 단위 지자체들도 문예회관을 짓는 데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극단을 필두로 공연 단체를 어떻게 설립하고 운영할지 고민해야 한다. 진정으로 주민들에게 양질의 공연을 선사하고 싶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지원받은 문예진흥기금에 약간의 자체 예산을 보태 덤핑 가격으로 사 온 유명 작품을 가지고 주민들에게 생색을 내겠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국립극단은 전국 모든 공공극단 운영의 모델이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모델에 문제가 있다. 정규 단원이 없는 운영 체제는 결코 따라 할 만한 모델이 아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별로 많지도 않은 공공극단 중에는 정규 단원의 수가 극히 적거나 전혀 없는 경우가 꽤 있다. 심지어 아예 설립 계획부터 예산과 관리상의 편이를 이유로 사무 책임자만 두고 예술가들은 수시로 뽑아 쓰는 식으로 짜는 수까지 있다.
혹자는 말한다. 예술가들은 편해지면 작품이 안 나온다고. 예술과 안정은 병립할 수 없다고. 틀린 말이다. 왜곡된 해석이다. 예술가들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 티끌만큼 낫게 만들고자 태산만큼의 공을 들이는 것이 예술가들이다. 바늘구멍만 한 흠에도 몇 날 며칠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예술가들이다. 그들이 어찌 편할 수 있고, 어찌 안정될 수 있겠는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이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과의 싸움에 진력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자리를 안정시켜 주어야 한다.
전국 각지에 국립극단이 생기고, 도립극단과 시립극단, 그리고 기초 단위의 공립극단들까지 설립되어야 한다. 거기에 많은 연극인들이 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는 배우뿐 아니라 연출, 작가, 드라마투르그, 기술 스태프, 기획 스태프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그 연극인들 중에는 국·공립극단 한 군데를 선택하여 붙박이로 오래 있는 이도 있을 것이고 자주 자리를 옮기거나 아예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자유롭게 객원으로만 활동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단체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연극인들에게 그렇게 많은 가능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양질의 많은 작품이 생산되고, 많은 국민들이 연극의 참맛을 알게 되고, 그래서 더욱 연극의 수요가 많아지고, 결국 더욱 많은 국민들이 연극을 즐기며 더욱 행복해지는, 이른바 연극 선순환구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뉴딜은 이래야 한다. 역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울북부지원, 남부지원, 법원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서초동에 있는 법원은 서울중앙법원입니다. ‘중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를 아실겁니다. 우리도 국립극장이라고 하지 말고 국립중앙극장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국립’강원(춘천)’극장이라는 명칭이 생길겁니다.
지금 모든 연극인의 국립극단의 운영에 대한 불만은 , 제가 보기에에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는 제안이나 대안이 없이, 단원제에 국한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 옛 국립극단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게 뻔합니다. 지금 지자체의 구립성격의 극단도 한번 잡으면 놓치를 않는데, 그건 연극이 너무 열악해서 나타나는 현상, 다시 국립에 근본적인 시스템의 개선없이 단원제만 도입하면 구태를 반복할 게 뻔합니다. 선배들은 종신제를 요구할 것이고, 단원들은 이를 ‘직장’으로 여겨 노조로 대항할 겁니다.
하나, 사다리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향으로 진입하는 구조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구립, 시립극단을 제대로 만들어 운영해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둘, 국립극단을 공무원이 운영하는 체제에서 진정으로 연극인이 운영하는 운영위원회 체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술감독, 스텝, 단원임명에서 연극인이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사후 절대 평가와 레퍼토리선정 등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운영회의가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종신제를 방지할 평가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런 시스템의 보완없이 마냥 이상주의에 빠져 각자가 이기적인 생각으로 대들면 다시금 연극인의 갈등과 반목으로 다시 시끄러지면 난맥상을 보일 겁니다. 대학로의 환경과 의식의 변화, 그들의 생존의 보존없는
국립극단은 개개인의 이기주의로 인해 다시금 직장으로 추락하며. 노조라도 만들어지면 개선도 불가능하는 공룡으로 전략하게 될겁니다.
제가 장충동시절 공무원들로부터 자주 들은 말은 “제발 연극인들이 국립극단을 욕하고 부정적으로 보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건 체제의 보완과 개선이 없이 단원제가 되면 국립극단은 외려 국립극단은 많은 연극인들의 저주의 대상이 될 겁니다. 왜? 혜택을 보는자는 적고, 새로운 세대의 진입은 막히고, 기존단원은 기득권만 노리고, 예술감독은 3년마다 바뀌는데 단원은 종신이니 누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기회를 주시면 길게 ,세세히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